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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52화 (52/135)

52.

이차혁은 한결 마음이 후련했다. 무너진 둑처럼 속에 든 말을 쏟아 낸 덕이었다. 딱 그만큼 하련솔은 버거웠다. 타인의 상체를 이불처럼 덮고, 우르르 쏟아진 고백에 깔려 그는 더운 숨을 헉헉거렸다.

“…헉, …흐으.”

긴 속눈썹이 아래로 향하도록 이차혁은 하련솔을 빤히 내려다봤다. 손끝이 파리하게 질리고 목덜미는 발갛게 물든 채 하련솔은 말이 없었다. 아프다는 건 참 피곤하고 곤혹스럽다. 사람과 사람이 교류할 때면 적절한 박자라는 게 생기는 법인데, 아픈 이들은 대개 박치다. 바로 지금 하련솔이 그러듯이, 적절한 대답을 돌려주어야 할 때 산통을 깨는 식이었다.

이차혁은 그런 하련솔을 이해했다. 저 또한 아픈 것에 익숙한 무화이기 때문이었다. 대답을 재촉하는 대신, 그는 손길을 옮겨 하련솔의 가슴팍 중앙을 만졌다. 야트막한 가슴이 빠르게 퉁퉁 울리고 있었다. 흉통을 뚫어 버릴 것처럼 빠르고 거칠게, 심장이 뛰어 댔다.

이차혁은 기다란 손가락을 액체처럼 미끄러뜨렸다. 하련솔이 두른 베이지색 두루마기를 쉽게 젖히며, 얇은 상의 위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퉁퉁, 퉁퉁… 놀라 달음박질치는 심장 박동이 어째선지 유독 특별하게 느껴졌다. 산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진 게 심장인데, 하련솔의 심장이 저 때문에 빨리 뛴다는 게 좋았다.

따지고 보면 이곳, 문정궁에는 하련솔보다 작은 사내 무화가 많았다. 그런데도 이차혁은 개중 하련솔이 가장 작고 여리다고 착각했다. 워낙 몸이 약한 탓이었다. 그러니 하련솔은 더욱 쉬워 보였다. 그렇기에 더더욱 빨리 갖고 싶었다.

특히나 이차혁을 목마르게 하는 건 그의 태도였는데, 언제고 편편하니 차분해서는 도리어 상대를 조급하게 만드는 면이 있었다.

‘…언제 괜찮아지는 거야?’

느려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 심장 박동을 한 손 가득 느끼면서, 이차혁은 하련솔을 물끄러미 구경했다. 일평생 아름답다는 찬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이차혁이었다. 거울을 볼 때면 그도 제 외모가 출중하다곤 생각했고, 거울을 보지 않아도 가까이 지내는 이림범이 있어 타인의 미모에는 무감각해진 지 오래였다. 그런데도 하련솔의 얼굴은 특이할 만치 귀엽고 예뻐 보였다.

이차혁의 손길이 하련솔의 반쯤 감긴 눈 아래, 붉어진 콧방울, 꾹 닫힌 입술 위를 느릿느릿 훑었다. 그러곤 이마에 들러붙은 앞머리로 향했다. 식은땀으로 머리칼까지 흠뻑 젖은 게, 누가 보았더라면 더운 운동을 한 줄 오해할 성싶었다.

그러자 애먼 생각이 불쑥 들었다. 조그마한 불씨가 그의 뱃속에서 따끔따끔 타올랐다. 고개 숙여, 이차혁은 제 허리를 기준으로 벌어진 하련솔의 양다리를 훑어보았다. 본능적으로 움직인 손이 그의 허벅다리에 다가가 붙었다.

이내 하련솔이 응답했다. 허벅다리 근육을 움찔 조이는가 싶더니, 그는 몸을 위로 빼냈다. 그러고는 불시에 이차혁을 걷어찼다.

퍽.

가벼운 타격음과 함께 이차혁의 몸이 휙 밀렸다. 그는 곧바로 제자리에 풀쩍 주저앉았다. 예상치 못한 접촉은 물리적인 통증보다는 심리적인 충격을 더욱 크게 안겼다.

“…….”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이차혁은 남의 발에 얻어맞은 제 가슴을 뒤늦게 가로막았다. 두 팔로 엑스 자를 그리듯 앞섶을 여미는 그를 향해, 하련솔이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그러곤 미처 진정되지 못한 숨을 헐떡거리며 이차혁을 혼냈다.

“야. 너는 내가 만득이로 보이냐?”

작은 몸에서 터져 나온 윽박이 매서웠다. 이차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부모로부터 훈육의 매질도 받아본 적 없고, 놀이할 때에 딱밤 한 번조차 맞아본 적 없는 그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하련솔이, 다른 무엇도 아닌 발길질로 제 가슴을 쳤다는 게 못내 충격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만득이’가 뭔지 몰랐다.

거친 호흡 끝에 하련솔이 컥컥 기침했다. 몸살이 도지는지 턱 끝에 맺힌 식은땀을 뚝 흘리면서도 목소리만큼은 다부졌다.

“어디서 나쁜 것만 배워서는…. 버릇없이 남의 몸을 자꾸 만져?”

“형. 근데 쥐 났잖아요….”

“그럼 그냥 주물러주면 되지, 왜 쪼물딱거려?”

“주물러 주는 거랑 쪼물딱거리는 거랑 뭐가 다른데요?”

“자꾸 말대꾸할래?”

한 마디 두 마디 말이 길어질수록 이차혁의 고개가 슬금슬금 아래로 내려갔다. 눈에 띄게 시무룩해진 그의 태도에 하련솔도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착한 앤 줄 알았는데… 왜 자꾸만 엉큼하게 굴어?”

혼잣말하듯 건넨 질문에 이차혁은 마음이 뜨끔했다. 뭐라 불러야 좋을지 모를 열망에 끌려 제멋대로 하련솔을 끌어안기도 여러 번, 같은 이유로 그의 목이며 가슴, 품을 멋대로 만져 댄 게 사실이었다.

양심의 가책을 뒤로 물려놓고, 이차혁은 뻔뻔하게 표정을 고쳤다. 다시금 천천히, 하련솔의 등 뒤로 무릎걸음으로 돌아가며 그가 말했다.

“이제 안 쪼물딱거릴게요. 주물러 주기만 할게요. 그건 괜찮죠?”

그러곤 유독 딱딱해 보이는 하련솔의 왼쪽 어깨를 만졌다. 안으로 푹 구부러진 채 펴질 줄 모르는 마른 어깨가 열이 올라 뜨끈뜨끈했다. 아무래도 담이 제대로 걸린 듯했다. 엄지 끝마디로 꾹꾹 지압하고, 두 손으로 쥐고 부드럽게 주물러주자 하련솔이 한결 가벼운 날김을 길게 쉬었다.

그리고 침묵이 감돌았다.

“…….”

“…….”

하련솔의 호흡을 듣기만 할 뿐, 이차혁은 마른침 한번 시원하게 삼키지 못했다. 아늑하고 포근하기만 하던 침실이 숨 막히도록 답답한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다정하고 차분하던 하련솔의 존재감도 염라대왕처럼 무섭게 돌변했다. 충동적으로 제 감정을 쏟아 낼 때는 생각지 못한 뒷감당의 시간이었다.

‘어색하다….’

어색해서 죽을 것만 같은 시간을 이차혁은 묵묵히 감내했다.

그리고 마침내, 하련솔이 움직였다. 제 어깨를 조물조물 만져 주던 이차혁의 손등을 잡은 것이었다. 천천히 저를 돌아보는 하련솔을 향해, 이차혁은 제 온 신경이 집중되는 감각을 느꼈다. 뺨의 솜털조차 삐죽삐죽 일어나 하련솔을 향하는 듯했다.

언제고 일자형으로 반듯하던 눈썹 끝을 끌어내리고서, 하련솔은 이차혁의 얼굴을 몇 초간 바라만 봤다. 흐린 시선으로 그의 형태를 읽기도 잠시, 그가 말했다.

“네 보록 훔쳐 간 사람이… 황제인 거야?”

“…이야기가 왜 그렇게 되죠?”

새로운 고민이 이차혁에게 주어졌다.

빠르게 기억을 되짚어, 그는 제가 뱉은 말을 주워 담았다. 저는 분명 하련솔을 향해, 형이 아닌 황제에게 질투가 난다, 모두 다 뺏기긴 싫다, 형만큼은 내가 갖고 싶다…, 그러면 안 되겠느냐고 말했다. 충동적인 만큼 진솔한 고백이었다. 그러나 하련솔의 해석은 다른 모양이었다.

“하하!”

엉뚱하기 짝이 없는 질문에 뒤늦게 자극받아, 이차혁이 웃음을 터뜨렸다. 황제가 뺏어갔다는, 이차혁의 ‘것’이 무언지 열심히 유추해낸 끝에, 하련솔이 내린 결론이 기가 막혔다. 당장 사라진 물건이 보록이니, 혹시 그 범인이 이림범인가 의심했다는 게 그저 웃겼다.

이차혁이 허리를 젖히며 폭소하자, 진지하던 하련솔의 표정도 흐물흐물 변했다.

“뭐야…. 왜 웃어?”

이마가 구겨지고 눈물이 삐죽 나오도록 웃어 대느라, 이차혁의 목소리는 덜덜 떨리며 새어나갔다.

“아니…, 아니에요. 형이 내 보록 훔쳐 가는 거 상상하니까 너무 웃겨서….”

“형이…?”

긴긴 웃음 끝에 이차혁이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나 신나게, 하하 소리를 지르며 웃은 게 얼마만인지 몰랐다. 검지로 눈물을 훔치며 그는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네. ‘형’이요. 황제 폐하랑 저는 형제 사이거든요. 배다른 형제….”

“…….”

묵혀둔 비밀을 털어내니 속이 시원했다. 이차혁은 아예 앉은 자리에 두 발을 뻗어버렸다. 그 앞에서, 하련솔은 어리바리하며 입을 벙긋거리기 바빴다. 불투명한 기운이 감도는 갈색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생각을 바삐 굴리는 모양새가 환히 드러나는 듯했다.

‘그러고 보면… 닮은 구석이 있기는 해.’

하련솔이 생각했다. 이림범과 이차혁에게는 공통점이 많았다. 황실 사람들은 두 글자 성씨를 쓰기에 따지고 보면 다른 성이긴 하였으나, 아무튼 그들 성씨의 첫 글자가 ‘이’로 시작하는 것이나, 이름이 예쁜 것. 또, 덩치가 큰 것이나 손아귀 힘이 강한 것. 쉽게 호형호제하고 자꾸만 찾아오는 것이며 저에게 관심을 보이는 독특한 성격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따져보자니 꽤 비슷했다. 왜 이제껏 알아채지 못했는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냐, 이걸 어떻게 맞히겠어?’

하련솔은 내심 자기 변호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림범은 이 나라의 황제이고, 이차혁은 그의 후궁인 무화였다. 그것도 가장 사랑받기로 소문이 난, 아름다운 사내 무화였다.

“…….”

갑작스럽게, 그의 표정이 점차 착잡해졌다. 감출 수 없는 경악과 찝찝한 기분이 하얀 얼굴 위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곰팡이 핀 빵을 씹은 듯한 얼굴을, 이차혁이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그러다 꽥 소리를 지르며 두 손을 허공에 대고 휘저었다.

“뭘 상상하는지 몰라도 그런 거 아니에요!”

형제 사이에 그런 끔찍한 가정일랑 생각만 해도 토가 치밀기에, 차마 톡 꼬집어 말하지는 못하고 그저 아니라고만 했다. 그것만으로도 의사 표현은 충분했다. 하련솔이 ‘어어’ 하고 수긍하는 소리를 흘린 것이었다. 어느 바보가 도를 깨우치더래도 그렇게 둔한 감탄사를 뱉진 못할 터였다.

“그래…. 그렇구나. 다행이다….”

그러더니 다시 입을 다무는 하련솔이었다. 응당 쏟아져야 마땅한 질문 세례를 기다리던 이차혁은 대뜸 심심해졌다.

“…그게 다예요?”

어리둥절하니 잘생긴 눈썹을 힘껏 올리며, 오히려 이차혁이 물었다.

“안 궁금해요?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명색이 황자 출신인데 왜 문정궁에서, 황제가 된 형 옆에서, 지금 개구멍에서 이러고 있는지….”

“궁금하긴 한데, 안 물어볼래.”

“왜요?”

황당하다는 듯 쏟아 낸 질문은,

“네가 별로 말할 기분이 아닌 것 같은데?”

쉽게 돌아온 말과 흐린 미소에 의해 뚝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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