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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49화 (49/135)

49.

“천천히 하나씩 살펴보자고, 하련솔이 얼마나 앙큼하고 파렴치한 무화가 됐는지.”

황제가 나서서 뱉은 말에 직원들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몇몇은 대놓고 헛기침이며 마른세수를 하며 표정을 고치기도 했다.

황제의 말마따나 오늘 회의장을 가득 채운 서류들은 온통 그의 총애를 받는, 새로운 무화를 찍어누르려는 모함으로 가득했다. 한 달에 한 건 접수될까 말까 하던 범죄 신고가 이미 여러 차례에, 익명으로 들어온 건의는 수십이었다. 신문고를 설치해 두드리게 했더라면 벌써 로큰롤 두세 곡쯤 뚝딱 연주했겠다 싶을 정도였다. 민원이 들어오면 확인하는 것이 일인지라, 양 상궁이 말끔하게 정리하여 가져온 서류가 산더미였다.

한 아름 낭비된 종이를 흘겨보며 이림범이 입을 열었다.

“아무 증거 없는 허위 신고는 양 실장이 일괄 처리해 주시고, 증인만 있는 건 왼쪽으로 모아 주시고. 물증도 피해자도 확실한 것만 이쪽으로 넘겨.”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회의장이 고요해졌다. 하나같이 탐탁잖은 얼굴로 서류를 뒤적이는 시늉할 뿐, ‘이거다’ 하며 내놓는 안건이 없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의금부 팀장은 달랐다. 그는 제 앞에 놓인 태블릿PC 화면을 검지로 쓱 밀었다. 그러자 황제를 비롯한 모든 이들의 자리에 놓인 기기 액정에 불이 들어오고, 전달되어 온 파일이 열렸다.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이림범은 사건 경위서를 들여다보았다. 가해자의 이름에 쓰인 ‘하련솔’ 세 글자는 예상한 바 그대로였으나, 피해자의 이름에 놓인 ‘이차혁’은 회의실에 감도는 분위기를 단숨에 서먹하게 만들었다.

“…….”

여유만만하던 그의 얼굴에 균열이 생겼다. 보기 좋던 미소가 자취를 감추고 미간에 세로줄이 그였다. 한 자 한 자 기재된 글을 읽어내리는 속도가 무척 느리고 차분했다. 황제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직원들은 숨이 막혔다. 의금부 팀장의 양 팔뚝에 다른 치들이 팔꿈치로 퍽퍽 찍은 자국이 빨갛게 남았다.

하련솔에게 씌워진 혐의는 ‘절도’였다. 훔친 물품은 ‘보록 및 보록에 보관 중이던 장신구 일괄’. 이차혁이 지닌 장신구라 하면 대다수 이림범이 선물한 것들로 금전 이외의 가치를 지닌 보물들이었다. 경위서에 기록된 장신구의 값어치가 6천만 원인데, 그마저도 값이 매겨지지 않은 물건에 임의로 붙인 가격에 불과했다.

사건의 경위는 이러했다. 무화 이차혁을 모시는 시종 중 하나가 이른 아침 보록이 사라진 것을 알아챘고, 의금부에 신고했다. 의금부 팀장이 나서서 살펴보니 마침 하련솔을 주어로 한 신고가 잦은 데다, 그가 야밤에 이차혁의 처소 주변을 기웃거리더라는 민원도 들어온 참이었다. 단순 절도에 비해 야간주거침입절도는 죄질이 더욱 나쁘고 무겁기에, 팀장은 혐의를 빨리 벗겨내고자 하련솔의 처소를 찾아갔다. 집주인이 선뜻 수색을 허락하기에 뒤져보았더니 부뚜막 아래, 불 꺼진 아궁이 속에 보록이 숨겨져 있었다. 보록은 의금부에서 수거했고, 하련솔은 무죄를 주장했다. 임시방편으로 그의 처소 앞에는 의금부 직원 둘을 세워 둔 상태였다.

이제 황제께서 길길이 날뛰시겠거니, 의금부 팀장은 생각했다. 혹여 저를 비롯한 의금부 직원들에게 애먼 불똥이 튈까 봐, 하련솔의 처소를 수색하면서도 침실에는 발도 들이지 않은 그였다. 보여주기식으로 수색하는 시늉만 하려 불 꺼진 아궁이나 뒤적거렸더랬다. 한데 자개 장식이 반짝거리는 보록이 떡하니 나와버린 걸 어쩌라는 말인가.

그는 내심 하련솔이라는 허여멀건 무화를 탓했다. 이른 새벽부터 의금부 직원들이 몰려가 ‘수색을 해도 되겠느냐’ 하면, 저는 억울하다고 드러눕든지, 아침부터 무슨 소란이냐고 성질을 내든지, 하다못해 황제 폐하의 허락은 받았느냐고 정식으로 황명을 가져오라 떵떵거려야지 ‘네넵, 그러세요’가 웬 말인가? 하물며 제 처소 아궁이에서 보록이 나왔는데도 그는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듯 ‘어어, 저게 뭐야’ 하더니 하품을 했다.

‘찾으시던 거 나왔네요? 이제 어떡하면 돼요?’

뒤통수에 까치집을 지어놓고 그렇게 묻는데, 의금부 팀장은 차라리 제 혀를 깨물고만 싶었다.

‘폐하께 보고 드리고 결정을 내릴 테니, 허락이 떨어지기 전까진 처소 밖으로 한 걸음도 나서지 마십시오.’

애써 무표정을 고수하며 그렇게 경고했더니 ‘네!’ 하고는 제 침실로 얼른 돌아가던 하련솔이었다. 그 때문에 팀장은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렇게 순하게 살 것 같으면 역할을 무화가 아니라 개로 고치고, 이름을 하련솔이 아니라 흰둥이로 바꾸지 그러냐는 말을 삼켜내기가 고역이었다.

“흠….”

그런데 황제의 반응이 의외였다. 인상을 찌푸리며 태블릿PC를 노려볼 뿐 그는 의금부를 비난하지 않았고, 회의장을 박차고 뛰쳐나가지도 않았으며, 제가 총애하는 무화 하련솔을 변호해주지도 않았다. 목에 핏대를 세우며 하련솔을 두둔하고, 누굴 모함하느냐고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정반대였다. 오히려 그는 하련솔을 탓했다.

“사건 당일 혁의 처소 주변을 떠도는 걸 봤다는 증인까지 있는데, 저는 잘못하지 않았다고 부인하다니 참 몹쓸 놈이다.”

뜻밖의 힐난에 직원들의 눈이 데굴데굴 바삐 움직였다. 가장 놀란 이는 단연 의금부 팀장이었다. 구관이 명관이라고, 새 무화를 암만 아낀들 그 총애가 이차혁이 쌓아둔 입지에는 영 못 미치는가 싶었다.

기회를 틈타 하련솔을 탓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증인과 증거가 나온 이상, 제대로 조사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맞아요. 이틀 사이에 민원이 워낙 많고 궐내 분위기도 흉흉합니다. 더 늦지 않게, 폐하께서 잘잘못을 따져 정리를 해주셔야 할 듯합니다.”

화두에 오른 무화 하련솔에게 적당한 처벌을 내리고, 상황을 복잡하게 한 원인인 황제의 총애를 거두란 말이었다.

이내 이림범이 자세를 고쳤다. 회의 책상 위에 팔꿈치를 대고 제 두 손을 깍지 껴 모아쥐더니, 그는 심각한 얼굴로 무거운 말을 뱉었다.

“그래…. 엄벌을 내려야겠다. 마음 같아선 사형이라도 시키고 싶은데, 다들 생각이 어떠한가?”

“예?”

예상치 못한 소리에 깜짝 놀라, 의금부 팀장이 즉답했다.

“폐하, 사형 제도는 폐지된 지 오랩니다.”

“그럼 무기징역.”

“…….”

“선처해 줄 생각 없으니 교도소로 보내 버리고, 평생 가둬놓으라고 해. 그건 되겠지.”

조용하던 회의장에 작은 술렁임이 생겼다. 조사를 재촉하던 직원마저 당황한 듯 헛숨을 들이켰다.

미간을 퍽 찌푸린 황제의 두 뺨 위엔 짜증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괘씸한 마음을 추스르려는 양 콧김을 세게 내쉬더니, 이내 주먹을 쥔 손을 책상 위에 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왜 대답이 없어?”

대뜸 떨어진 큰소리에 의금부 팀장이 재차 입을 열었다.

“…폐하, 황실에서는 황실의 도리대로 일을 처리해야지 않겠습니까? 징역 선고는 재판장에서나 내리는 것이고….”

그러나 이림범의 대꾸는 재빠르고 완강했다.

“그래? 그럼 경찰을 불러. 도둑놈의 꼴도 보기 싫으니 얼른 데려가서 재판대에 올리라고 해.”

그에 다른 부서의 팀장들도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건 안 될 일입니다. 황실 일을 법원에 맡기다니요?”

“폐하, 조금만 진정하시고 사건을 다시 살펴보시는 게….”

여태껏 갖은 암투가 오갔음에도 재판대에 오른 무화는 없었다. 남몰래 불법을 저지른 이들도 더러 있긴 하였지만, 황실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는 내부에서 처벌하고 해결하는 게 규율이었다. 새 황제를 향한 여론이 좋다 못해 최상인 요즈음인데, 그런 황제께서 개화병에 걸린 무화를 교도소에 내보내선 안 될 일이었다.

그러나 젊은 황제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황실이면 뭐 다른가? 어차피 다 이 나라 국민인데. 황제든 무화든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폐하!”

“하, 그래. 정 그렇다면 황실 안에서 처리하지. 옛 법도로는 도둑놈은 어떻게 처벌하더라? 열 손가락을 다 못 쓰게 만들던가? 아니, 그 전에 자백을 할 때까지 주리를 트는 게 먼저겠군.”

유치한 분노를 못 이겨 막말을 뱉는 이림범을 향해, 회의장에 둘러앉은 직원들은 앞뒤를 다퉈가며 항의하기 시작했다.

“아니, 대체 그게 뭔 소립니까? 너무 과한 처사입니다, 폐하.”

“보록이 그 처소에서 나왔다고 해서 진짜 범인이란 확증은 안 되지 않습니까? 여기, 사진만 봐도…. 하련솔의 처소는 누구나 드나들 수 있게 생겼습니다.”

“맞습니다! 담장도 낮고, 특히나 부엌 창고는 문만 밀 줄 알면 아무나 들어갈 수 있겠는데요.”

“일을 너무 크게 키우셔선 안 됩니다. 선처를 해 주세요.”

그러자 이림범이 허공을 향해 팔을 휘휘 저었다. 회의장이 울리도록 큰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하, 그럼 뭐 어쩌란 말인가?”

한데 그 표정이 이상했다. 치기를 못 감추며 화를 내던 젊은 황제는 온데도 간데도 없고, 어느덧 회의장의 상석에 앉은 남자는 피식피식 새는 실소를 못 감추는 능구렁이였다.

양채림 상궁이 이마를 짚는 것을 시작으로, 눈치 없는 치들도 슬슬 바뀐 분위기를 알아차렸다. 어쩐지 평소 쓰지도 않던 ‘황제 말투’를 다 쓰더라니, 이림범의 연기에 모두 속았다. 일개 무화를 체벌하겠다고 그가 나서면, 부서를 막론하고 팀장들은 도리를 지키느라 그를 말리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입을 모아 선처를 요구하게 됐다.

바라던 바를 이뤘으니 더는 연기할 필요가 없게 되어, 이림범이 웃었다. 희고 반듯한 치열이 드러나도록 활짝 웃는 얼굴이 야속하리만치 보기 좋았다. 잘빠진 낯짝으로 직원들을 달래며 그가 말했다.

“여러분의 생각이 정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지. 의금부 팀장님이 수고 좀 해 줘. 그쪽에서 책임지고, 하련솔에게 3일 외출 금지령을 전달하도록.”

300일도 아니고 30일도 아니고, 고작 3일 외출 금지령을 내리건 말건 하련솔에겐 아무런 타격이 없을 터였다. 오히려 이리 오라 저리 가라 저를 성가시게 하던 숱한 행사에 참석할 필요가 없게 되어 기뻐하고도 남을 그였다.

힐긋 시계를 확인하고서, 이림범이 앉은 자세를 고쳤다. 의자 등받이에 맞추어 허리를 곧게 펴며 그가 말했다.

“이제 진짜 회의 좀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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