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54화 (54/135)

54.

반질반질한 얼굴을 내놓고 당당하게 선 이차혁을 발견하고, 이림범의 인상이 퍽 구겨졌다.

“…….”

“…….”

그러나 오가는 말은 없었다. 황제와 무화의 다정한 시간을 기도하는 시종들 때문이었다. 색색의 한과며 따듯한 차, 야식거리와 따듯하게 데운 술을 한 상 가득 차려놓은 뒤에야, 그들은 각자 쟁반을 품에 안고 종종걸음으로 떠났다. 시종들이 침실의 기다란 문을 한 번, 이중으로 난 복합문을 또다시 두 번 닫고 저 멀리 사라지는 발소리를 낸 뒤에야, 이림범이 입을 열었다.

“왜 네가 오냐?”

“솔이 형 불러서 뭘 어쩌게.”

조금의 차이조차 없이 동시에 내뱉은 말이었다. 각자 받은 질문을 씹느라 표정이 더욱 험악해졌다. 아주 어린 아이들처럼 이마와 뺨을 가감 없이 찌푸리며, 두 형제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걸 어떻게 전해 들었어?”

“앞으로 어쩔 계획이야? 뭘 어떻게 하려고 그래?”

각자 할 말을 뱉고서는 다시금 침묵이었다. 양반다리를 하고 풀썩 주저앉은 이차혁은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려진 색색의 과자를 보며 혀를 내두르더니, 진녹색 떡을 집어 제 입에 넣었다. 쌉싸름한 쑥 맛을 기대하였으나, 우물우물 씹자마자 속에 든 꿀이 온 입 안을 적셨다. 이차혁은 곧바로 티슈 두 장을 뽑아 입 안의 떡을 뱉어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야식이 이게 뭐야. 너무 달잖아.”

이림범은 그런 이차혁을 말썽꾸러기 꼬마 보듯 했다. 찻물로 입을 헹구며 이차혁이 말했다.

“솔이 형이 대신 가 달라고 부탁해서 온 거야. 자긴 눈치가 보여서 못 나가겠는데, 황제를 혼자 두긴 또 신경 쓰인대. 오늘 폐하께서 부른 무화는 나였던 걸로 해 줘. 총명 씨한테도 비밀로 해 달라고 했으니까.”

‘총명 씨’라는 호칭에 이림범이 한쪽 눈썹을 까딱 움직였다. 이차혁은 겉보기에 사회성 좋고 고집 없어 보였다. 그러니 저를 응원하는 박총명 비서와 쉽게 친해질 것이야 예상했던 바였다. 무화 사회 전체를 총괄하는 양 상궁만으로는 제 곁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두 전해 듣기에 무리가 있다고, 진작 판단을 마친 이림범이었다. 눈치도 일머리도 도무지 늘 줄을 모르는 박 비서를 여태 남겨둔 것도 CCTV 및 전화기 역할을 기대해서였다. 평생 마음 열고 속을 터놓을 수 있는 그 누구를 가져본 적 없기에, 그는 남을 못 믿는 만큼 통제해야 안심했다.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이림범이 물었다.

“개구멍에 솔이 형 보러 갔었어?”

“응.”

“그래…. 오해도 잘 풀었겠네.”

“응.”

“도둑맞았던 보록에서 빠진 물건은 없고?”

“없지. 누가 감히 내 걸 가져가겠어.”

“그래, 그럼….”

이차혁은 젓가락으로 튀김 요리를 뒤적거렸다. 수라간 셰프들이 만들어낸 것이라면 튀각이고 부각이고 가릴 것 없이 모두 훌륭했지만, 무엇보다 그의 입맛을 사로잡는 건 양념치킨이었다. 새빨간 양념을 갓 끼얹은 치킨 조각을 냠냠거리며 그는 새로운 소식을 아무렇잖게 전했다.

“나 솔이 형한테 고백했어.”

“뭐?”

이마를 찌푸리며 이림범이 되물었다.

“정확히 뭘 고백했단 소리야? 너랑 내가 형제인 거? 아니면, 네가 솔이 형을 좋아한다고?”

“둘 다. 형이 생각해 보고 대답해 준대.”

“…….”

이림범은 놀란 눈치는 아니었다. 별다른 충격 없이 그는 그저 탄식했다. 핏줄이 울룩불룩 돋은 손으로 눈가를 문지르는 태도가 무척 피곤한 사람 같았다. 손바닥으로 두 눈과 이마를 덮은 채 그가 말했다.

“너… 은재 형 때문에 그러는 거면….”

무거운 이림범의 목소리에 비해,

“그런 거면 뭐가 다른데?”

이차혁의 음성은 해말갰다.

“어차피 폐하, 아니… 범이 형. 형도 그렇잖아. 은재 형 생각이 나서 개구멍에 자꾸만 드나드는 거잖아. 나도 똑같아.”

주저 없이 쏟아지던 이차혁의 목소리는 점차 느리고 심각해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더… 오래 보고 싶어. 오래 지내고 싶고, 무탈했으면 좋겠어.”

결국에는 정색을 하며 경고로 말을 마쳤다.

“그러니까 막 들쑤시지 마.”

그러곤 식사하기 시작했다. 하나둘 짭조름한 야식을 집어 먹는 이차혁 앞에서 이림범은 조용했다. 눈알이 아리도록 마른세수를 하며 그는 생각에 잠겼다. 그러곤 혼잣말하듯 작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혁아. 나는 아니야.”

힐끔 눈길을 들어 이림범을 바라볼 뿐 이차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빈 잔에 술 대신 차를 따르며, 이림범은 다른 누구도 없이 혼자 있는 사람처럼 무덤덤했다. 찻물 위에 시선을 내려둔 채 그가 덧붙였다.

“내가 하련솔을 좋아하는 건, 이은재와 닮아서가 아니야.”

“…그러시겠지.”

어수선한 마음을 무표정으로 표현하는 이림범에게, 이차혁이 뱉은 대답은 그뿐이었다.

***

여러모로, 하련솔은 이림범에게 첫 경험을 안겨주는 무화였다. 개화병을 고쳐 주어도 황제를 못 알아보고 동생 취급하기로도 처음이었고, 꾀병을 부리며 만남을 피하기로도 처음이오, 입술을 맞대기로도 처음, 그랬다고 뺨을 갈기기도 처음, 직접 처소 앞까지 찾아온 그를 바람맞히기도 처음이었다.

이틀간, 이림범은 이른 아침이며 늦은 밤마다 남몰래 개구멍을 찾았다. 그리고 그때마다 하련솔은 ‘처벌을 받아 근신 중인 무화로서 감히 황제를 뵐 수 없다’며 그를 문전 박대했다. 그마저도 하련솔과 직접 나눈 대화가 아니었다. 3일간의 외출금지령도 처벌은 처벌이라고, 지은 죄 없이 벌을 받는 무화를 안쓰럽게 여기는 마음에 초롱이 내내 처소를 지키며 문지기를 자처한 탓이었다.

더군다나 그 시종의 태도가 제법 명랑했다.

“명명백백한 알리바이를 시종인 제가 증명했는데도 누명을 썼으니,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그래도 겸허한 마음으로 방에 콕 박혀 반성에 열중이니, 부디 노여워 말아 주십시오.”

허리를 꾸벅 숙이며 전달하는 말이 그러했다. 그녀의 용감한 웅변에 이림범은 어째선지 힘이 빠져버렸다. 그것이 비단 시종만의 생각이면 좋으련만, 혹여 하련솔 또한 황제께서 제게 벌을 주었다고 토라진 걸까 의심이 되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하련솔은 사흘 근신을 완벽하게 해낼 작정인 듯했다. 따로 감시하는 사람도 없건만 그는 처소 밖으로 나서지 않는 건 물론이고 손님조차 들이질 않았다. 오며 가며 웅 실장이 확인하고 보고한 바에 의하면 볼일도 요강을 가져다 놓고 보는 게 아닌가 걱정될 지경이라 했다.

인내심의 한계는 하련솔보다 이림범에게 먼저 왔다. 애당초 그 앞으로 사흘의 근신 명령을 내릴 때 이림범이 그린 그림은 이렇지 않았다. 조그만 처소에 하련솔을 가두어 놓고, 겨를이 날 때마다 찾아가 꽁냥꽁냥 시간을 보내며 개화병을 낫게 할 요량이었다. 한데 그, 하련솔이 근신 생활에 진심인지라 황제의 방문조차 제한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편편하고 딴딴하기가 계곡물에 씻긴 돌 같은 하련솔을, 이림범은 알았다. 그런 그가 며칠 내리 저를 피한들 그 행위에는 부정적인 의도가 없을 것 또한 잘 알았다. 그러나 이성이 해석하는 것과 감정이 느끼는 것은 서로 다른 기관에서 각자 처리되곤 했다. 이성은 역지사지하여, 하련솔의 입장에서 난데없이 큰 사건에 휘말려 침착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짐작했다. 반면 감정은 다른 소리를 지껄여댔다.

‘애초에 형이 날 좋아하는 것보다는 내가 형을 더 좋아하는데…. 혁이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변한 거 아냐? 대체 무슨 말을 어디까지 들은 거지? 그 바람에 혁이가 불쌍해졌나? 나를 못된 형제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결국 하련솔의 근신 사흘째 되는 날, 이림범은 이른 새벽부터 침전을 나섰다. 근신 기간만 따져서 사흘이지, 얼굴을 못 보기로는 닷새째인지라 슬슬 그의 개화병 증세가 걱정되어 참을 수 없었다. 평범한 복장으로 잠행을 나서, 그는 지름길을 가로질러 개구멍으로 향했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제 뒤로 따라붙은 웅 실장에게 명령했다.

“방해받고 싶지 않다.”

“예. 멀리 떨어져 있겠습니다.”

“웅 실장 말고, 저 시종 말이야. 대충 아무 말이나 지어내서 멀리 데려가라.”

느닷없는 명령에 웅 실장은 크게 당황했다. 무뚝뚝한 눈동자를 지진이 난 듯 흔들며, 그는 곤혹스러운 듯 처소 입구를 바라봤다. 춘추복을 차려입고 머리칼을 동여 묶은 시종 하나가 처소 초입을 싸리 빗자루로 날카롭게 쓸고 있었다. 무화의 처지가 좋지 못하니, 시종의 기분 또한 몹시도 나빠 보였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웅 실장은 초롱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러곤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그…, 수라간에서… 김치를 나누어 준다는데… 받으러 같이… 가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초롱이 얼굴을 높이 추켜들었다. 고대 신전을 지키는 석상처럼 커다란 덩치를 자랑하며 우물쭈물 선 호위 실장을 향해,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김치요? 웬 김치?”

“…오늘 김장을 새로 하는 날입니다. 저와 같이 가시면 소분 받아올 수 있습니다. 마침 점심 메뉴도 수육과 굴 요리이고… 그러니까….”

“헉, 좋아요!”

골방에 갇혀 지내는 제 무화님께 특식을 먹일 생각에 들떠, 초롱은 얼른 웅 실장을 따라갔다. 성실한 시종을 뒤에 달고 길을 나서며 웅 실장은 침울했다. 하필 떠오른 변명이 김치일 게 뭐란 말인가. 제 몫의 소중한 김치를 죄다 내어줄 생각에 속으로 피눈물이 흘렀다.

성실한 시종과 호위 실장이 떠난 자리에 싸리 빗자루만이 홀로 남았다. 휘청휘청 균형을 잡는가 싶더니 옆으로 쓰러지는 빗자루를 이림범이 덥석 잡았다. 그대로 대문 앞에 툭 기대어놓고, 그는 멀쩡한 문을 내버려 두고 담장을 넘어 처소로 침입했다.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이림범이 소리쳤다.

“이리 오너라!”

불 꺼진 복합문 앞, 좁은 쪽마루로 달려가는 행태는 황제라기보다 철부지 소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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