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53화 (53/135)

53.

정곡을 찔려 당황한 기색을 못 감추는 이차혁을 코앞에 두고, 하련솔은 둔한 눈으로 허공만 바라보았다. 그 특유의 부드러운 표정이며 미소는 안개 너머에 있는 양 흐릿해 보였다. 상대에게 시선을 똑바로 대지 못하는 탓이었다.

하련솔이 말했다.

“네가 싫은 이야기를 굳이 왜 해야 해. 안 그래도 돼, 혁아. 겨우 기분 나아진 것 같은데….”

하나부터 열까지 다 옳은 소리였다. 이차혁은 제 사정에 대해서 누구에게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하물며 이림범과도 툭 터놓고 과거 이야기를 나눠본 적 없었다. 그들 형제에게 지난날의 기억은 공통된 독이었다. 과거를 반추하는 짓일랑 이림범에게는 겨우 아문 상처를 후벼 파는 짓이었고, 이차혁에겐 괜스레 오늘을 더욱 끔찍하게 느끼게 했다. 이은재에 대한 추억조차 제대로 터놓은 적 없었다. 마흔한 번째 무화, 하련솔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었다.

그러면서도 이차혁은 알았다. 말만 안 할 뿐이지, 똑똑한 제 친형이 과거의 매분, 매초를 꼼꼼히 기억할 것임을. 이차혁 자신이 그렇기 때문이었다.

그는 개화병에 걸렸던 날을 영화처럼 기억했다. 하반신이 마비된 채 공항에서 인근 대학 병원으로 옮겨갔던 날, 저를 보던 어머니의 표정을 그는 잊을 수 없다. 내 새끼, 내 아들… 하늬안은 그렇게 말했었다. 다 괜찮아질 거다, 엄마가 도와줄 테니까, 어떻게든 너를 고칠 거야… 상냥한 위로의 유효기간은 48분이었다. 가피 스님이 도착하기까지의 48분 동안 그는 가까스로 안심했고, 어머니의 손을 마지막으로 맞잡았다.

그러나 스님이 도착해 그녀를 병실 밖으로 데려간 뒤부터는 모든 것이 변했다. 향 냄새를 묻히고 돌아온 하늬안은 더는 그의 어머니가 아니었다. 이성을 잃어버린 황제 또한 그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그들은 병원을 통해 둘째 황자의 사망 진단서를 받아냈다.

대뜸 유령이 된 그를 끌어안은 건 이림범이었다. 먼저 올랐던 유학길에서 돌아와 그는 제 동생을 궁으로 데려갈 유일무이한 방법을 찾았다. 이차혁이라는 이름을 붙여 그를 무화로 만들었고, 일어나 걸을 수 있게 곁을 지키며 도와 주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너는 내 동생이고, 나는 네 형이라던 이림범의 말이 있었다. 그의 단단한 친절과 우애에서 우러난 간병은 모두에게 현실을 깨닫게 했다. 하반신 마비의 무화를 일어나 걷게 하는 이림범은 차기 황제이고, 개화병을 고치긴커녕 발병하여 주저앉은 둘째 황자는 이름도 출신도 지워진 신세, 무화라고….

그러니 하련솔의 말이 옳았다.

“그래요. 말할 가치도 없는 얘기예요.”

이차혁은 제 등 뒤에 딸린 이야기가 싫다. 타인이 지어낸 이야기를 들여다보고, 가상의 사건에 매료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시간을 자신 없이 보내기를 원했다. ‘이차혁’을 주어로 한 이야기엔 다음 페이지가 없기에, 저를 대신해 픽션의 다음 챕터를 넘기며 살고 싶었다.

고개 들어 마주한, 하련솔의 얼굴은 여전히 덤덤했다. 이차혁의 일그러진 표정이며 타는 눈길 따위에는 관심도 없고, 볼 줄도 모르는 그는 남에게 그러듯이 제 외모에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흐트러진 머리칼과 상기된 뺨에서 아픈 이 특유의 분위기가 풍겼다. 다른 말로 날것, 약점, 호흡이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고스란히 드러내놓으면 누구나 날카로워지게 마련인데, 하련솔은 달랐다. 헉… 헉… 큰소리로 호흡하고 망가진 얼굴을 내보이면서도 그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제 얼굴을 닦아내고 머리칼을 빗는 대신, 이차혁은 하련솔을 만졌다. 그의 젖은 앞머리를 이마 뒤로 넘겨 주고, 축축한 목을 옷 소매로 닦아 주었다. 그리고 물었다.

“그런데요, 형…. 내가 아까 고백했잖아요. 대답은 안 해줘요?”

“아, 그거…, 안 돼.”

“…….”

하련솔의 뺨에 머무르던 이차혁의 손이 뚝 멈췄다. 눈썹을 구기며 입을 벙긋거리는 그를 향해 하련솔이 말했다.

“난 물건이 아니라서 네 것이 될 순 없어.”

“…….”

“다시 생각해 보고…, 다시 말해 봐. 그럼 나도 다시 대답할게.”

그는 친절하게 제 거절의 이유를 설명하는데, 이차혁은 그 말의 뜻을 도통 이해하기 어려웠다. 제 표정을 읽을 수 있게끔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고, 오만상을 구겨 보여도 하련솔은 끄떡조차 하지 않았다. 아주 가까이 댄 얼굴의 표정조차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었다.

‘뭐야…. 원시이기까지 해?’

드물게 못난 제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있어 좋기도 하였지만, 대체로 잘난 껍데기도 보여줄 수 없음은 몹시 나쁜 일이었다. 조금 더, 눈이 잘 보인다면 좋을 텐데… 이차혁은 그렇게 바랐다. 지난날 이은재도 제 얼굴만큼은 예쁘고 귀엽다며 좋아했었다. 물 좋고 산 좋은 시골 마을에서의 여름 방학 내내 그랬었다. 그러니 하련솔도 두 눈이 회복된다면 저를 조금은 더 좋아해 줄지도 몰랐다.

‘눈… 빨리 나았으면 좋겠다.’

가만히 기도하기도 잠시, 이차혁은 이내 제 바람을 접어야 했다. 그러자면 하련솔이 온전히, 이림범의 사람이 되어야 했으므로.

***

제 사무실로 돌아가기 전, 양채림은 황제에게 USB를 하나 넘겼다. 그것만으로도 진범의 정체를 확인하기엔 충분할 터였다. 그러나 그녀는 황제가 곧바로 범인을 심판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두 손으로 건넨 소중한 자료를 낚아채듯 건네받아, 집무실 책상 서랍에 던져넣는 모습만 봐도 그랬다.

“어, 땡큐.”

빈손을 허공에 대고 허우적거리기도 잠시, 양채림은 허허 웃었다. 도무지 이림범의 속내를 알 수 없었다.

상궁으로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억 속 책장을 뒤적이는 것뿐이었다. 사무실 책장에 꽂힌 마흔한 개의 파일이 머릿속에도 똑같이 존재했다. 오늘 그녀가 꺼내어 본 파일의 책등 면에 쓰인 이름은 하련솔이었다. 하련솔의 파일은 외우기 쉬웠다. 여느 무화의 두툼한 서류와는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었다. 아주 얇고 가벼운 그의 파일에는 자기소개서랍시고 적어넣은 종이가 한 장, 의료원 의사가 검진한 내역이 또 한 장, 총 두 장이 들어있었다.

암만 기억을 되짚어 그에 대해 복기하고 또 복기해도, 양채림은 어떠한 특이점도 떠올리지 못했다. 하련솔은 그저 도화지처럼 새하얀 남자였다. 오히려 그렇기에 황제의 마음에 든 것일까… 생각하면 할수록 의문스러웠다.

하련솔에게 그나마 우호적인 상궁의 입장이 그러한데, 무화들은 얼마나 속이 타고 황당하겠는가. 개중 누구는 마음이 참 급했던 모양이었다. 굴러온 돌은 빨리 파내겠다고, 말도 안 되는 수작을 부린 걸 보니 그랬다.

‘하필 엮어도 이차혁을 엮어, 엮기를?’

거짓 음모임이 너무나 뻔히 보였다. 순순하니 개구멍에 납작 엎드려 지내는 하련솔은 당연히 무죄였고, 이차혁 또한 무고자임이 분명했다. 그에겐 따로 계략을 꾸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차혁에게 있어 이림범은 제 병을 덜어주는 형이었고, 이림범에게 있어 이차혁은 까칠한 남동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여태껏 양채림이 봐 온 그들은 그저, 사이좋은 형제일 뿐이었다.

‘옛날에는 두 분 다… 참 깜찍하셨던 것 같은데….’

천 년 묵은 능구렁이 같은 황제를 바라보며 양채림은 추억에 잠겼다.

22살 무렵, 그녀는 전대 황후의 막내 시종이었다. 당시 교태전에서 일하던 시종 전부를 하늬안이 경복궁으로 데려가면서, 황후의 보필을 위해 추가 인원을 모집하는 일이 생겼다. 그 덕분에 양채림은 남몰래, 매우 빠른 속도로 취직에 성공했다. 그 길로 문정궁은 양채림 인생 첫 직장이자, 뼈를 묻을 마지막 직장이 됐다.

양채림은 전대 황후를 무척 좋아했다. 얼핏 털털해 보여 그 성격이 멋있었고, 특출난 외모도 두말할 것 없었다. 그러나 다정한 황후를 모시게 되었다는 기쁨은 길지 않았다. 시종 일을 시작한 지 두 달 만에, 양채림은 상복을 입어야 했다.

그 시절부터 지금껏 쭉, 황실의 사정이며 황자들을 알고 지낸 시간이 13년이었다. 그래도 오늘날의 젊은 황제, 이림범의 마음은 도통 알 수 없었다.

“뭘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어? 나가 봐.”

손을 휘휘 내저으며 귀찮다는 양 저를 쫓아내는 이림범은 이상한 어른이었다. 양채림은 속에서 보글보글 끓는 질문을 애써 삼켰다. 어째서 하늬안에게 은진전을 내어주신 거냐, 가피 스님이 그곳에 드나들도록 정말로 내버려 두실 거냐는 질문은 그녀 몫이 아니었다.

‘다 계획이 있으시겠지….’

착잡한 마음으로 돌아서는 양채림을 향해 이림범이 말했다.

“나가는 길에, 박 비서 좀 들어오라고 해.”

“네, 폐하.”

도르륵… 도르륵… 트레이 바퀴 끌리는 소리를 내며 양채림이 빠져나갔다. 왔던 이가 사라져도 집무실 풍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빼곡한 책장과 어지러운 책상, 켜켜이 쌓인 서류철이 사람의 존재감을 대체했다.

서랍을 열어 이림범은 조금 전 제가 던져 넣었던 USB를 꺼냈다. 곧바로 제 노트북에 꽂아 넣고, 파일이 열리길 차분히 기다렸다.

양채림이 짐작한 것과 같이 이림범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절도 사건의 진범을 곧바로 색출하지 않는 것도 그러했고, 유년기 저를 괴롭게 한 장본인인 하늬안에게 은진전을 허락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를 움직이는 생각의 추는 상궁의 예상 범주 밖에서 돌아가고 있었다.

이림범은 하늬안에게, 달라진 문정궁을 똑바로 보여주고 싶었다. 그녀를 좋아하거나 가엾게 여겨서는 아니었다. 그가 좋아하고 가엾게 여기는 이는 제 동생, 이차혁뿐이었다. 이림범은 그런 제 동생에게 엄마를 돌려주고 싶었다. 큰 애정을 치마폭 삼아 자식을 껴안고 다니던, 징그럽게 건강한 부모라는 존재를… 그들 형제 중 한 사람쯤은 가질 자격이 있었다.

지난날, 응접실 휠체어에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은 하늬안이 가져온 선물이 수많았다. 그러나 그것들은 죄 보여주기식 치장에 불과했다. 그녀의 하나뿐인 가족이자 아들을 위한 것이라곤 무엇 하나 없었다. 하다못해 궁궐 밖 프랜차이즈 매장에서 판매하는 햄버거만 사다 줘도 행복해할 이차혁인데, 하늬안은 그에 대해 모두 잊어버린 것 같았다.

끔찍한 기억으로 뒤덮인 이곳, 문정궁에 제 발로 돌아와 면류관을 쓴 이림범이었다. 억수 같이 쏟아지던 소나기를 바라보던 날 그는 이미 마음먹었다. 제 동생에게, 그리고 그 자신에게 이곳이 집이 되게끔 만들겠다고. 그들 형제가 제대로 누리지 못한 ‘우리 집’, 사람 사는 곳으로 가꾸겠다고….

“폐하.”

생각에 잠긴 이림범을 익숙한 목소리가 흔들었다. 곧바로 검지를 움직여 그는 노트북 화면을 가득 채운 영상을 중지시켰다. 그러곤 비서를 향해, 눈길조차 주지 않고 말했다.

“무화 하련솔에게 전해라. 외출 금지형 집행을 하루 미룰 테니, 오늘 밤 내 침전에 들라고.”

그에 박 비서는 턱의 근육을 꿈틀거리는 듯하더니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네, 폐하.”

그러나 야심한 밤, 황제의 침전으로 찾아든 이는 하련솔이 아니었다. 늘 그렇듯 보여주기식으로 고운 옷을 차려입은, 그는 이차혁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