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47화 (47/135)

47.

하늬안이 왜 은진전에 집착하는지, 이림범은 진작 알았다. 무화가 되기 전에 그녀는 명문대 진학을 앞둔 20살 청년이었고, 큼직한 건설업체 집안의 장녀였다. 가피 스님은 집안 어른들이 진작에 우러러보며 모셔온 사람이었다. 무화가 된 뒤에는 그녀 또한 그의 말을 맹신하게 됐다. 재난처럼 덜컥 들이닥친 변화를 감내하기에, ‘모두 뜻이 있어 그리된 것’이라는 말만큼 달콤한 게 없었다. 종국에는 그의 영향력이 황제에게까지 미치게 되었더랬다.

문제는 가피 스님이 제대로 된 불자는커녕 멀쩡한 어른조차 아니란 데에 있었다. 크고 작은 행사를 오가며 이림범은 수십 명의 스님과 비구니를 만났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가피 스님처럼 수상쩍은 제사를 지내진 않았다.

“당신이 만 번 절을 올려봐야 내 아버지는 지병으로, 순리대로 죽었어. 가여운 짐승 가죽을 백 장 벗겨내도 내 동생은 황제가 되지 못하고 당신 가슴에 묻혀야 했지. 그럼, 나는?”

하늬안의 손목을 어루만지는 이림범의 손길은 무척 다정했다. 낮고 조곤조곤한 목소리 역시 비밀을 속삭이는 듯 듣는 이의 귀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내뱉는 말 안에는 오래된 원망의 뼈가 박혀 있었다.

“누군가 나를 위해 축복 한 번, 기도 한 번, 절 한 번 올린 적이 있나? 나를 그리워하고, 나를 위하고, 나를 생각하며 하늘에 바란 사람이 있기나 한가? 그런데, 봐…. 지금 황제가 된 사람이 누구야?”

이림범의 새카만 눈동자에 담긴 하늬안은 더는 강하지 못했다. 속내를 모두 들킨 양 낯빛이 창백해진 그녀는 미신을 쫓는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다. 그녀에게 일시적인 기쁨을 선사하고자 전대 황제는 헛된 기대감을 많이도 안겼다. 속 빈 강정 같은 호언장담을 좇느라 그녀는 저를 동생처럼 여기던 황후와 척을 졌다. 지나간 일들은 기어이 큰 실망으로 돌아와 하늬안을 주저앉혔다.

그런 여인을 상대하며 진지하게 화를 내기에는, 이림범이 너무나 건강한 인간이었다. 도리어 그는 하늬안을 측은하게 여겼다.

“그래, 부탁은 들어줄게.”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이림범은 제 손을 손수건에 문질러 닦아냈다. 타인의 손금이 묻은 손수건은 곧바로 휴지통에 던져 넣어졌다.

그대로 응접실을 떠나려다, 그는 우뚝 멈추어 섰다. 그러곤 테이블 가득 쌓인 종이 가방을 들여다보며 일일이 확인했다. 모두 이림범, 저를 위한 선물임을 알고는 어째선지 시들해졌다. 기쁘게 선물을 챙기는 대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마지막 인사를 뱉었다.

“난 당신이 죽고 나면 장례식장에도 가지 않을 거야…. 황제 폐하께서 오셨다고, 관을 열고 벌떡 일어날까 봐 무섭거든.”

그리고 복도로 나섰다. 문밖을 지키던 박 비서와 웅 실장이 곧바로 황제의 뒤로 따라붙었다. 반짝이는 햇빛 조각이 군데군데 떨어진 통로는 겉보기에 아름다웠다. 빛 천국을 가로지르는 이림범의 발걸음이 느릿했다.

비서를 향해 가볍게 턱짓하며, 그가 말했다.

“은진전 공사를 마무리 짓고, 내달 내로 열도록 해. 그리고 초상화를 잘 그리는 화가를 구해 와. 어진을 맡겨도 될 만큼 솜씨 좋은 화가여야 해.”

“네, 알겠습니다. 언제쯤 입궁시키면 되겠습니까?”

“그럴 필요 없어. 사진만 전달해.”

이림범의 두 다리가 점차 빨라졌다. 터벅터벅 빠른 걸음으로 걸으며 그는 복도 한편에 던져놓듯 말을 뱉었다.

“전대 황후의 초상을 맡기겠다고 해.”

큰 키와 긴 다리로 날쌔게 움직이는 그를 따라잡느라, 박 비서는 허둥지둥했다. 웅 실장의 발걸음도 덩달아 빨라졌다. 당황한 두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붙었다. 약한 불안감을 담은 눈짓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최고 상사, 이림범의 뒷모습으로 옮겨갔다. 그와 동시에 황제가 뛰기 시작했다.

보기 좋게 어여쁜 전각 밖으로 뛰쳐나가자 밝은 햇볕이 쏟아져 내렸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단청과 정갈한 기와, 색색의 꽃과 화사한 나무, 보드라운 석물이 줄지어 선 돌길을 젊은 황제는 돌파하듯 내달렸다. 당황한 웅 실장이 ‘폐하’ 하며 뒤를 쫓고, 황제를 놓친 비서와 시종이 갈팡질팡해도 이림범은 돌아보지 않았다. 속이 터질 것 같이 답답했다. 그래서 달리기라도 해야만 했다.

문정궁 밖으로 도주하고픈 절실한 마음과는 반대로, 그는 제가 있어야 할 자리를 향해 달렸다. 싫은 마음을 태우기 위해 오히려 열심히 뛰었다. 넓디넓은 문정궁조차 그의 심장이 멎도록 내달리기엔 모자랐다. 흉곽이 찢어지고 숨통이 막히기도 전에, 그는 청기와가 달린 거대한 전각 앞에 도착했다.

그러자 대문 밖으로 쏟아지듯 쫓아 나온 시종들이 그를 반겼다. 맑은 옥색 삼회장저고리에 남색 바지를 유니폼으로 걸친 이들은 성실하게 움직였다. 그들 손길에 이끌려 이림범은 흙먼지와 땀으로 옷을 더럽힌 채 전각 안으로 들어섰다. 시종들은 익숙하다는 듯 손수건을 꺼내어 황제의 목덜미와 얼굴에 흐른 땀을 닦아주었다. 감각이 마비된 사람처럼 멍하니 선 채 이림범은 숨을 헐떡일 따름이었다. 커다란 가슴을 위아래로 들썩이고, 두 눈을 내리감는 것밖에 그가 할 일은 없었다. 그의 피부를 닦아내는 것도 더러워진 옷을 벗기는 것도 모두 시종의 몫이었다.

너른 창을 통해 스민 바람이 이림범의 뺨을 훑었다. 옅은 솜털이 쭈뼛 서는 감각에 그는 입매를 굳혔다. 서늘한 감각이 좋으니 오히려 우울해졌다.

황제의 몸 위에 다닥다닥 달라붙는 손길이 많았다. 한 겹 두 겹 곱디고운 옷을 입혀 황제를 꾸미느라 모두 분주했다. 감았던 눈을 뜨자 땀 범벅이 된 채 뒷짐 지고 선 웅 실장이 보였다. 달리기가 느린 박 비서가 도착하기도 전에, 이림범은 다시금 이동해 곧바로 행차에 올라야 했다.

하늬안의 말마따나 오늘은 중요한 행사가 있는 날이었다. 팔월대보름, 추석은 새 황제의 즉위식 이후 처음 맞이한 명절이었다. 본래 이러한 날은 기념일로 구분하여 어가행렬을 나서곤 했다. 때문에 수레나 어차 가운데 황제께서 무얼 타고 행차하실지 회의가 두 차례 열렸다. 그러나 당사자인 이림범은 오늘 행사를 축소하길 원했다. 즉위식 이후 시간이 오래 지나지 않았으니 구태여 교통 체증을 감내해가며 새로 인사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대신에 문정궁 내부에서 가마를 탈 테니, 그 행사를 생중계하는 쪽으로 취지를 지키기로 의견을 굳혔다.

검푸른 윤이 흐르는 곤의를 차려입고 나선 이림범의 양어깨엔 용이, 등허리에는 산이, 소매에는 불꽃이 자수로 놓였다. 금선이 굵은 옥대 한편으로 패옥이 길게 늘어졌는데, 걸음걸음마다 옥구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화려한 모습으로 도착한 행차의 시작 지점은 커다란 종이 위치한 계단 위였다. 높은 자리에 놓인 가마에 이림범이 몸을 앉혔다. 이미 충분히 아름다운 그에게 화룡점정을 해내고자, 시종 둘이 다가와 그의 머리에 면류관을 얹었다.

길게 늘어진 줄 사이로 이림범은 화려한 행사장을 내려다보았다. 황제의 가시는 길 양측으로 황철릭을 두른 행악이 줄지어 섰다. 태블릿 PC를 쥔 양 상궁은 이리저리 무전을 쳐 가며 계획을 정리하기 바빴다. 돌계단 아래에는 곱게 차려입고 줄지어 선 무화들이 있었다.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이림범은 우울했다.

‘숨 막혀.’

그는 문정궁의 주인이고 황제였다. 면류관을 처음 머리에 얹은 날 이후로 친절한 세상은 그에게 거듭 그 사실을 일러주었다. 그런데 조금도 기쁘지가 않았다. 하늬안의 말마따나 남들 모두가 선망하는 자리에 앉아 세간의 관심을 끌어안고, 좋은 시대를 타고나 유복한 삶을 살건만, 오랜 시간에 걸쳐 가슴 안에 켜켜이 쌓인 감정은 그의 숨통을 옥죄이며 어떠한 기쁨도 느끼지 못하게 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툭 던진 시선이 행렬의 맨 끝에 닿았다. 저 멀리, 하련솔이 있었다. 줄지어 선 사내 무화의 어깨너머로 빼꼼 고개를 내미는데, 너무 멀어 손 끝마디보다 작아 보이는 그 얼굴을 이림범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일순 숨통이 뻥 트였다. 그리고 어째선지 울고 싶어졌다.

“형.”

제자리에 앉아, 이림범은 저도 모르게 그를 불렀다. 멀찍이 선 하련솔에겐 닿지 않는 부름이었다.

문득 어깨너머로 통신상의 문제 운운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생중계 준비 중이니, 잠시만 대기해 달라는 지시도 이어졌다. 들려오는 목소리와 반대로 이림범은 가마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층층이 놓인 계단을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폐하…!”

당황한 상궁의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단숨에 행렬의 끝을 쫓아갔다. 놀란 무화들의 시선이 닿는, 화려한 옷단 위에 태양 빛이 황금색으로 번졌다.

한 발 두 발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 하련솔의 표정이 초를 다투며 변했다. 처음에는 황제가 저를 보러 오는 줄도 모르고서 멍하니 서 있기만 하다가, 거리가 확 좁혀지자 뒤늦게 발을 주춤 움직였다. 목소리가 들리도록 가까워지자 그제야 몇 발짝 뒷걸음질하는가 싶더니,

“형!”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대뜸 몸을 돌렸다. 그러더니 도망치기 시작했다.

마른 몸이 날쌔게 달아나는 모습에 이림범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엉성한 자세로 무턱대고 달리는 하련솔을 쫓아 성큼성큼 다리를 움직이며, 그는 큰소리로 ‘형’을 부르다가, 그래도 하련솔이 멈추지 않기에 이름을 불렀다.

“…솔아. 솔아! 어디 가느냐! 이리 오련.”

저도 제가 미친놈처럼, 미친개처럼 굴고 있단 걸 알았다. 알기에 더욱 웃음이 났다. 황철릭을 두른 행렬은 보이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행사장에서 벗어나 말도 안 되는 추격전을 시작하는데, 이 상황이 미치게 웃기고 환장하게 좋았다.

하하… 큰소리로 터뜨린 웃음소리에, 하련솔이 허둥지둥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벌써 지쳐버렸는지 비틀비틀 달리는 속도를 늦추면서 그가 소리쳤다.

“뛰, 뛰지 마…! 뛰지 마세요, 폐하!”

듣는 귀가 있을까 싶어, ‘폐하’ 하고 공손히 청해오는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황제 놀이에 기꺼이 동참하며 이림범이 뻔뻔하게 대답했다.

“그럼 네가 걸음을 멈추거라!”

“그럴 순 없습니다…! 폐하께서 먼저 멈추세요!”

“왜!”

“그, 그렇게 뛰어오면….”

완전히 힘이 풀려버린 듯, 하련솔의 다리가 제자리에서 기우뚱거렸다. 발에 걸린 것도 없이 돌길 위로 나자빠지려는 그의 허리에 이림범의 손이 마침내 닿았다. 곱상하게 차려입은 옷이 죄 구겨지도록, 이림범은 하련솔을 와락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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