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51화 (51/135)

51.

문정궁에서 보낸 지난 6년간 이차혁은 모든 무화들을 다 겪어보았다. 처음에는 선량한 말씨로 제 환심을 사려 노력하던 이들도, 황제께서 침전에 들길 허락해 준 다음 날이면 금세 태도를 바꾸게 마련이었다. 잠자리를 갖기는커녕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했음을 속속들이 잘 알건만, 대단한 부귀영화라도 얻은 양 건강해진 몸으로 본색을 드러내는 식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된 판국에 하련솔의 태도는 어떠할까. 이차혁은 그게 궁금했다. 하련솔이 제 처소에 침입하여 보록을 훔쳐 갔다는 개소리야 당연히 믿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차혁은 그가 전처럼 저를 반겨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앞뒤를 잘라놓고 보면 제 시종들이 하련솔을 도둑놈으로 내몬 형색인 탓이었다. 모나게 불거진 모함으로 인해 그도 조금은 저를 미워하거나 의심할 텐데, 태도가 변했다면 얼마만큼 변했는지 알고 싶었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하련솔만큼은 그 이름처럼, 소나무처럼 가만히 그대로였으면 싶기도 했다. 은진전에서 쫓겨나듯 나온 신세에 이차혁은 환영을 받고 싶었다.

목적지를 정하고 나니 발걸음이 빨라졌다. 긴 다리를 휘적휘적 움직이다 보니 어느덧 하련솔의 처소 앞이었다.

그 처소가 워낙 조그맣다 보니, 대문을 지키는 의금부 직원은 둘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각자 휴대폰을 쥔 채 딴짓에 한창이었다. 불쑥 다가서자 인기척에 고개를 번쩍 드는데, 이차혁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반응이 어리바리했다. 그들이 처소 앞을 지키는 이유는 하련솔의 외출을 제한하기 위함이지, 찾아온 이를 내치기 위해서는 아닌 탓이었다. 더군다나 절도 사건의 피해자인 이차혁이 대뜸 방문할 줄은 예상치 못했다.

두 직원이 의아한 얼굴로 이차혁을 올려다봤다. 개중 왼편에 선 이가 귀를 붉히며 ‘안녕하세요’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그의 말을 따라 하며 이차혁이 웃었다.

“할 얘기가 있어서 왔어요. 바깥 잘 지키고 계세요.”

그러곤 제 입술 앞에 검지를 세워 보여주고는, 처소 안으로 유유히 걸어 들어갔다. 잠시간 어리둥절하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던 직원들은 고민 끝에 열린 대문을 도로 닫았다. 그리고 차렷 자세로 문지기 노릇에 열중했다.

언제고 조용하고 차분하던 하련솔의 처소는 무척 흐트러진 상태였다. 뜰에는 큼직한 발자국이 가득했고 문 열린 창고 안은 잡동사니가 널브러져 엉망진창이었다. 처소의 주인은 침실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고, 정리를 도맡은 시종마저 면담을 위해 불려간 탓이었다.

어지러운 모습을 가만히 노려보다, 이차혁은 쪽마루 앞으로 다가갔다. 처소 주인의 흰 신발 옆에 제 단화를 벗어놓고, 복합문 위를 퉁퉁 두들겼다. 그러자 얇은 문짝 너머에서 대답이 선뜻 들려왔다.

“네.”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려주는가 싶더니, 하련솔이 문을 벌컥 열었다. 이번에, 이차혁은 어깨를 슬그머니 뒤로 빼내며 문짝을 피했다.

어두운 방 밖으로 삐죽 내민 하련솔의 얼굴이 하얬다. 커다란 갈색 눈동자는 전에 비해 맑아진 듯 보였다. 그래도 완전히 회복하진 못한 듯, 미간을 찌푸린 채 가까이 선 이차혁을 한참 동안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얼굴의 모든 근육을 확 펴며 말했다.

“혁아!”

밝은 얼굴로 저를 반기는 모습에 이차혁은 불쑥 기분이 좋아졌다. 갖은 고민이 순식간에 휘발됐다. 동시에 그는 깨달았다. 하련솔은 눈치 싸움을 할 줄 아는 무화가 아니다. 눈치 싸움은커녕 눈치 게임도 못 할 게 분명했다. 그는 느낀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사람이었다. 대뜸 이차혁의 이름부터 불러놓고는 ‘아차’하고 입매를 굳히더니, 이리저리 눈을 굴리는 식이었다.

그러더니 변명하기 시작했다.

“저기, 내가… 어제 네 처소 근처에 갔던 건 맞는데, 뭘 훔치려고 그런 건 아냐. 그냥 이야기를 좀 하고 싶었어. 오해를 풀려고 그랬던 건데… 그 바람에 더 오해를 산 거 같네.”

명절 연휴는 언제나 아르바이트를 하며 보내온 하련솔이었다. 남들이 일하지 않으려는 시기에 일을 하면, 평소보다 많은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남들 놀 때 같이 놀고, 남들 쉴 때 같이 쉬는 추석은 너무나 간만이었다. 그래서 속이 편했느냐 하면 그렇지는 못했다. 자꾸만 몸이 근질근질하고 입이 심심했다.

할 일도 하릴도 없이 심심한 이가 문정궁 내에 저 혼자는 아니리라, 하련솔은 생각했다. 그러면서 떠올린 게 이차혁이었다. 행차 날 벌어진 일을 두고 이차혁이 저를 미워한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제 사정이며 입장은 정확히 밝혀두고 싶었다.

문제는 이차혁이 대뜸 제 처소로 찾아오듯 제가 그의 처소에 찾아가는 건 안 될 일이란 데 있었다. 어쩐 일로 산책을 나선 하련솔의 뒤를 졸졸 따르던 초롱이, 그의 목적지를 알자마자 ‘제발 돌아가자’하며 뜯어말린 것이었다.

이차혁의 처소는 황제가 자주 오가는 전각이라, 다른 무화를 들인 적이 일절 없다는 게 초롱의 설명이었다. 새로이 총애를 얻게 된 무화 입장에서 찾아가는 것은 절대로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말 백 마디와 함께였다. 이차혁이 그를 제 처소에 들여보내 주었다간 ‘하련솔이 남의 처소 자리까지 넘본다’는 못된 소문이 돌 터였고, 방문을 거절하고 돌려보냈다가는 ‘이차혁이 텃세를 부린다’며 나쁜 소문이 따라붙을 터였다.

‘욕먹는 건 솔 님이지만, 맘 아픈 건 저예요! 그러니까 가만, 가만히 계세요! 평소처럼 폐쇄은둔족으로 지내시라고요!’

‘폐쇄은둔족이라니, 초롱아….’

제가 모시는 무화가 나쁜 소문에 휘말리지 않게끔 초롱은 열정적이었다. 하련솔이 생각하기에도 그녀 말이 옳았다. 그래서 얌전히 산책을 마치고 귀가했다. 한데 그 짧은 산책이 빌미가 되어 하루아침에 도둑놈 취급을 받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할 말 많은 입술을 꿈질거리며 하련솔은 몸을 뒤로 비켰다.

“들어올래?”

그에 이차혁이 선뜻 문지방을 넘었다. 부드러운 입술로는 작은 호를 그린 채였다. 그러나 그의 두 발은 침실 깊은 곳에 닿지 못하고 우뚝 멈췄다.

조그마한 침실의 한쪽 벽면에 곱게 걸린 옷이 한 벌 있었다. 검푸른 윤이 흐르는 흑색 비단에 금색 자수를 빼곡히 놓은 대창의였다. 화려한 자수며 값나가는 옷감, 너른 어깨너비며 기다란 총장은 무화 하련솔의 것이 전혀 아니었다.

조그마한 처소에 남은 황제의 발자취를 바라본 순간, 이차혁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좋았던 기분도 푹 꺼졌다. 은진전에 두고 온 줄 알았던 착잡한 마음이 여직 그의 등에 업혀 있었다. 어깨가 내려앉는 기분으로 이차혁이 중얼거렸다.

“폐하께서는 원하는 걸 다 가지셨네.”

“어?”

심드렁히 뱉은 혼잣말에 하련솔은 당황한 목소리를 돌려주었다. 몸을 돌려 대창의를 등지고서 이차혁은 그를 바라보았다. 계곡물에 씻어내린 듯 흰 뺨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하련솔은 놀란 탓에 무표정했다.

“그런데요, 형. 나한테는 아무것도 없는데….”

“…….”

“나한텐 아무도 없어요.”

충동적으로 뱉은 말은 이차혁의 것이면서도 그의 것이 아니었다.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말해야지 계획한 적도 없는, 마음의 심해에서 튀어나온 투정이었다.

말이 그렇듯 행동 역시 충동적이었다. 얼른 손을 뻗어 이차혁은 하련솔의 팔뚝을 쥐고, 저에게로 끌어당겼다. 마른 남자의 몸이 별수 없이 비틀거리며 그의 품 안으로 들어왔다. 그대로 팔을 둘러 하련솔을 껴안으면서, 이차혁은 일부러 체중을 실어 하련솔에게 기댔다.

저에게로 쏟아지다시피 기대어 오는 이차혁을, 하련솔은 차마 거부하지 못했다. 그는 도리어 고개를 추켜올려 힘겹게 이차혁의 어깨에 제 턱을 올리고, 커다란 동생의 등허리를 토닥토닥 두들겨주었다. 습관적으로 벌인 다정이었다.

그 손길에 이차혁이 작게 웃었다. 실소하는 소리를 한숨으로 착각한 듯, 하련솔은 더욱 열심히 그를 다독여주었다.

“혁아…. 그렇게 생각하지 마. 너에게 아무도 없다는, 그런 생각은 하는 게 아니야.”

“그게 사실인데요?”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다들 널 대단한 무화라고 말하던데, 왜 그런 생각을 해. 너한테는, 너한테는 네가 있잖아. 너는 꼭 네 편에 있어 줘야지.”

“‘대단한 무화’요? 거기 무슨 의미가 있나요. 그래봤자 무화일 뿐인데.”

진심 어린 조언으로 저를 달래는 하련솔이, 이차혁은 좋았다. 그래서 더더욱 삐뚜름한 대답을 내놓았다. 외로움이 묻은 말 몇 마디와 동정심을 얻기 위한 연기, 개 같은 수작질 여럿이면 착한 하련솔의 마음을 살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 바람에 하련솔은 두 눈을 꾹 감았다. 그리고 내심 자책했다. 이차혁이 제 처소로 찾아왔던 지난밤, 제 상황을 좀 더 잘 설명해줄 걸 그랬다. 체력이 바닥나 곯아떨어지는 바람에 기회를 놓쳐 애먼 이를 마음 상하게 한 듯했다.

그러나 미안한 마음으로 막연히 품을 내어주고 싶진 않았다. 대신에 하련솔은 제대로 된 화해와 극복을 원했다.

“혁아. 내가 널 일부러 속이려고 그런 게 아니야. 나도 몰랐어. 여기 자주 찾아오던 친구가 있었는데, 알고 보니 황제였는데…. 다른 이름을 썼어. 자기 이름이 나찰사라고 했어. 내가 일부러 너 몰래 황제를 만나고, 그런 건 아니야.”

“‘나찰사’라고 그랬다고요?”

그에 이차혁이 이마를 찡그렸다. 황제께서 여러 차례 하련솔의 처소에 오간 것쯤이야 그도 알았다. 그를 당황하게 하는 건 ‘나찰사’라는 가명이었다. 호법신에서 따오자면 멋있고 그럴싸한 이름이 열한 가지는 더 있었을 텐데, 하필 나찰사라 말하다니 그 기저에 깔린 생각이 참 가여웠다. 그건 스스로를 생지옥에 살던 악귀였노라고 고백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우리 폐하답네….”

다소 맥이 빠져버려, 이차혁이 중얼거렸다. 힘없는 속삭임에 책임을 느끼는 듯 하련솔이 말했다.

“미안해, 혁아.”

“왜 사과해요? 내가 폐하와 형의 사이를 질투할까 봐?”

그러자 이차혁의 어깨 위를, 딱딱하고 좁은 것이 꾹꾹 눌렀다. 하련솔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래턱을 찍은 것이었다. 그 기척에 이차혁은 웃었다. 한숨 쉬듯 웃으며, 그는 와락 껴안았던 팔을 풀었다. 대신에 하련솔을 제 앞에 반듯하게 세워놓고 그의 양 팔뚝을 움켜쥐었다.

그대로 고개를 들이밀자 하련솔이 놀란 듯 얼굴을 뒤로 피했다. 당황한 듯 빠르게 깜빡이는 두 눈동자를 아주 가까이서 내려다보며, 이차혁이 말했다.

“그래요, 형. 난 폐하를 좋아하고…, 그 폐하께서 형을 총애해서 질투가 나요.”

“…….”

“그런데 내가 질투하는 건 형이 아니라, 폐하예요.”

“…어?”

커다란 눈으로 이차혁의 얼굴을 살피기도 잠시, 말의 뜻을 깨달은 듯 하련솔이 입을 벙긋거렸다. 그러더니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감고 싶어서 감은 게 아니었다. 근육에 힘이 꽉 들어가, 절로 감긴 것이었다. 마른 어깨를 빳빳하게 굳히며 그는 옅은 신음을 흘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탓에, 어깨에 담이 걸리고 목덜미로 쥐가 올랐다.

“솔이 형.”

심리적인 충격이 곧바로 육체로 전이되는, 약해빠진 하련솔을 두 손에 움켜쥐고서 이차혁이 고백했다.

“내가 원하는 사람은 형이란 말이에요.”

어깨를 꽉 웅크린 채 하련솔은 그의 뜻대로 움직였다. 다리 힘이 풀린 탓에 바닥에 나자빠지듯 주저앉았고, 마른 다리를 붙들어 당기는 손길에 쑥, 아래로 미끄러졌다. 등허리가 바닥 위에 닿고 옷깃은 죄 구겨졌다.

그의 놀란 반응에도 이차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련솔의 벌어진 다리 사이에 제 몸을 끼우다시피 맞대고, 금방이라도 안을 듯이 자세를 취했다. 저릿저릿한 근육통에 시달리며, 하련솔은 두 눈을 어렵사리 떠 보였다. 멍한 눈동자가 제 얼굴로 똑바로 향하는 순간, 이차혁이 오른팔을 뻗었다. 그러곤 당혹감에 빨갛게 물든 하련솔의 목을 쥐었다.

“형….”

식은땀이 묻은 가느다란 목이 이차혁의 한 손에 꽉 찼다.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은 채 이차혁은 하련솔의 표정만을 살폈다. 그가 손가락을 움직여 목덜미를 부드럽게 주물러주기 시작하자, 하련솔의 얼굴에 찬 긴장도 자리를 떠났다. 저릿저릿한 근육이 서서히 풀리는 것을 느끼며 하련솔은 진이 빠진 듯 더운 숨을 길게 뺐다.

불쑥, 이차혁의 뇌리에 생각 한 줄이 스쳤다. 황제도 하련솔을 이렇게 만졌을까… 하고.

그러자 더욱 열이 올랐다.

‘내가 먼저 알아보았는데. 먼저 찾아냈고, 먼저 좋아했는데….’

하련솔을 향한 제 감정이 무언지 이차혁도 똑바로 알진 못했다. 치기라고 해도 좋고 질투라고 해도 좋았다. 막연한 선망이나 소유욕에서 비롯된 감정인지도 몰랐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형만큼은 내가 가지면, 그러면 안 돼요?”

하련솔에겐 이차혁을 유치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그를 보면 이은재가 생각났다. 이은재는 이차혁이 처음으로 갖지 못한 사람이었고 사랑이었다. 그와 함께하던 그 옛날을, 이차혁은 언제나 기억했다. 이림범이 벌 받는 악귀이던 시절이 있었다. 개화병을 얻기 한참 전, 이차혁은 사랑받는 둘째 황자였다.

그 무렵 형제의 운동장은 이차혁을 향해 무진 기울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은재가 발을 내린 순간, 불쑥 이림범에게로 모든 것이 기울어졌다. 이은재의 애정을 독차지하는 것을 시작으로 이림범은 모든 걸 갖게 됐다.

저의 하나뿐인 형제, 소중한 친형에게 양보는 충분히 했다고, 이차혁은 생각했다. 한때 제 것이라 약속되었던, 다른 모든 것들로 이미 충분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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