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푹 숙였던 고개를 들고, 이림범은 제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저도 모르는 새 그는 벌 받는 사람처럼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두 손은 핏대가 울퉁불퉁 불거지도록 주먹을 꽉 쥔 상태였다. 얼떨떨한 마음에 구부렸던 손가락을 서서히 펴는데, 내내 힘이 들어간 탓에 손마디가 다 얼얼했다. 손바닥 살갗 중앙에 네 개의 손톱자국이 깊었다. 오른손에는 부러진 문고리까지 들려 있었다.
이내 복합문 너머에서 짧은 날숨소리가 들렸다. 한숨도 아니고 그저 그렇게 내쉰 호흡도 아니었다. 묘한 숨소리에 속상한 기색이 담긴 듯했다. 꿇린 무릎 위에 손바닥을 문질러 닦아내며, 이림범이 사과했다.
“미안해. 헛소리해서.”
“…….”
그러나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입을 꽉 다물고 이림범은 자책했다. 안달이 나고 속이 상해, 제가 미쳤었나 보다 싶었다. 하련솔은 단 한 번도 이림범을 욕한 적 없었다. 그는 이림범의 어떤 부분도 깎아내리고, 문제 삼고, 타박하지 않았다. 이성으로는 이림범도 알았다. 제 존재 자체가 문제라며 저를 탓하는 말들일랑 과거의 메아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형.”
이림범의 부름에,
“응.”
하련솔이 대답했다.
복합문 너머에서, 하련솔은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암흑을 바라보며 그는 마른 입술을 혀로 훑었다. 꺼질 줄 모르는 불처럼 속을 태우는 이림범에게 어떤 말이건 해 주고만 싶었다. 납득받을 수 있게끔 제 불안을 설명하고, 먼지처럼 피어 오른 오해를 모두 털어내고 싶었다. 그러나 제 감정을 말로 형용하기가 너무나 어려웠다.
하련솔은 진솔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진면목일랑 진흙에 파묻힌 조개 속에 존재했다. 그것이 돌인지 진주인지 아무도 몰랐다. 여태껏 누구도 그를 발견한 적 없고, 그의 입을 열게 한 적 없으며, 비밀을 털어놓도록 긴밀한 소통을 바란 적 없기 때문이었다. 긴 시간 홀로 살아온 탓에 하련솔은 자기 고백을 해 본 경험이 없었다. 제 속내를 터놓은 일이라곤 그나마 이림범에게, 정확히는 지난날 나찰사에게 알려준 과거 이야기가 전부였다.
결국에는 그저 그런, 흔해 빠진 말을 건네야 했다.
“시간을 좀 줘…. 아직은 생각할 시간이 더 필요해.”
흔한 표현이라 해서 말 자체가 쉬워지진 않았다. 그건 그만큼 어찌할 바 모를, 각자의 사정에 매몰된 이들이 숱하단 의미이기도 했다. 하련솔이 그랬고, 이림범이 그러했다.
결국 이림범이 졌다. 복합문에 입을 가져다 붙인 채 그가 대답했다.
“알… 았… 어….”
“…너무 시무룩하지 말고.”
“알았어….”
불편하게 꿇었던 무릎을 펴며 이림범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좁은 쪽마루에 커다란 몸을 구겨놓고 있자니, 양반다리를 하고 얇은 문짝에 바짝 기대어야만 했다. 너른 어깨를 겨울잠 자는 곰처럼 꽉 웅크리고서, 그가 말했다.
“앞으로 형을 만날 땐 나찰사가 될게. 형이 그게 편하다면 나를 그렇게 불러도 좋아. 나는 상관없어. 남들 모르게 찾아오는 거 어렵지 않아…. 침전으로도 형만 딱 집어 부르지 않을게. 방문할 차례가 되거든 자연스럽게 부르도록 내버려 둘게.”
“범아….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돼.”
“그렇게 하지 않으면, 형이 자꾸 도망치잖아.”
“…….”
“나를 피해서 숨어버리고 나를 미치게 만들잖아.”
30초 전에는 ‘알… 았… 어…’ 라더니, 곧바로 성화로 가득 찬 원점으로 돌아간 이림범이었다. 사람을 구워 먹을 것처럼 뜨거운 성미를 느끼며, 하련솔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풀어내 보려, 그는 어렵사리 농담했다.
“며칠 못 본 걸로 엄살은….”
작은 속삭임에 이림범이 웃었다. 어깨를 떨며 큭큭 웃는 소리가 무척 낮았다. 심란하던 얼굴에 스민 웃음기를 마른세수하며 닦아내는데, 그 기척이 복합문 너머로는 전달되지 않는 듯했다.
이림범의 반응을 확신하지 못해, 하련솔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범아. 아직 문 앞에 있어?”
“응.”
이림범의 대꾸는 무척 빨랐다.
“이리… 가까이 와 볼래?”
“응.”
시키는 대로, 그는 순한 개처럼 움직였다. 단단히 닫혔던 복합문이 아주 작은 틈을 만들며 열리기에, 그쪽으로 주춤주춤 상체를 기댔다. 이내 껌껌한 방 밖으로 하얀 손 하나가 뻗어져 나왔다. 몇 초간 더듬더듬, 허공을 짚어보는 듯하던 손은 그대로 멈췄다. 제 오른손바닥을 내밀어 보이면서, 하련솔이 말했다.
“머리 좀 줘 봐.”
그러자 융단처럼 보드라운 결을 자랑하는 머리칼이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들었다. 이림범이 제 머리를 아주 바짝, 박치기하듯 가져다 붙인 것이었다.
이어지는 동작은 워낙 잔잔해서 썰렁할 지경이었다. 하련솔은 이림범의 정수리를 쓰담쓰담 만져 주었다. 그게 전부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불안감에 질식하기 직전인 젊은 황제를 달래기엔 충분했다.
“…….”
“…….”
아무 말 없이 이림범은 눈을 감았다. 그러곤 부드러운 손바닥에 더, 더욱 가까이 제 머리를 들이밀었다. 칭찬받길 좋아하는 큰 개처럼 손바닥으로 파고드는 동작에 하련솔은 잠시 주춤거리다가, 아예 문틈 새로 두 손을 내밀었다. 그러곤 곱게 정돈한 황제의 머리칼이 죄 흐트러지도록 열정적으로 만져 주었다. 그 손길이 귀엽고 또 사랑스러워, 이림범은 웃었다.
그러나 하련솔의 손이 이림범의 귀에 닿자마자, 기분 좋은 침묵은 흐트러지고야 말았다. 그 순간 이림범은 두 눈을 번쩍 떴다. 소심하게 열린 복합문을 활짝 밀어젖히며 그는 방 안으로 상체를 들이밀었다. 다리는 쪽마루에 두고, 두 팔은 방 안으로 쏟아지다시피 하며 붙잡은 건 하련솔의 얼굴이었다.
“야…!”
깜짝 놀라 소리치는 하련솔의 얼굴이 온통 뜨거웠다. 스치듯 이림범의 귀에 닿았던 손에 감돌던 것과 같은, 더운 열 기운이 그의 전신을 점령하고 있었다.
아픈 몸을 끌고 하련솔은 애써 뒤로 물러나려 했다. 도망치려는 하련솔의 허리를, 이림범은 허둥지둥 부여잡았다. 식은땀에 젖은 상의를 꽉 움켜쥐며 이림범이 외쳤다.
“들어가지 않을게!”
그대로 와락 붙든 옷깃을 잡아당기자, 하련솔의 몸이 손쉽게 끌려왔다. 두 팔 뻗은 황제의 품 안에 푹 파묻혀 안기기도 순식간이었다. 고집스러운 이림범의 팔에 단단히 묶여버려, 하련솔은 더운 숨을 몰아쉬었다.
“들어가지 않을게…. 열만 내리게 해 줘. 그 정도는 해도 되잖아.”
속닥속닥 바삐 설득하며, 이림범은 하련솔의 목덜미를 큰 손으로 움켜쥐어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거구의 황제를 못 이겨 하련솔은 얌전해졌다. 빠르게 지쳐버린 몸을 이림범에게 온전히 내맡긴 채 그는 느린 숨을 헥헥거렸다.
미간을 찡그리며 이림범은 하련솔의 어깨와 등허리, 팔뚝을 바삐 쓰다듬었다. 목소리가 나긋나긋하고 힘없이 들리기에, 새벽잠이 덜 가신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닷새 동안 개화병 증세가 심해지고 열이 올라, 호흡기 자체에서 지치고 낡은 소리가 난 것이었다. 이런 몸을 하고선 저를 문밖에 두려 했다니, 그 고집이 참 대단하고 또 야속했다.
“눈 감아, 형.”
제 어깨에 닿는 하련솔의 뺨을 느끼며, 이림범이 속삭였다.
“금방 빛이 보일 테니까….”
“응.”
하련솔의 대답은 아주 짧았다. 그러나 그 짧은 음성조차 전에 비해 크고 또렷하게 들렸다. 초를 다투며 호전되는 숨소리에 마음이 흐뭇해져, 이림범은 하련솔을 아주 꽉 끌어안았다. 그러다가도 약한 형의 몸 어디가 부러질까 봐 애써 힘을 풀어야 했다.
가느다란 목덜미를 손아귀에 감싸 쥐고서, 이림범은 제 품 안에서 퉁퉁 뛰는 하련솔의 심장 박동을 느꼈다. 그 작은 기척마저 집어삼키고 싶단 열망은 홧홧하고 쉬웠다. 그러나 남은 평생의 모든 아침, 또 모든 밤에 이 소리가 함께하길 바라는 마음은 뭉근하고도 어려웠다.
하련솔의 콧김, 한숨, 심장 박동을 귀로 좇으며 이림범은 두 눈을 내리감았다.
‘이것 봐….’
그리고 내심, 지난날 뱉었던 말을 되새김질했다.
‘은재 형이 생각나서… 그래서 좋아하는 게 아니야. 난 그냥….’
이내 그는 하련솔의 소리를 놓쳐 버렸다. 제 이마 위로 불거진 핏줄이며 갈빗대 아래, 귓불 너머 가릴 것 없이 맥박이 내달리는 통에, 제 심장 박동이 너무도 시끄러워 하련솔의 소리와 분간되지 않았다.
“솔이 형.”
전신 구석구석이 터질 것처럼 벌렁벌렁 뛰면서, 동시에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난 그냥, 형이… 형이어서 좋아.”
그러면서 이림범은 확신했다. 이제 더는 이은재의 꿈을 꾸지 않을 것이라고. 절간의 창고 방에 갇힌 꿈을 꾸지 않게 된 지 이미 오래였다. 타닥타닥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가 시끄럽던 장마의 끝자락, 살창 틈새로 얼굴을 비추며 저를 부르는 이은재도 이제는 볼 일이 없다.
오늘 그의 꿈에 나타나, 그를 흔들고 또 그만큼 그를 달래는 남자는 하련솔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