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46화 (46/135)

46.

중년 여인이 오도카니 선, 창밖으로 봉숭아꽃이 내려다보였다. 몇몇 꽃송이는 벌써 꽃잎을 떨구고 씨앗 주머니를 매달고 있다. 여인이 팔을 뻗어 그 주머니를 뜯어내려 해도 손끝이 닿질 않았다. 몇 차례 헛손질을 한 끝에 그녀는 팔을 거두고 입을 다물었다. 눈동자만 굴려 힐긋 시선을 올리자 돌담 위에 놓인 석물, 해태와 눈이 마주친다. 돌담에 턱을 괴고 엎드린 자세의 해태는 어째선지 퉁명스러워 보인다. 여인은 몇 초간 그것과 눈싸움을 하다 홱 창문을 닫아버렸다.

이내 그녀는 응접실 내부를 휘 돌아보며 걸어 다녔다. 연두색 앞코를 가진 곱상한 단화, 운혜에서 또각또각 소리가 들렸다. 신발 바닥에 박힌 징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언제,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 있건 눈에 띄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제 주인의 성질을 닮은 신발이었다.

얼마의 나이를 먹건 그녀의 성질은 변하지 않았다. 군데군데 희어진 머리칼이며 웃는 얼굴의 모양대로 진 주름, 우아하게 가늘어진 목과 손가락은 도리어 그녀를 더욱 아름답고 자상해 보이게 했다. 한때 문정궁의 안주인 노릇 하던 그녀의 이름은 하늬안. 전대 무화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다.

나이 든 여인을 한참 기다리게 한 끝에 응접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모습을 드러낸 젊은 황제는 백색 폴라넥 니트 티셔츠에 감색 바지 차림으로, 조금도 중요한 손님을 보러 온 것 같지 않았다. 반면 하늬안은 소매가 풍성한 셔츠부터 정장 바지, 봉황 무늬 자수가 놓인 외투며 화려한 단화에 이르기까지 신경 써 차려입은 복장이었다. 그녀 곁에 한 아름 쌓인 선물이 그들 관계의 상하를 더욱 구분 지었다. 아래에 위치한 하늬안은 젊은 황제를 만나기 위해 두 발을 저울판 위에 올려놓았으나, 반대쪽에 자리한 이림범은 심드렁한 기색으로 한쪽 발끝을 툭 댈 뿐이었다.

“가배일이라 행사 준비로 바쁘실 텐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늬안이 말했다. 말만 그럴 뿐이지 음력 팔월 보름, 추석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일부러 방문한 참이었다. 상세한 관계며 사정이 어찌 되었건, 제아무리 황제라도 명절에 웃어른을 바람맞힐 순 없을 거란 계산에서였다. 상대가 사랑하던 황제를 잃어 개화병을 고칠 방도가 없는 전대 무화라면 더더욱 그랬다.

딱한 사정을 강조하기라도 하는 양 그녀는 제 자리에 놓인 휠체어에 몸을 앉혔다. 전에 비해 체중이 줄어들긴 하였으나 그뿐, 하늬안은 그다지 죽어가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도리어 지아비의 죽음 이후 더욱 안색이 고와지고 허리가 꼿꼿해진 듯했다.

바퀴 달린 의자가 필요한 다른 이를 알기에, 이림범은 곧바로 얼굴을 굳혔다. 하늬안의 맞은편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무뚝뚝한 목소리를 뱉었다.

“용건이나 빨리 말해.”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하늬안이 대답했다.

“‘은진전’을 돌려주시지요.”

그에 이림범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은진전恩眞殿은 문정궁 외곽에 별채로 놓인 전각으로, 전대 황제가 지어놓다 만 작은 절이었다. 새로운 선원전의 역할을 해낼 거란 명분에서였다.

본래 ‘선원전’이라 하면 선왕, 선후의 초상을 걸어두고 추모하는 공간이었는데, 전대 황제가 주장하던 ‘새로운 선원전’의 필요성은 사실 없다시피 했다. 지금도 창덕궁에 신선원전이 떡하니 자리해 있고, 그곳에 12대 임금의 초상, 어진이 멀쩡하게 봉안된 상태이기 때문이었다.

요즘 시대에 전대 황제를 그리자면 초상화가 딱히 필요치 않았다. 구태여 선원전의 다른 의의를 찾고자 하면 ‘정치 승계의 역할을 하던 장소’란 건데, 그 또한 불필요했다. 때문에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문정궁에 제 짐을 들이자마자 이림범은 은진전의 공사를 당장 중단시켰다. 그 장소가 지닌 진짜 의미를 알기 때문이었다.

세상에서 제일가는 로맨티시스트이던 전대 황제, 이림범의 아버지는 은진전에 제 어진을 따로 봉안하길 바랐다. 황후의 초상은 쏙 빼놓고 오직 그의 어진만을 말이었다. 그리고 그곳의 관리 전반을 가피 스님에게 맡기고, 소유자를 제가 총애하던 무화, 하늬안으로 만들고자 했다. 자신이 먼저 세상을 떠나고 나면 하늬안이 기댈 곳이 없을 테니, 저를 대신할 버팀목을 마련해주고자 벌인 세금 낭비였다.

‘꼴값 떨고 자빠졌네.’

이림범은 곧 죽어도 제 아버지에게 로맨틱하단 표현을 써주고 싶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하늬안에겐 별다른 버팀목이 필요치 않았다. 도리어 마른 몸에 순한 얼굴을 가진 그녀야말로 생전 황제의 버팀목이고 뿌리였다.

평생 이림범은 그녀만큼 강하고 지독한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오죽하면, 슬픈 황후였던 제 어머니가 그녀의 반이라도 닮아 이기적으로 변했으면 바랐을 정도였다.

당장 지금만 해도 그랬다. 더운 여름날에 몇 번이고 늙어빠진 노승을 집무실로 보내며 은근한 눈치를 주더니, 황제가 스님 보길 돌같이 하니 제 발로 쫓아 나온 것이다. 그 집요함에 끔찍하게 질려버려, 이림범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런 그를 향해 하늬안은 은근히 제 요청을 이어나갔다.

“가피 스님께서는 은진전을 돌보기 위해 절간도 물려주고 떠나오셨습니다. 그분께 응당 하실 일을 돌려주세요. 노승에게서 소일거리를 앗아가시는 건 도리가 아닙니다. 스님께서 마음으로 빌어주셔야 우리 폐하께서도 편안히 쉬지 않으시겠어요?”

“‘우리 폐하’?”

이림범이 큰소리로 코웃음을 쳤다. 그것만으로 모자라 호탕한 웃음마저 하하 터뜨렸다. 오늘날 이 나라의 황제는 그 자신이건만, 여전히 과거에 머무르며 저를 외면하는 하늬안의 모습이 참 우습고 씁쓸했다.

“무화가 모두 당신 같으면 얼마나 편할까.”

입가에 쓴웃음의 여운을 걸고서 그가 말했다.

“황제 없이, 누구는 일주일이면 다리를 절고, 다른 누구는 나흘이면 손가락이 굽고, 또 누구는 사계절 내내 혀가 굳어 말을 더듬어. 그런데 당신은 한 달 만에 황제를 보는데도 사지가 참 멀쩡해?”

하늬안의 얼굴이 웃는 표정 그대로 굳었다. 여전히 미소 짓긴 하였으나 그녀는 더 이상 편안해 보이지 않았다. 얼핏 가냘프고 연약해 보여도 그뿐, 입술 안에 칼을 문 여자라는 걸 누구보다 이림범이 잘 알았다.

그는 모든 것을 알았고 또 기억했다. 문정궁에서 생활하던 시절 하늬안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개화병 환자를 연기했다. 곧 죽겠답시고 야단법석을 떤 밤이 많았다. 오죽하면 그녀를 가엾게 여긴 황제가 외부에서 주치의를 불러다 그녀의 처소에 따로 붙여놓고, 결국에는 그녀만을 쏙 빼다가 제가 머무르는 경복궁에 데려갔을 정도였다.

기실 그녀는 가장 운 좋은 무화였다. 개화병 증세가 있기는 하나 아주 미미한 수준에 그친 것이었다. 제 세대의 무화들은 모두 병을 앓느라 중년이 되지 못하고 사망했는데, 하늬안은 황제 없이도 어느 정도 건강을 유지하는 꼴을 보니 더욱 그랬다.

이림범의 어머니, 황후마저 일찍 시든 무화 중 하나였다. 황제가 하늬안을 경복궁에 데려간 뒤 문정궁엔 발길을 뚝 끊는 바람에, 그녀는 교태전의 뜰 앞에서 남편을 기다리다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더는 이렇게 살지 못하겠다고, 어차피 곧 죽을 목숨 차라리 당신 곁을 떠나 세상 밖에서 죽고 싶다고, 간결한 내용의 편지 한 장과 기껏 구해둔 비행기 티켓을 손에 꼭 쥔 채였다. 그때 그녀가 구해다 둔 티켓이 두 장이었다. 한 장에는 ‘장혜경’, 무화가 되기 전 제 이름이 쓰였고, 다른 한 장에는 이림범의 이름이 쓰였다.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이림범은 그날을 잊을 수 없었다. 꼬깃꼬깃하게 구겨진 티켓 두 장을 미처 소화해내질 못했다.

입을 다물고 침묵하는 그 앞에서, 하늬안은 거침없이 말을 쏟아냈다.

“내 아들은 죽은 사람이 됐는데, 이 정도 배려도 못 해주세요?”

시대를 조금만 더 늦게 타고났더라면 그녀는 무화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딱 한 세대를 건너 요즘 같았더라면, 경미한 증세를 남몰래 숨기고 자유로운 삶을 살겠다는 선택지를 떠올렸으리라. 그랬더라면 그녀는 세상을 누비는 배우, 혹은 감독이 됐을지도 모른다. 하늬안에겐 그런 일이 어울린다. 어느 곳에서건 주인이 되고 장군이 되어, 확성기를 들고 남들 머리 위를 걷는 일에 걸맞은 사람이다.

그러나 지금, 배우자를 잃은 무화가 된 하늬안에게 남은 일은 혀 대신 칼을 물고 말로써 남의 마음을 후벼 파는 게 전부였다.

“내 아이가 살아있었더라면, 지금 황제의 자리에 앉았을 겁니다. 우리 폐하께서 그렇게 약속했었다고요. 당연히 우리 아들을 그 자리에 앉힐 거라고…. 그런데 갑자기 당신이, 당신이 전부…. 다 당신이 뺏어간 거야. 나와 내 아들, 우리 모자가 누려야 할 것들을 다 당신이 가져갔어.”

분을 못 삭여 씨근덕거리며 말을 쏟아내다가도, 하늬안은 정신을 차린 듯 두 눈을 밝게 빛냈다. 선물 가방이 쌓인 테이블 너머로 팔을 뻗어 그녀는 이림범의 손등에 제 손을 겹쳤다.

“범아.”

그리고 다정하게 말했다.

“그러다가 너, 체한다? 이렇게 다 독식했으면, 이제 욕심은 적당히 부려야지….”

어린 날의 저를 달래는 듯한 말에 이림범은 약한 체기를 느꼈다. 그녀의 가벼운 손, 아무렇잖게 뱉은 채근, 응접실에 감도는 어색한 공기, 모든 것이 그에겐 무거웠다. 그리고 억울했다.

‘욕심?’

제 욕심대로, 마음대로, 속이 편안했던 날이 있기는 했나…. 지난날을 반추하자면 그저 까마득했다. 이곳 문정궁에 처박혀 어머니의 눈치를 살피며 지낼 적에 그는 단 하루도, 스쳐 지나는 한순간조차 행복하다고 느낀 적 없었다.

하늬안은 갖은 기억에 어깨가 무거워진 황제를 어르고, 또 달랬다.

“죽을 날만 기다리는 내 부탁 하나야, 못 들어줄 게 있어요? 은진전을 쓰게 해 줘. 어차피 공사도 마무리만 남은 거, 내가 잘 알잖아. 거기에 우리 폐하 초상화를 모시게 하고, 스님께서 직접 제사를 올리시게 해 줘요.”

물끄러미 테이블 위를 노려보던 이림범이 홱 손을 뒤집었다. 반사적으로 뒤로 내빼려는 하늬안의 조그마한 손목을 부드럽게 움켜쥐고, 이림범이 웃었다.

“땡중이 거기에서 무슨 짓을 하건, 그게 당신 소원을 이뤄줄 거라 생각해?”

기뻐서 짓는 웃음이 아니었다. 그저 웃는 것밖에 어떤 감정도 드러낼 수 없어 지어 보인, 겉보기에 썩 훌륭하고 아름다운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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