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57화 (57/135)

57.

요즘 초롱은 귀엽지 않다. 재밌지도 않고 상냥하지도 않다. 전용 탈의실에 딸린 샤워장에서 몸을 씻고 나오자마자 들려오는 뒷담화가 그러했다.

“초롱이 건드리지 마. 걔 요새 예민해. 담당 무화 때문에 벌써 며칠째 집에도 못 갔잖아.”

“진짜…? 도둑놈이 성질까지 더러운가 봐? 안 됐다.”

마주치기만 하면 ‘무화랑 잘 지내서 좋겠다’, ‘나랑 담당 좀 바꿔 줘라’ 운운하던 이들이 이제 와 말이 많았다. 초롱은 예민한 것이 아니라 잘잘못을 제대로 따질 줄 알 뿐이었고, 며칠째 야근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아무런 외압도 받은 바 없었다. 오히려 하련솔은 저녁 시간만 되면 초롱을 퇴근시키지 못해 안달이었다. ‘집에서 가족들이 널 기다리지 않겠느냐’며 어깨를 떠미는 식이었다. 정작 그런 하련솔은 응접실로 호출 한 번 받아본 적 없기에, 세상천지 혼자 같은 그를 챙겨 주고자 개구멍 쪽방에서 잠을 잔 게 초롱의 야근이었다.

솔직히 말해 초롱은 무척 성질이 난 상태였다. 하련솔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따져보자면 도리어 좋은 편이긴 했다. 절도죄를 덮어쓰고도 사흘 근신으로 처벌이 끝났고, 그 기간 내내 황제께서 여섯 번이나 처소에 찾아와 관심을 비추셨으니 말이었다. 남들이 기대하는 것과 같은 애정전선의 문제 따위는 없었다. 진짜 문제는, 초롱이 자리를 비운 새 다른 누군가가 그녀의 일터요 그녀의 구역에 침입했단 데에 있었다.

‘염병할 보록을 숨기러, 감히 우리 처소에 기어들어 와? 재수 없는 새끼 같으니라고! 걸리기만 해, 아주!’

전방위 모든 시종에게 매정하게 구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마흔 명의 무화 가운데 누군가 계략을 꾸몄더라면, 직접 움직이지 않고 담당 시종을 이용했을 게 불 보듯 뻔했다. 그렇기에 초롱은 동료 시종을 볼 때마다 눈에 불을 켜고 행동거지를 빈틈없이 살폈다. 제 손으로 거미줄을 떼고, 쪽마루 홈을 메우고, 너덜거리는 창을 교체하며 쓸고 닦은 ‘우리 처소’를 어지럽힌 놈이 누구이건 간에 손가락을 분질러줄 계획이었다.

사라진 보록을 찾느라 의금부 직원들이 한바탕 들쑤시고 지나간 통에 식기류까지 못쓰게 되어 버렸는데, 새것으로 교체했다 해서 무조건 좋아할 게 아니었다. 눈 대신 손을 쓰는 하련솔에겐 새 반상, 새 그릇, 새 젓가락의 미세한 길이 차이조차 불편으로 다가왔다.

그 생각을 하니 다시금 뿔이 나, 초롱은 탈의실 캐비닛을 쾅, 소리 나게 닫았다. 그러자 이러쿵저러쿵 험담하던 소리가 뚝 그쳤다. 그들이 함부로 품은 오해를 풀어 줄 마음 따윈 없었다. 초롱은 도톰한 삼회장저고리를 얼른 걸치고, 전통 첩지를 본뜬 기다란 핀을 머리 꼭대기에 콕 집었다. 그대로 거울을 보자, 핀에 달린 조그마한 개구리 장식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깨 너머에 선 무화 또한 동시에 시선을 마주쳤다.

“뭘 봐요?”

초롱이 날 선 목소리를 내자 그녀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러곤 초조한 사람처럼 입술을 두어 번 달싹거리다가 이렇게 말했다.

“너 힘든 거… 나는 이해해…. 어…, 동병상련 같은… 그런 거? 힘내, 초롱아.”

그러더니 곧바로 탈의실을 떠나버렸다. 미간을 찡그리며 거울을 바라보기도 잠시, 초롱은 그녀의 이름을 어렵사리 기억해냈다. 여름에도 손가락장갑을 끼고 다니던 무화, 윤슬찬의 담당 시종 ‘보리’였다. 윤슬찬의 포악한 성질을 받아 주느라 그녀는 늘 의기소침했고, 눈 아래 살은 상시 팥죽색이었다. 평소에도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기에 오늘 건네 온 느닷없는 응원도 이상하진 않았다.

‘그래도 의심스러운데?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하련솔의 처소로 바삐 걸음을 움직이면서 초롱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곤 시종장과의 개인 채팅방을 열고, 메시지를 툭툭 입력했다. 절도 사건이 일어났던 9월 12일, 시종 보리의 야근 기록이 있는지 확인해달란 말을 남기기 위해서였다.

그러면서 초롱은 대여섯 개의 단체 채팅방을 휙휙 살폈다. 개중 눈여겨볼 것은 스물네 살 동갑내기 시종들이 모인 채팅방의 공지사항이었다. 황제 폐하의 일정에 관한 새 소식이 별 다섯 개와 함께 최상단에 걸려 있었다.

번쩍 눈을 빛내며 초롱은 얼른 개구멍 처소로 달려갔다. 그리고 저의 무화님, 하련솔을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세요, 솔 님! 당신은 이제 자유의 몸입니다! 근신 핑계로 누워만 있는 것도 오늘부턴 안 통해요!”

부쩍 친해진 덕에 꾸벅꾸벅 조는 이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고, 보들보들한 머리칼을 빠르게 빗겨 주고, 한 대접 물을 떠 와 세수시키고 코까지 풀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선물 포장하듯 옷을 입혔다. 눈이 부셔서 아프다는 핑계조차 댈 수 없게 미리 준비한 선글라스를 씌워 주었고, 오한이 들어 춥다고도 할 수 없게 통통하게 누빔이 들어간 버선을 신기고 내의 위에 토시를 끼게 했다.

“초롱아…, 나 졸려….”

“비타민D가 부족해서 그런 겁니다. 햇볕에 보송보송하게 몸 좀 말리자고요.”

마침내 하련솔이 컴컴한 침실 밖으로 움직였다.

외출금지령을 받기 전후를 따지자면 그의 행동반경에는 1cm의 차이조차 없었다. 그러나 어떤 일이건 자발성의 유무에 따라 받아들이기가 천지 차이인 법이었다. 지난 사흘간, 혹여 제 무화께서 기죽었을까 싶어 초롱은 열심히 그를 격려했다.

“내내 가만히 계셔서 그런가? 다들 솔 님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거 같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처소에 계시는 것보다 아예 밖에서,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계시는 게 오히려 눈에 덜 띌 수도 있어요. 솔 님이라면 가능해요!”

남이 들으면 이상해할 설득도 하련솔에겐 맞는 말이었다. 초롱의 밝은 목소리를 따라 하련솔은 허허 웃었다. 그러곤 그녀의 팔을 잡고 느릿느릿 걸었다. 햇볕을 받아도 눈이 아프지 않아 기분이 좋았다. 어제 이림범이 저를 찾아와 안아 준 덕분이었다. 선글라스 너머로 희미하게나마 땅과 하늘, 나무의 윤곽을 볼 수 있기도 했다.

초롱은 하련솔을 연못 옆 정자 자리로 데려갔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어 시간을 확인하려는데, 뜻밖에 전화가 걸려 왔다. 발신인 ‘시종장님’ 네 글자를 확인하자마자 초롱은 하련솔을 그늘 밑 벤치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말했다.

“솔 님. 여기에 꼭, 꼬옥, 꼬오옥 붙어 계세요. 곧 황제 폐하께서 이 길로 지나가실 거거든요. 오늘 중요한 일정이 있으셔서 외출하신다고 그랬거든요. 여기서 가만히 기다리세요. 꼭이에요!”

그러곤 휴대폰을 귀에 붙이고 종종걸음으로 물러섰다. 얼핏 서로의 모습은 보이되 목소리는 들리지 않을 거리에 선 초롱을 살피며 하련솔은 실소했다.

‘어쩐지…. 목표가 다 있었네.’

오늘 산책의 목표를 알고 나니 허탈한 웃음과 한숨이 나왔다. 그러면서도 하련솔은 제자리를 지켰다. 황제를 보러 온 일이, 솔직히 말해 좋긴 좋았다. 바로 어제 이 시각에는 이림범을 서운하게 하지 않았던가. 마음도 태도도 열정적인 그가 얼마나 속이 상했으면, 다시 저를 나찰사라 부르라며 제가 숨어다니겠다 제안했을까 싶었다. 덩치도 크고 힘은 장사 같은 황제이지만, 그 속에 든 것은 덜 자란 소년이었다.

그래서인지 하련솔은 매번 그를 달래 주고 싶었다. 불같은 관심을 마주할 때면 도망가고 싶다가도, 상처 입은 동물처럼 조심스럽게 접촉해 올 때면 선뜻 받아 주게 되었다.

어제는 상처를 입혔으니 오늘은 약을 발라 줄 차례였다. 그가 제게 바라듯이, 저도 남들 앞에서 그와 알은체하고 싶었다. 우연을 가장해 산책로에서 만나, 배웅 정도는 해 주어도 될 것 같았다. 누구에게 잘 다녀오라고 인사하는 일이 무척 간만이었다.

이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눈을 아주 가늘게 뜨고 먼발치를 살피길 한참, 하련솔은 선글라스를 벗었다. 손바닥을 차양 삼아 다시금 빤히 바라보자 검은 옷을 차려입은 아주 커다란 남자의 형태가 보였다. 양옆으로 붙어선 직원 둘과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오는데, 정장 위에 걸친 도포 뒷자락이 용 꼬리처럼 펄럭거렸다. 홀로 뚜렷한 그의 존재감이 남들 수백 배는 되는 듯했다.

황제를 알아보자마자 하련솔은 근방을 휙 둘러보았다. 두어 명씩 붙어선 이들이 야금야금 보일 뿐 큰 무리나 소란은 없었다.

긴 다리로 빠르게 움직이며, 황제가 정자 가까이 다가왔다. 하련솔은 앉은 자리에서 얼른 일어났다.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는, ‘범아’ 하고 인사하려 입을 빠끔 열고, 오른손을 들었다. 이림범이 가볍게 곁눈질하며 그를 한 번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대로 지나쳐 떠나버렸다.

“…….”

짧은 순간 모자란 시력으로, 하련솔은 그의 무뚝뚝한 얼굴을 분명히 보았다. 여태껏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낯선 기류 또한 똑똑히 느꼈다. 남들 앞이라고 일부러 무시한 게 아니었다. 그럴 정도의 인지조차 하지 못한 듯했다. 그가 누구인지, 얼굴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생판 남이라고 착각하여 쉽게 지나친 게 분명했다.

놀란 표정을 못 감추며 하련솔은 이림범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황제를 대신하여 뒤를 돌아보는 이는 회색 정장을 입은 낯선 직원이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 느낌이 들기에 하련솔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선글라스를 다시 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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