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55화 (55/135)

55.

부쩍 다가온 가을을 맞이하며 찬바람이 휭 날렸다. 좁다란 뜰에 맴도는 소리라곤 그게 전부였다. 얇은 복합문 너머에서는 아무 말도 들려오질 않았다.

한쪽 눈썹을 위로 추켜올리며 이림범이 재차 목소리를 냈다.

“이리 오너라?”

침묵,

“이리 오래도.”

여전히 침묵이었다.

기다리다 못한 이림범이 문고리를 덥석 잡았다. 그러자 묵묵부답이던 사람이 응답을 들려주었다.

“들어오지 마.”

조곤조곤한 목소리에 졸음이 섞여 있었다. 까치집을 하고 새벽잠에서 깬 하련솔을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 이림범은 싱글벙글했다. 처소 주인의 경고를 가볍게 무시하며 문고리를 당기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의 침입을 허락하며 활짝 열리던 복합문이 오늘은 덜컹 소리를 내며 제자리에서 흔들렸다. 안에서 걸쇠를 단단히 걸어 잠근 것이었다.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채, 이림범이 말했다.

“형. 이거 열어.”

“안 돼. 들어오지 마. 나 오늘까지 근신이야.”

“아주 단단히 잊은 모양인데, 그 근신 명령을 내린 황제가 나야.”

“황제든 아니든 안 돼….”

이림범의 표정이 부지불식중에 변했다. 기대한 것과 전혀 다른 소리에 그는 웃음기를 모두 잃어버렸다. 대번에 무표정했고, 딱 그만큼 심기가 비틀렸다.

“이차혁이 뻔히 드나든 걸 다 아는데, 왜 나만 안 된다는 거야?”

동생의 이름을 대며 그와 저를 비교하려니 이림범은 더럭 기분이 나빠졌다. 기분이 나빠지니 성질이 더러워졌다. 그 바람에 참았던 말이 불쑥 솟구쳤다.

“그냥 날 좋아해 주면 된다니까, 그러지 못하겠어?”

꾸중하는 듯 엄한 목소리며 진지해진 분위기에 당황한 듯, 문짝 너머의 하련솔이 목 울리는 소리를 냈다. ‘으음’ 하는 그 소리는 그저 흘린 소음일 뿐 제대로 된 대답이 아니었다. 때문에 이림범은 더욱 강하게 제가 했던 말을 되짚었다.

“내가 말했잖아. 형이 할 일은 나를 좋아해 주는 것뿐이라고. 내가 형의 눈을 다 고쳐주겠다고. 나를 그것조차 못하는 무능한 황제로 만들 셈이야?”

이토록 애태우는 기색을 비칠 계획 따윈 없었다. 어른스럽고 차분한 하련솔의 박자에 맞추어 제 어리숙한 열렬함을 감춰볼 작정이었다. 황제가 아닌 나찰사 노릇하며 찾아온 게 그 이유에서였고, 깜찍한 시종을 슬금슬금 달래어 멀리 보낸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문전박대 한 번에 이림범은 바닥난 인내심을 탈탈 털리고야 말았다.

“범아.”

하련솔이 속삭였다. 그조차 제 나쁜 점을 지적하는 듯 느껴지기에, 이림범은 재차 문고리를 거칠게 당겼다.

“이거 열어.”

“안 된다고 말했잖아.”

“이거 열고, 그냥 내 품에 안겨. 형은 받기만 하면 돼. 그럼 서로에게 좋잖아. 형의 눈도 다 낫고, 배도 더 부르고, 등도 따듯하게 해 줄게. 내가 다 해 줄게.”

“…….”

성화로 시작한 말이 차츰 애원으로 변했다. 세게 당겨 댄 탓에 헐거워진 문고리에 검지와 중지를 걸고서 이림범은 고개를 푹 숙였다. 까만 머리칼이 퉁, 소리를 내며 복합문에 기대어 붙었다.

딸깍딸깍… 문고리를 위아래로 움직여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이림범이 다시 물었다.

“대체 뭐가 문제야?”

“…….”

“뭐 때문에 망설이는 거야?”

“…….”

그로서는 도무지 하련솔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입장이 되어 생각하고 싶었다. 그의 생각을 제 생각처럼 이해하고 싶었다. 그런데 불가능했다. 세상 사람들 모두 제 입장을 봐 달라, 이해해 달라 토로하기 바쁘건만 하련솔은 황제인 그에게조차 제 속내를 똑바로 내보이질 않았다.

침울해진 황제를 향해, 복합문 너머의 야속한 무화가 말했다.

“범아. 어제만 해도 몇 명이나 내 처소를 감시하러 왔는지 알아?”

난데없는 소리에 이림범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의금부를 통해 반나절 간격으로 보고 받기로, 하련솔의 처소 근방을 오가는 누구에게도 특별한 행적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심심한 소식을 전할 적에 의금부 팀장의 표정이 시무룩했다. 여러 무화, 혹은 그들의 하수인이 우르르 모여들어 작은 처소에 깽판을 쳐 놓거나, 하다못해 하련솔에게 군소리를 하리라 예상했더랬다. 황명에 따라 그에 어찌 반응할까도 지정된 상태이건만, 꼬박꼬박 황제를 찾아가 보고하는 말에는 그다지 성과가 없었다.

잠시간 폭발적으로 민원을 넣던 무화가 숱했건만, 어째선지 하나같이 하련솔을 잊은 듯 조용해진 상태였다. 그가 절도죄를 덮어썼고, 황제로부터 외출금지령을 받았다 하니 잠시간 상황을 지켜보는 중인지도 몰랐다.

한데 하련솔이 제 처소를 감시하러 온 이들이 있다고 말해 오니 이림범은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혹여 제가 알아내지 못한 나쁜 무리가 있는가, 그들이 의금부의 눈을 피해 계략적으로 하련솔을 괴롭히는가 싶었다.

“누가 형을 못살게 굴어? 어떤 놈들이야? 몇 명이나 다녀갔는데?”

예민하게 캐묻는 이림범의 말에 하련솔이 즉각 답했다.

“세 명이나 왔다 갔단 말이야.”

“…세 명?”

그에 이림범은 제 귀를 의심했다.

“서른 명도 아니고… 꼴랑 세 명?”

평소 쓰지도 않던 방언에, 터져 나오는 실소를 섞어 되물었다. 그러자 하련솔은 목소리를 더욱 단단히 굳혔다.

“그 정도도 나한텐 말도 안 되게 많은 관심이야. 여태까지 문정궁에서, 이 처소에서 지내면서… 나를 견제하거나 감시하러 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 혁이가 가끔 찾아온 게 다였지.”

예상치 못한 말에 이림범은 어리둥절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지 의문스러웠다. 막말로 상판을 들고 번화가만 걸어가도 수십, 수백 명이 뒤돌아보게 생긴 하련솔이었다. 얼굴뿐만 아니라 성격 또한 매력적이었다. 유들유들하니 마냥 다정한 사람 같다가도 강인하고 굳센 데가 있었다.

“아무도 날 신경 쓰지 않아.”

그런 하련솔이 어울리지 않는 말을 뱉었다.

“특별히 기억하지도 않고… 알아보지도 않아.”

이림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련솔이 진지하게 건넨 말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긴 했다. 그러나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는 하련솔이 대뜸,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했다.

“범아. 그런데 네가 이렇게 자주 나를 찾고, 좋아하고, 이런 것들이….”

이림범의 눈앞에서 복합문의 나무 무늬가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렸다.

“…나는 잘 모르겠어….”

이내 그의 머리 위에 바위가 쿵 찍혔다. 들려온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해보려 마른침을 연신 삼켰다. 그런들 입안이 바싹 마르고 혓바닥이 사막의 모래처럼 퍼석해질 뿐 들이닥친 불안을 걷어내긴 역부족이었다. 이림범이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은 딱 하나였다. 하련솔이 터무니없는 핑계를 대며 저를 거절하고 있다는, 가장 나쁘고 속상한 결론.

“…….”

소리 없이 입을 빠끔거리며, 이림범은 목구멍 위로 치미는 말을 솎아내고 또 솎아냈다. 솔직히, 나는 여태 형이랑 연애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나는 여태, 정말이지 그렇다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사실은 아니었던 거야? …야바위 마술에 속은 어린애처럼 투정하고 싶기도 했다. 형이랑 나랑 좋아하는 마음이 서로 통했고, 부둥켜안고 하룻밤을 함께 보냈고, 영화를 보며 데이트도 했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나 잡아 봐라 놀이까지 했잖아? …게다가 입까지 두 번 맞추질 않았던가. 하고픈 말은 차고 넘치도록 많았다.

그러나 긴긴 머뭇거림 끝에 나온 말은 가난했다.

“형은… 나를… 좋아하지 않아?”

작게 흘러나온 목소리에 하련솔이 ‘어?’ 하고 되물은 것도 같았다. 대답이 돌아오기까지 짧은 침묵을 못 참고, 이림범은 질문을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대체 내 어떤 점이 형을 그렇게 불안하게 해? 내가 너무 찾아와서 귀찮아졌어? 내 행실이 많이 못 미더워? 아니면 혹시, 혁이가 이상한 소리를 했어? 그것도 아니면… 나 자체가 문제인 거야? 그래서 그래?”

“잠시만…. 범아. 뭐라고?”

빠르게 왜곡되는 질문을 멈추어 보려 하련솔이 허둥지둥 목소리를 냈다. 그래도 이림범의 질문은 그치지 않았다.

“내 어디가 잘못됐어?”

“아냐, 범아….”

“그럼 그냥 내가 싫어? 내가 나인 것 자체가 싫어?”

“아니…. 아니야, 왜 그런….”

이내 하련솔이 버럭 소리 질렀다.

“너 왜 그런 소리를 해?”

크게 터져 나온 말에 이림범이 우뚝 멈췄다. 구역질을 마친 사람처럼, 입 안을 채운 침이 온통 시큼했다. 인상을 찌푸린 채 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무턱대고 제 안에 담긴 말을 쏟아낸 일이 후회됐다. 그 바람에 하련솔을 당혹스럽게 한 것 같았다.

복합문 가까이, 하련솔은 무릎 쓸리는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그러더니 다시금 말했다.

“그런 거 아니야, 범아. 그런 소리 하지 마.”

두 번, 세 번을 연이어 ‘정말 그런 것 아냐’, ‘네 잘못은 없어’ 반복하는 목소리가 단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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