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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48화 (48/135)

48.

균형감각을 잃어버린 하련솔의 몸은 황제의 너른 품 안으로 밀물처럼 들어갔다. 이림범은 기꺼이 두 팔 벌려 그를 끌어안았다. 두툼한 옷을 입었음에도 하련솔의 늘씬한 몸은 모자라게만 느껴지는데, 존재감만큼은 무척이나 크고 뚜렷했다.

돌바닥에 주저앉고픈 사람처럼 맥없는 하련솔의 등허리에 이림범의 손바닥이 단단히 달라붙었다. 도톰한 옷깃 위에 손을 대고 어루만지자니 부드러운 피부에 직접 손을 댄 듯 심장이 홧홧해졌다.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서, 하련솔이 헐떡거렸다.

“…그렇게, 헉…, 뛰어오면, 헉…, 무섭다고….”

원망 섞인 목소리가 이림범의 귀에는 애교심에서 나온 투정처럼 들렸다. 제대로 자립조차 하지 못해 온전히 기대오는 게, 하련솔의 의지가 아님을 알면서도 기분 좋았다. 이가 보이도록 환히 웃으며 이림범이 속삭였다.

“뭐가 그리 무서워, 응?”

“넌, 너는… 왜 이렇게 화가 났어?”

한데 돌아온 질문은 뜻밖이었다.

“…화가 나? 내가?”

두 눈을 느리게 끔벅이며 이림범은 제 뺨에 도는 감각을 확인했다. 크게 웃어댄 탓에 볼이 당기고 어금니가 뻐근할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왜 화를 내느냐고 묻는 하련솔이 이상했다. 내심 화가 나 어쩔 줄 모르던 제 감정을 읽어내린 그가 이상했다.

허리에 두른 팔에 힘을 주자, 하련솔의 어깨가 하릴없이 황제의 가슴팍에 맞붙었다. 이림범은 남는 손을 뻗어 가쁜 숨을 정돈하기 바쁜 무화의 앞머리를 휙 넘겨주었다. 입궁한 뒤 제대로 미용한 적이 없어, 보들보들한 갈색 머리칼이 답답해 보일 정도로 긴 상태였다.

두 눈은 물론이며 눈썹과 이마까지 환히 드러나게 해도, 하련솔에게서 맴도는 답답한 기운은 사라지지 않았다. 문제는 앞머리 따위가 아니었다. 탁한 백색이 감도는 멍한 두 눈동자였다.

땀방울이 맺힌 창백한 뺨에 손바닥을 가져다 붙이며, 이림범이 물었다.

“어떻게 알아? 잘 보이지도 않으면서…. 남들 다 모르는데, 형이 그걸 어떻게 알아?”

순전한 호기심으로 꺼낸 말에 그는 스스로 당했다. 두 눈 성한 이들도 알아보지 못하는 제 민낯을 고스란히 들킨 것 같아, 하련솔만큼은 저를 있는 그대로 알아봐 주었다는 깨달음에 그는 취했다. 심장이 빠르게 내달리고 마음이 급히 동했다. 무엇이건 해야 한다는 충동이 더럭 일었다.

급히 고개를 숙이려다, 이림범은 제 머리에 쓴 면류관의 구슬에 코를 맞았다. 피식 웃으며 그는 면류관의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재차 고개 숙였다. 이번에야말로 하련솔의 입술에 그의 입술이 맞붙었다.

앞니가 아프도록 가져다 박아댔던 멍청한 첫 키스와는 사뭇 달랐다. 조심스럽게 입술 살을 맞붙이고, 떨리는 턱을 살살 틀며 입술을 빠끔 움직였다. 그러자 제 더운 입술 사이로 빨려 들어오는 하련솔의 아랫입술을 맛볼 수 있었다.

“아….”

놀란 듯 하련솔이 작게 소리 냈다. 이림범은 힘이 들어간 그의 허리가 움찔움찔 수축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두 눈을 질끈 감고서 그는 재차 상대의 입술을 제 입술로 깨물고, 솜사탕 핥듯이 혀끝을 내밀었다. 하련솔의 입은 여전히 닫혀 있었으나 힘 풀린 두 다리를 비틀비틀 움직이는 기척이며 새어 나가는 옅은 콧소리까진 감추지 못했다. 그것만으로도 이림범에겐 충분한 자극이었다. 입 안 가득 달큼한 침이 고이고 아랫배가 묵직해졌다.

쪽.

벌겋고 보드라운 살이 맞붙었다 떨어지는 소리에 점성이 실렸다. 그와 동시에 하련솔이 이림범의 어깨를 잡고, 뒤로 밀어내려 꾹 눌렀다. 이림범은 순순히 입술을 떼어내며 아주 조금, 자진하여 물러났다.

감았던 눈을 뜨고 살핀 얼굴은 짧은 입맞춤 한 번에 홍조를 띤 채였다.

“왜…, 너, 왜 이래?”

쪽쪽 빨린 입술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하련솔은 머뭇머뭇 입을 달싹이는가 싶더니 이내 꾹 다물어버렸다. 아쉽게도 이림범은 그 귀여운 반응을 지적하거나 놀릴 수 없었다. 하련솔의 태도가 저에 비하면 훨씬 양반이기 때문이었다. 호기롭게 입술을 맞붙인 당사자, 젊은 황제는 얼굴은 물론이며 귀와 목덜미까지 벌겋게 익어버렸다. 제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조차 감당하기 벅찼다.

이내 하련솔도 저를 껴안은 사내의 목마른 떨림을 느꼈다. 눈앞이 빨개지는 느낌이 더럭 들어, 당혹감에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곤 다시금 달아나려, 이림범을 뒤로 밀쳤다. 그러나 이림범의 커다란 어깨는 꿈쩍조차 하질 않았다. 도리어 그는 다시금 하련솔 가까이 고개를 기대어 왔다.

하련솔의 부드러운 미간에 제 코끝을 미끄러뜨리듯 살짝 붙이며, 이림범이 속삭였다.

“잠깐이면 돼. 형, 잠깐만… 나, 숨이 막혀서 그래.”

예상치 못한 말에 하련솔이 두 손을 굳혔다. 금방이라도 이림범을 때리고, 밀칠 것 같던 그의 두 손은 황제의 어깨 자수 위에 머뭇거리며 머물렀다.

“숨만 쉴게….”

반쯤은 지친 듯하고 반쯤은 벅차오르는 듯한, 기묘한 음성이 하련솔에게 내려앉았다. 낮고 무거운 목소리에 묶인 듯 제자리에 서, 하련솔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서로 간에 거리가 없다시피 한 이림범의 두 눈을 번갈아 살피다가, 이내 눈길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갈색 눈동자가 이림범의 눈동자에서 시작해 콧잔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의 멍한 시선은 머지않아 상대의 입술에 가 닿았다. 젊은 황제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재차 더운 입술이 소리 없이 맞붙었다.

이번에 하련솔은 거절도 거부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선 채 입술을 내어주는 태도가 저를 위로하는 것처럼 느껴지기에, 이림범은 그의 허리를 더욱 단단히 끌어안았다. 보드라운 뺨과 말랑한 귀, 흐트러진 뒷머리를 움켜쥐다시피 하며 쓰다듬고, 또 어루만졌다.

먼저 고개를 떼어낸 이는 숨이 벅찬 하련솔이었다. 그와 동시에 이림범은 그의 얼굴을 제 가슴팍에 완전히 파묻히게끔, 덥석 껴안았다.

커다란 덩치로 하련솔을 가려놓은 채 힐긋 뒤를 돌아보자, 황제를 쫓아 달려오던 자세 그대로 얼어붙은 웅 실장이 보였다. 그 뒤로 양 상궁이 팔을 휘저으며 길목을 가로막고 있었다. 뒤로 물러서라, 제자리로 돌아가라며 몰아내는 인파 가운데엔 카메라를 든 남자도 섞여 있었다. 야단법석이 난 현장을 대충 살피고서 이림범은 제 품 안을 내려다보았다.

“범아.”

어느 때보다 사랑스러운 얼굴로 황제의 품에 폭 안겨, 하련솔이 은밀하게 속삭였다.

“…너 미쳤냐?”

언짢은 듯 내뱉은 핀잔에 이림범은 웃었다. 천진난만한 소년처럼 활짝 웃으며 그가 말했다.

“내가 증명한다고 그랬잖아. 아무리 눈에 띄어도 형은 안전할 거라고.”

이제 하련솔은 두말할 여지 없이 가장 눈에 띄는 무화가 됐다. 문정궁을 오가는 이들 모두가 그의 이름을 알고 존재감을 크게 느낄 게 분명했다. 특히나 무화라면 누구나가,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마흔한 번째 무화를 기억할 것이었다.

장난꾸러기처럼 시시덕거리기도 잠시, 이림범은 천천히 표정을 고쳤다. 저를 기다리는 대열의 끝, 맨 윗자리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작은 손짓으로 그는 웅 실장을 불렀다. 그에게 하련솔을 넘기고 물러서기 무섭게, 저 멀리서 초롱이 쪼르르 뛰어나왔다. 호위 실장과 시종에게 하련솔의 귀가를 맡기며 이림범은 잠시간 뒤로 걸었다.

지나온 방향을 향해 몸을 돌릴 무렵 그는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구겨진 옷깃을 정돈하며, 한결 소란스러워진 행차 자리에 다시금 오르는 태도는 뻔뻔해 보일 정도로 당당했다. 대뜸 사고를 친 황제를 대신하여 상기된 얼굴의 직원들이 이리저리 바삐 오갔다. 발 빠른 시종들이 그의 흐트러진 면류관을 똑바로 고쳐주었다.

줄을 지어 늘어지는 옥구슬 사이로 이림범은 무화들을 살폈다. 정확히는 황제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선 이차혁을 살폈다. 그러나 이림범의 예상과 달리, 그는 황제를 바라보고 있질 않았다. 사고를 친 저를 타박하느라 원망 담긴 눈짓을 보내고 한숨 한 번 쉬어줄 타이밍이건만, 이차혁의 고개는 반대 방향을 향해 있었다. 그 모습이 꼭 사라진 하련솔의 자리를 살피는 듯했다.

황제가 고개를 고쳐 들자 옥구슬이 잘랑거리며 서로 부딪쳤다. 행차가 시작됐다.

***

황제의 돌발 행동은 작은 해프닝으로 언급되곤 말았다. 어차피 신호 문제로 행사가 지연되던 차, 황제가 잠시 자리를 비웠대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 모습을 카메라가 한 대가 담기는 하였으나, 황제의 움직임이 워낙에 갑작스럽고 빨랐던지라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힘겹게 따라가 담은 모습이라곤 그의 너른 등짝뿐이었다.

잠깐의 틈을 타 무화 하나와 시간을 보내는 듯한데, 그의 품에 안긴 무화의 모습일랑 어깨와 손, 발이 조금 찍힌 게 전부였다. 짧게 편집되어 유출된 동영상을 두고 세간에서는 그 무화가 사내인지 여인인지 논쟁이 오갔다. 황제의 풍채가 워낙 좋은 탓에 작아 보일 뿐, 손 모양이며 어깨의 높이가 여자 같진 않다며 말이 많았다. 즉위식을 기점으로 황실을 향한 관심이 빠르게 불어난 탓에 모든 것이 뉴스거리였다.

그러나 호기심은 그리 길지 않았다. 추석 연휴가 끝나도록 황실 밖으로 유출되는 정보가 일절 없으니, 구설수가 이어질 길을 찾지 못해 뚝 끊긴 것이었다. 거기까지가 문정궁 바깥의 사정이었다.

달력의 빨간 날을 바삐 지내고서 맞이한 평일의 이른 아침, 이림범은 정해진 것보다 30분 일찍 회의실 앞에 도착했다. 덤덤한 얼굴로 그는 들숨을 크게 들이쉬고 문을 열었다. 곧바로, 전원 출석 도장을 찍어 꽉 찬 테이블이 그를 반겼다. 붉고 푸른 단령 유니폼들을 아주 오래간만에 차려입은 팀장이며 대리, 실장들이 빽빽하게 자리를 채웠다. 옛날 같았더라면 궁에서 일하시는 몸이라며 벼슬 한자리씩 차지했겠지만, 오늘날 그들은 퉁퉁 튀는 황제를 어찌 감당해야 좋을지 몰라 눈이 빨개진 공무원에 불과했다.

원망 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이림범은 두 눈을 둥그렇게 떠 보였다.

“좋은 아침.”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순진한 표정을 뻔뻔하게 지어 보이며 그는 테이블의 중앙 상석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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