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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50화 (50/135)

50.

회의를 파하고 모두가 제 할 일을 떠안고 흩어진 뒤, 이림범은 기다란 복도를 지나 집무실로 향했다. 그 뒤로 도르륵… 도르륵… 바퀴 끄는 소리가 따라붙었다. 서류로 가득 채운 손수레를 끌고 황제를 뒤따르는 이는 양채림 상궁이었다.

박 비서는 그런 상궁을 가감 없이 흘겨보았다. 할 짓 없는 무화들이 그까짓 민원을 좀 넣었답시고 무작정 법률대로, 제도대로 저 많은 서류를 전부 출력해 온 그녀는 신축성 없는 목석 같아 보였다. 자진하여 일거리를 떠안은 꼴을 뽐내며 쪼르르 뒤따른다고 해서 폐하께서 집무실에 들여 주실 리가 있나… 내심 비웃던 차, 아니나 다를까 이림범이 말했다.

“밖에서 기다려.”

똥개 훈련하듯 건넨 명령에 박 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양 상궁을 밖에 두고 저만 황제를 따라가려는데, 대뜸 닥쳐온 손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떠밀었다.

“박 비서. 너 말이야.”

바위처럼 딱딱한 손으로 그를 가로막은 것으로도 모자라, 이림범은 긴긴 복도 끝을 손가락질했다. 저 멀리 떨어져 있으라는 수신호였다. 그러더니 집무실 문을 활짝 열어주며 양 상궁을 들였다.

덤덤한 얼굴로 고개 한 번 꾸벅이고 지나는 양 상궁 뒷모습을, 박 비서는 닭 쫓던 개처럼 어버버하며 바라만 봤다. 묵직한 트레이와 목석 같은 상궁이 들어서자마자 집무실의 문이 매정하게 닫혔다.

둔하디둔한 비서를 문밖에 세워 둔 채, 이림범은 제 책상으로 향했다. 큰 한숨을 푹 내쉬며 그는 허리에 두른 세조대를 풀어 내리고, 밑단이 하늘하늘한 도포 또한 벗어다 의자에 걸쳐놓았다. 그러더니 책상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한쪽 눈썹을 까딱 움직였다. 하고픈 말이 있으면 해 보라는 눈짓이었다.

양 상궁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모든 무화의 개화병 증세는 물론이며 출신과 집안, 지갑 사정까지 속속들이 외는 양채림이었다. 그녀는 무화에게 진심으로 신경을 쏟았고, 그들의 완만한 생활을 위해 일했다. 때문에 ‘황제께서 우리를 손바닥 위에 놓고 굴렸다’며 속 태울 다른 직원들과 그녀는 달랐다. 양채림의 속을 태우는 것은 황제 이림범이 아닌, 구설수에 오른 두 무화였다. 하나는 문정궁에서 가장 오래 생활하며 무척 탄탄한 입지를 가진 아름다운 사내였고, 다른 하나는 같은 사내라는 사실을 제외하면 그와는 아무런 공통점을 지니지 못한 이였다.

고민 끝에, 양 상궁은 두루뭉술한 질문을 건넸다.

“폐하. 어찌 생각하십니까?”

이리저리 퉁퉁 튀는 듯해 천방지축에, 짐짓 나태하고 직무 태만해 보이는 이림범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누구보다 예민하고 섬세한 데다, 성격에 불같은 면이 있어 예측불허한 젊은 황제였다. 어느 쪽이 본 모습이건 그는 가면을 쓴 사람이었다. 그런 이림범 앞에서, 먼저 이렇다 저렇다 제 의견을 표출하는 건 바보짓이었다.

이림범은 피식 웃었다. 제 심중을 읽어보려 양 상궁이 꾸며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그는 굵고 탄탄한 팔뚝을 휘휘 쓰다듬었다. 그리고 딴소리를 했다.

“참 무서운 세상이야. 안 그래?”

그에 양 상궁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말로는 ‘무섭다’ 하는데, 커다란 몸이며 뻔뻔한 태도를 보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건 그, 이림범이었다.

너른 어깨를 덜덜 떠는 시늉 하며 이림범이 말했다.

“한 치 앞도 못 보는 눈먼 무화가, 남의 시선을 피해 물건을 훔치다니…. 하련솔은 제 지아비인 내 낯짝도 모르는데, 그런 주제에 보록은 어찌 알아보았을까?”

“…….”

“눈을 다 뜨고 나면 무슨 일을 해낼 수 있을지 궁금해지네. 난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인데 말이야.”

그에 양 상궁이 숙였던 고개를 반듯하게 들었다. 똑똑한 교통경찰답게, 그녀는 황제의 마음이 가는 방향을 얼른 알아차렸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어리숙한 듯 착한 성격에 미미한 존재감을 지닌 무화 하련솔이, 정말로 그의 가슴에 들어앉은 모양이었다.

“폐하, 그러면 이차혁은….”

조심스럽게, 양 상궁이 입을 열었다. 궁궐에서 일어나는 사고는 사람을 쉽게 패착에 빠뜨렸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름이 정해지고 나면,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칼을 쥐고 있다고 착각하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양 상궁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는 하련솔이 도둑질을 했단 말을 믿지 않았고, 그러면서도 이차혁이 계략을 꾸몄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무화를 사람으로 보고, 존중하고 이해하고 그러면서도 동정하는 양 상궁을, 이림범은 아주 빤히 바라보았다. 직선으로 부딪혀 오는 황제의 시선에는 부정적인 감정일랑 실려있질 않았다. 말도 없고 표정도 없이, 그는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쓸데없는 걱정 말고, 쓸모없는 논란이나 조용히 처리해 줘.”

양 상궁도 그제야 어깨에 얹은 긴장을 내려놓았다. 그녀를 아주 안심시키려는 양, 이림범이 쐐기 박듯 말했다.

“혁이는 이런 짓을 벌일 놈이 아냐. 걔가 심술을 부렸더라면 이 정도로 끝나진 않지.”

그에 양 상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그녀는 괜한 걱정을 했다며 약간은 자책했다. 6년간 이차혁을 지켜봐 온 그녀의 지식은 실상 미미한 수준이었다. 이림범이 알고, 이해하고, 인정하는 이차혁에 비하자면 누구의 무어라도 그러할 터였다.

***

마무리 공사를 모두 마친 은진전은 개방할 날만 앞둔 상태였다. 황제가 주문한 어전이 도착하여 전각의 중앙 자리에 걸리고 나면, 휘장처럼 가지를 늘어뜨린 꽃나무 옆 대문이 활짝 열릴 터였다. 그런들 명색이 문정궁의 별채인지라, 출입할 수 있는 인물은 무척 제한적이었다. 개중에서도 불티나게 이곳에 손도장이며 발자국을 남길 이는 다름 아닌 하늬안이었다. 오죽하면 벌써 제 짐의 일부를 어전이 걸릴 벽 너머 작은 뒷방에 넣어둔 상태였다.

오늘, 하얀 폴라넥 스웨터에 회색 추리닝 바지 차림새로 하늬안은 땀을 흘리며 섰다. 왼손에 쥔 마른걸레는 회색 먼지로 지저분했다. 청소업체 직원들이 한 차례 정리를 마치고 떠난 은진전의 구석구석을, 직접 쓸고 닦으며 청소한 결과였다.

먼지 한 톨 없이 청소하고, 새집 냄새가 빠지게끔 환기를 마친 뒤 그녀가 준비한 것은 제사상이었다. 모서리가 둥그스름한 반상을 너른 자리에 펼쳐놓고, 챙겨온 아이스박스에서 하나둘 음식을 꺼냈다. 삶은 계적과 북어포, 사과와 두부전, 밥과 국의 구성은 평범했다. 그러나 사과 옆에 놓인 햄버거와 뚱뚱이 캔 콜라는 무척 이질적이었다.

상의 맨 끝줄, 한가운데에는 가피 스님의 필체로 쓰인 지방과 작은 액자를 세워놓았는데, 사각 틀에 갇힌 사진이 참 환했다. 두 눈이 가늘어지고 뺨이 봉긋 솟도록 함박웃음 짓는 소년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오래전 하늬안을 따라 경복궁을 뛰어놀던 둘째 황자의 모습이었다.

다정한 눈길로 사진을 쓰다듬기도 한참, 하늬안은 방석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더니 두 손을 모아쥐고 움직이지 않았다. 입 안으로 중얼중얼 기도를 외는 게 하는 일의 전부였다.

그러는 내내 그녀는 제 등 뒤에 앉은 타인을 완전히 무시했다. 벌써 한 시간째, 하늬안을 물끄러미 지켜보며 은진전에 자리한 남자가 있었다. 그녀로부터 대각선을 그리며 떨어진 뒷자리에 앉아, 그는 빤한 시선으로 제사상을 구경했다.

뚜렷한 존재감과 눈짓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늬안은 기도하는 자세 그대로 석상이 됐다. 중얼중얼 기도하는 소리가 들릴 듯 말 듯 속닥속닥했다. 애써 들어봐야 의미를 알 수 없는 주문에 불과함을 알기에, 이차혁은 구태여 그 음성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다만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성질 좀 줄이세요, 그러다 화병 나겠어요.”

마침내 한 마디 툭 건넨 소리에 하늬안의 눈썹이 꿈틀했다. 눈가에 주름이 지도록 두 눈을 꽉 감고, 모아쥔 손에도 더욱 힘을 주며 그녀는 기도에 매진했다.

조그맣게 웅크린 등을 향해 이차혁이 재차 말했다.

“폐하도 그만 괴롭히시고요.”

그래도 하늬안은 가벼운 고갯짓 한 번 보여주지 않았다. 입안으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더욱 빨라졌다. 제 말을 못 들은 척하는 그녀의 태도에 이차혁은 답답해졌다. 대놓고 이마를 찡그리며, 그는 더욱 크게 목소리를 내어 외쳤다.

“이런다고 뭐가 바뀌어요?”

그제야 하늬안이 홱 뒤를 돌아보았다. 성난 사람처럼 부릅뜬 두 눈으로 이차혁을 노려보기도 잠시, 그녀는 방석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제사상을 향해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빠르게 척척 움직이며 절을 하고, 또 하고, 또 하는데, 지켜보기만 해도 허리가 아프고 허벅지 근육이 아리는 듯했다.

삽시간에 피로감을 느껴 이차혁은 고개를 내저었다.

“알았어요, 말 안 걸게요.”

그러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고집쟁이처럼 입을 꾹 다물고 절을 하는 하늬안을 향해, 들으라는 듯 발소리를 내며 그는 뒤로 물러섰다. 짜증과 걱정, 성화가 섞인 목소리로 이차혁이 거듭 말했다.

“안 그러셔도 돼요. 나 그만 갈 테니까…, 그만 해요. 무리하지 마시라고요.”

그럴수록 하늬안은 더욱 열심히 절을 올렸다. 아예 자리를 피하는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에, 이차혁은 도망치듯 은진전을 떠나야 했다. 겉보기에나 아름답지 속이 텅 빈 은진전에서 빠른 걸음으로 빠져나와, 그가 돌아갈 곳은 문정궁이었다.

너른 후문을 지나 그늘 하나 없이 밝은 길목을 가로지르는데, 머리 위에 내려앉은 피로감은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터벅터벅… 이차혁은 습관적으로 처소로 향하던 두 발을 우뚝 멈췄다. 그리고 크게 소리 질렀다.

“아!”

답답한 감정이 실린 외침은 아주 짧았다. 짧은 만큼 금세 흔적을 감췄다. 보는 이도 듣는 이도 없기에 부릴 수 있는 짜증이었다.

흙길에 퍽퍽 거센 발자국을 남기며 이차혁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모든 게 다 싫었다. 당장은 제 눈치를 살피며 입지를 재어보는 여느 무화도, 남몰래 지팡이며 휠체어를 챙겨 두느라 바쁜 시종도, 지난밤의 기억을 따지고 캐묻는 의금부 팀장도 보고 싶지 않았다. 오늘 이차혁에게 바라는 일이 있다면 하늬안의 눈에 보이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밖에 모든 이들의 눈 밖으로 벗어나는 것이었다.

‘하나 같이 황제에 미쳐서는… 제정신이 아니야.’

그러고 보면 딱 한 사람, 그를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남자가 있기는 했다. 낯빛이며 표정, 복장, 태도를 꾸며낼 필요 없는 상대를 떠올리자마자 이차혁은 갈림길에 놓였다.

별다른 고민 없이, 그는 개구멍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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