소설리스트

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45화 (45/135)

45.

먼 길을 빙빙 돌아 느릿느릿 걸었는데도 개구멍까진 금방이었다. 오늘따라 유독 다정해 보이는 작은 처소의 대문 앞에 하련솔을 세워두고, 이림범은 맞잡은 손을 괜스레 흔들었다. 그러자 하련솔의 팔은 물론이고 상체가 좌우로 흔들흔들 움직였다.

물끄러미 내려다본 하련솔의 얼굴에는 졸음이 가득했다. 커다랗던 눈이 가물가물 감기고, 숨소리가 곤한 것이 반쯤은 선 채로 잠든 듯 보였다.

“들어가. 잘 자, 형.”

“응, 너도.”

짧은 인사를 끝으로 이림범이 먼저 돌아섰다. 제 계획대로 풀린 게 아무것도 없는 밤, 그의 심장은 이유 없이 쿵쿵 뛰었다. 미련을 떨치고자 그는 성큼성큼 걸었다. 그런데 뜻밖에, 제 발소리 뒤로 다른 이의 발소리가 타박타박 따라붙었다. 의아한 마음에 휙 고개를 돌리자, 몇 발짝 뛰다시피 하며 저를 따라온 하련솔이 보였다.

이유를 묻는 대신 이림범은 눈썹을 으쓱였다. 그러자 하련솔이 웃는다.

“오늘 고마워, 범아. 영화 재밌었어.”

그러곤 허공에 대고 한 손을 휘휘 흔들어 보였다. 어서 가보라는 듯 손 인사였다. 그 모습을 빤히 눈에 담으며, 이림범은 뒷걸음질로 걸었다. 개구쟁이처럼 한 발 두 발 뒤로 걷자 하련솔이 눈썹을 찡그렸다.

“똑바로 가. 그러다 넘어져.”

잔소리를 들은 뒤에야 이림범이 등을 돌렸다. 그대로 저벅저벅 걸음을 움직이면서, 그는 당장 하련솔 앞으로 뛰어가 그 얼굴에 제 입술을 갖다 박고픈 마음을 억눌러야 했다. 그렇게 하면 기분이 하늘을 날 것처럼 좋아지고, 오늘 이 밤이 자신에게 특별한 기념일이 될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림범은 오늘, 이 밤을 하련솔에게 주고 싶었다. 그에게 오늘이 오롯이 즐거운 날이 되길 바랐다. 마음에 드는 영화를 보고 귀가한 하루의 끝, 기분 좋은 졸음으로 늘어진 몸을 포곤한 집이 받아주는 밤. 이 여상스러운 밤을 누릴 자격이 하련솔에겐 있었다. 영화 약속 하나에 무표정해지도록 긴장하던 그에게 무척이나 어울리는 밤이었다. 황제라고 해도 이 밤을 망칠 수는 없었다.

대신에, 이림범은 휙 등을 돌렸다. 그리고 마음에 묵힌 말을 뱉었다.

“형. 내가 보여줄게. 이 궁 안에서 누구 눈에 띄건 형은 무조건 안전할 거라는 거.”

“응?”

“내가 증명할게. 그럼 형도 안심하고, 황제인 나와 만나줄 수 있는 거잖아. 안 그래?”

“으응.”

하련솔의 대답은 심드렁했다. 맥주에 취하고 잠에 취한 듯, 아무렇게나 대답하는 소리가 미적지근했다. 제 말을 똑바로 듣고 있는 건지 그것조차 알 수 없는 남자를 향해 이림범은 팔을 크게 흔들었다.

이림범의 뒷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하련솔은 자리에 선 채 흔들거렸다. 멀찍이 놓인 화려한 침전으로 향하는 내내 이림범은 일곱 번 뒤를 살폈다. 그때마다 하련솔은 목을 뻗으며 그 모습을 사진처럼 눈에 담았다.

천진난만한 이림범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저러다가도 어느 순간, 등 뒤에 제가 서 있다는 사실을 잊을 것 같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하련솔은 두려워졌다. 지난 경험에 근거한 두려움은 추위가 되어 목에 스몄다.

“흐으….”

어깨를 위로 추켜올리며 하련솔은 팔을 떨었다. 청승은 길지 않았다. 약해빠진 몸에 오한이 들기 전에 얼른 제 처소로 돌아서야 했다. 조그마한 뜰로 통하는 나무 문을 밀어 열자, 입 밖으로 술기운에 젖은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 뜻밖에 기둥 너머에서 삐져나온 다리가 그를 반겼다. 쪽마루에 앉은 사내가 흙바닥 위에 툭 뻗어놓은, 두 다리가 기다랬다.

“…….”

느릿느릿 하련솔은 그를 향해 걸었다. 목을 앞으로 쭉 빼고 기웃거리며 다가서자, 기다란 다리의 주인이 서서히 드러났다. 고름도 깃도 없는 새하얀 겉옷에 달빛이 반사되어 그 모습이 유독 흐리고 커 보였다. 모자란 시력으로 상대의 얼굴을 식별해보려 두 눈을 좁게 뜨는데, 상대방은 고개를 갸웃거릴 뿐 먼저 제가 누구라고 알려주질 않았다.

“어, 혁아.”

가까스로 확신하여 하련솔이 그렇게 부르자, 이차혁이 웃었다.

“형.”

그를 향해 하련솔이 두어 걸음 다가섰다. 이차혁은 하련솔의 전신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머리칼은 흐트러졌고 귓바퀴가 붉었다. 표정은 졸린 듯 반쯤 풀어졌는데, 복장은 시종이 나름대로 가장 좋고 예쁜 옷으로 차려 입힌 모양새였다.

이차혁은 품에 안고 있던 선물을 꺼내 흔들어 보였다. 집게 핀으로 고정한 종이 뭉치로, 아주 두꺼웠다.

“전에 빌려주기로 한 소설 5권이에요.”

“이거 주려고 기다린 거야? 추운데. 감기 들겠다.”

“금방 올 줄 알고 기다렸죠. 이왕 가져온 거 내가 읽어주려고. 삼십 분쯤 지나니까 기다린 시간이 아까워서 더 기다렸어요. 근데 그러고 나니까 한 시간, 두 시간이 되어버려서요. 꼭 형을 보고 가야겠더라고요. …근데 그럴 필요가 없어 보이네요.”

이차혁의 시선이 하련솔의 두 눈에 닿았다. 그 바람에 하련솔은 괜히 마음이 뜨끔했다.

“저….”

무어라 대답할 새도 없이 이차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그 동작이 아주 느릿했다. 기둥에 어깨를 기댄 채 힘겹게 상체를 일으키는데, 그의 왼쪽 다리는 아예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이내 두툼한 원고 뭉치가 하련솔의 품에 안겨졌다.

“잘됐네요, 형…. 직접 읽으면 더 재밌을 거예요.”

이차혁이 말했다. 원망일랑 담겨있지 않은, 산뜻한 목소리였다. 그렇기에 도리어 하련솔의 가슴을 두드리는 데가 있었다. 하련솔은 자신이 착한 정실 몰래, 그의 님인 황제와 바람을 피운 못된 첩실이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할 말을 찾지 못하고 하련솔이 고개를 숙였다. 제 품에 들어온 원고 뭉치를 살펴보는데, 분홍, 노랑, 하늘색 포스트잇이 군데군데 붙어 있었다. 인물이 많고 복잡한 소설이라, 이해하기 편하게끔 주석을 써둔 것이었다. 굵은 네임펜으로 적어놓은 손글씨는 무척 반듯했다.

민망하다는 듯, 이차혁이 마른 웃음소리를 냈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요. 책은 재밌게 봐요. 가 볼게요.”

그러더니 한 발 움직이는데, 왼쪽 다리가 괴팍한 소리를 내며 덜컹 움직였다. 거친 흙바닥에 신발 밑창이 끌리는 소리에 하련솔은 깜짝 놀라 손을 뻗었다. 반사적으로 이차혁의 팔뚝을 덥석 붙잡자마자, 원고 뭉치 틈에 헐겁게 끼워져 있던 종이 낱장이 바닥에 떨어졌다.

“혁아. 아….”

졸린 탓에 더욱 허둥지둥하며 하련솔은 땅에 떨어진 종이를 주섬주섬 주웠다. 정신이 반쯤 빠진 그 앞에, 이차혁이 불편한 숨소리를 내며 함께 쪼그려 앉았다. 추락한 포스트잇으로 향하는 이차혁의 손을, 하련솔이 낚아채듯 부여잡았다.

똑바로 걷기조차 힘든, 아픈 동생을 냉대하며 쫓아낼 순 없었다. 오늘 그에게 필요했을 황제의 시간을 가져간 입장인지라 더욱 미안했고 마음이 복잡했다. 그래서 말했다.

“나, 그렇게까진 잘 안 보여서 그러는데…. 괜찮으면 네가 읽어줄래?”

그러자 이차혁이 방긋 웃는다. 굽혔던 무릎을 일으키려는 그를, 하련솔이 얼른 부축했다. 두 팔로 허리를 안아주자 이차혁의 상체가 하련솔에게 온전히 기대어 왔다. 천장이 무너진 듯 커다란 압박감이 대뜸 들어, 하련솔은 내심 놀랐다. 보들보들한 목소리며 착한 태도에 그를 순 동생으로만 생각했는데, 몸을 맞붙이고 보니 체격 차이가 새삼스럽게 와 닿았다.

다리를 절뚝이는 건 이차혁인데, 숨이 벅차 헉헉거리는 건 하련솔 몫이었다. 쪽마루로 옮겨가 나란히 신을 벗고, 문턱을 넘어 들어서기까지 이차혁이 어찌나 비틀거리는지, 하련솔이 낑낑거리며 껴안아야 했다.

마침내 도착한 침실의 훈기가 그나마 피로감을 달래주었다.

“휴….”

침상 자리로 가, 이차혁이 큰 몸을 풀썩 주저앉혔다. 하련솔은 다소 허둥지둥하며 그의 굽혀진 다리를 쭉 펴 주었다. 두툼한 이불이 그의 다리 밑에 쿠션처럼 깔렸다.

삽시간에 지쳐 버려, 하련솔은 그의 옆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취기와 함께 졸음이 쏟아져도 참아내야 했다. 이차혁이 구겨진 원고의 페이지를 정돈하는 소리가 바스락바스락 들렸다.

졸음과 사투를 벌이는 하련솔의 얼굴을 힐끔 내려다본 뒤, 이차혁은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제1장, 판도라의 황금 사과.”

사실 하련솔은 5권을 읽을 차례가 전혀 아니었다. 아직 3권의 절반도 채 못 읽은 상태였다. 책을 읽어 달라는 건 그저 변명에 불과했다. 손이 차갑게 식어버린, 아픈 동생을 그대로 돌려보낼 수 없었을 뿐이었다.

‘열심히 추리하면서 들으면 이해할 수 있겠지….’

그러나 베개에 머리를 대고 경청할 자세를 잡자마자, 하련솔은 잠들어 버렸다. 1초의 지체도 없이 곧바로 깊은 잠에 빠져들어 정신을 놔 버린 이의 호흡이, 식, 식…, 푸우… 요란하게 컸다. 그런 하련솔의 얼굴 위로 이차혁의 손이 내려앉았다.

휘, 휘… 잠든 이의 눈앞에 손바닥을 흔들며 이차혁이 웃었다.

“벌써 자요? 형.”

입술을 벌린 채 색색 잠든 얼굴을 바라보기도 잠시, 이차혁이 ‘흠’ 콧소리를 냈다. 그러곤 이불 위에 놓인 제 두 다리를 휙 옆으로 움직이더니, 구겨진 이불을 탈탈 펼쳐 하련솔의 목 위까지 덮어주었다. 제 다리도 같은 이불 속에 집어넣더니 오른 다리 위에 왼 다리를 편하게 꼬았다.

툭, 툭… 그는 종이철을 제 허벅지 위에 대고 털어 정리했다. 그러곤 방의 주인이 잠든 것을 못 알아챈 척, 뻔뻔하게 읽어내렸다.

“…테리는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으나, 오늘 그의 불신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사건이 벌어졌다. 귀신이 저질렀다고밖엔 생각할 수 없는 완벽한 밀실 살인이 일어난 것이다.”

그의 기다란 종아리 위에서 왼발 끝이 까딱까딱, 박자를 쪼개듯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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