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이내 하련솔은 이곳에 있을 이유를 잃어버렸다. 벤치 자리에 꼭, 꼬옥, 꼬오옥 앉아 기다리라던 초롱의 경고도 잊어버렸다. 멍한 정신에 그는 낯선 산책로를 비틀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온통 혼란스러웠다, 여태껏 저를 잊어버리는 이들은 무수했음에도. 무서웠다, 이림범만큼은 남들과는 다른 태도로 저를 대해 주었기에….
‘범이는 황제잖아. 엄청 바쁘잖아…. 야외에서 지인을 못 알아보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야.’
애써 마음을 다잡으려 하였으나 시도에서 그쳤다. 두 손이 워낙 떨리는지라 두루마기 앞섶조차 제대로 잡아 쥘 수 없었다. 의미 없이 걷기를 얼마나 했을까, 하련솔은 화단 옆의 낮은 바위에 풀썩 주저앉고야 말았다.
그래도 근방에는 그를 눈여겨보는 이가 없었다. 오늘 황제의 착장이며 외모를 두고 수다 떨기 바쁜 무화가 여럿이었으나, 하나 같이 하련솔의 앞을 휙휙 지나쳤다. 충격에 잠겨 주저앉은 하련솔은 안개 취급이었다.
결국 혼자다.
돌이켜보면 지금껏 이림범이 저에게 관심을 품고 먼저 다가온 것이 기적이었다. 긴 시간을 유령처럼 살아온 입장에서, 젊은 황제 이림범이며 화려한 무화 이차혁의 눈길을 받아온 게 차라리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니 오늘 이림범의 외면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크게 상처받을 건더기조차 되지 못한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자마자 하련솔은 난처해졌다.
‘여기가 어디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는 왔던 길을 되돌아 걷기 시작했다. 지금쯤 초롱이 왁왁 소리치며 저를 찾고 있을 거라 생각됐다. 문제는 몸의 상태였다.
‘그렇게 놀라면 안 되는 거였는데….’
감정적인 충격의 여파가 약골 육체로 번졌다. 흉통이 꽉 조이고 어깨가 저릿저릿했다. 팔을 잘못 움직였다간 담에 걸려 쓰러질 게 분명했다. 떨리는 손을 두루마기 소매 안에 감추고,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인 채 하련솔은 느리게 걸었다. 그것만으로도 헐떡헐떡 숨이 거칠어졌다.
다시 정자의 벤치 자리로 돌아왔을 때, 하련솔은 마라톤을 뛴 사람처럼 땀에 젖어 있었다. 구부정하게 상체를 숙이고 숨을 고르다 보니 저 멀리서 메아리 같은 목소리가 솔 님… 솔 님… 하고 들려왔다. 고개를 들고 살피자 사방팔방을 두리번거리며 달려오는 초롱이 보였다.
그녀를 향해 하련솔은 손을 번쩍 들었다. 발표하고 싶은 초등학생처럼 팔을 들고 기다리자, 초롱이 허둥지둥 다가왔다.
“솔 님! 대체 어딜 가셨…. 세상에! 땀 좀 봐.”
하련솔을 이리저리 살피며 초롱은 미안해 어쩔 줄을 몰랐다. 제가 멋대로 끌고 나와, 쌀쌀한 공기를 쐰 탓에 아픈 줄로 착각하고서 연신 사과했다. 몸이 저린 이유는 따로 있기에 하련솔은 괜찮았다. 오히려, 저를 알아보고 이름을 불러 주는 초롱에게 감사했다.
“폐하랑은 인사 잘 나누셨어요?”
부축해 주며 건넨 질문에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인사 잘했어.”
돌이켜보면 어제 아침, 이림범이 방문해 주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그가 선물한 깊은 포옹이 아니었더라면 하련솔은 지금쯤 시들시들하다 죽어버렸을 수도 있었다. 의심 한 올 없이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아팠다. 제 처소로 돌아가 침상에 누운 뒤에는 밥을 먹을 기운조차 없었다.
그러곤 종일 잠을 잤다. 기절하듯 가까스로 잠들었다가 어렴풋이 깨어난 오후에는 익숙한 통증이 하련솔을 반겼다. 나른한 빛줄기조차 눈알을 쑤시는 바늘 같아, 얼른 눈을 가려야 했다.
“아야야야….”
기운 없이 신음하며 하련솔은 베개에 고개를 처박았다. 빛을 차단해 보려 베개 깊숙이 얼굴을 숨기는 그를 보고, 초롱이 후다닥 움직였다.
“그러다 숨 막혀서 죽겠어요!”
초롱은 꽉 닫힌 창 위에 무렴자를 걸었다. 세로로 누비 진 두툼한 무렴자는 겨울용 보급품으로, 아직은 지급할 때가 아니라며 버티는 세답방 직원을 가까스로 설득해 얻어온 커튼이었다. 흔한 꽃무늬 대신 불을 삼키는 해태가 새겨진 무렴자를 단단히 치자 방 안이 비로소 껌껌해졌다. 온전한 어둠에 눈이 익기까지 몇 분의 시간이 걸릴 정도였다.
“솔 님, 솔 님…. 이제 괜찮아요.”
침상 옆자리에 앉아 초롱은 하련솔의 이마를 물수건으로 닦았다. 하련솔은 초롱으로 하여금 ‘내가 남자였더라면 좋았을 텐데’ 바라게 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사내였더라면 그의 목욕 시중도 도울 수 있었을 테니 말이었다. 그러나 초롱에게도 사내 못지않은 능력이 있었다. 그것은 축 늘어진 하련솔을 거뜬히 부축해 옮기는 힘이었다.
“끙!”
초롱은 젖은 이불 위에 늘어진 이를 따듯한 온돌 자리에 옮겨주고, 축축해진 침구를 빠르게 갈았다. 재차 하련솔을 보송한 자리에 눕혀주자 그의 잇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고마워, 초롱아….”
그녀는 하련솔의 이런 점을 좋아했다. 매일 같이 ‘미안해’ 대신 ‘고마워’ 하고 인사하는 점이 초롱을 무척 기운 나게 했다.
“괜찮아요. 솔 님. 또 무얼 도와드릴까요? 뭘 먹고 싶으세요? 아니면, 뭘 보고 싶으세요?”
감기 기운이 도는지 하련솔은 정신이 멍했다. 이불 안에 있는데도 몸이 춥고 팔다리가 으슬으슬 떨렸다.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그는 말을 삼켰다. 먹고픈 것은 따로 없지만, 보고픈 것은 있었다. 이림범이 보고 싶었다.
하련솔이 다시 눈을 떴을 땐 깊은 밤이었다. 그를 흔들어 깨우는 초롱의 태도가 부쩍 명랑했다. 그녀는 하련솔의 머리를 빠르게 빗기고, 젖은 수건으로 얼굴과 목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고운 옥빛 철릭을 입혔다. 촘촘한 하단 주름이 치맛자락처럼 펼쳐져, 움직일수록 예쁜 옷이었다.
“다행이에요. 침전에서 연락이 왔거든요. 오늘 밤 솔 님께서 폐하의 침전에 드실 차례래요!”
그제야 하련솔이 낯빛을 밝혔다. 문득 이림범이 했던 말을 떠올리기도 했다. 다짐하듯 읊었던 말 그대로, 따로 하련솔을 꼬집어 부르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순서상 차례가 되었으니 자연스레 침전으로 오라 하니, 힘든 와중에 반가운 소식이었다.
애써 기운 내어 하련솔은 처소를 나섰다. 아침의 기억은 짧은 악몽처럼 흐려진 상태였다. 대신에 따듯한 기대감이 하련솔을 채웠다. 형, 형… 하며 저를 찾는 이림범이 보고 싶었고, 크고 다정한 그의 침전도 그리운 참이었다. 그의 옆자리에 누워 하룻밤을 보내고 나면 열 기운도 두통도 씻은 듯 나을 것만 같았다.
잔기침을 하며 걷기를 한참, 하련솔은 멈추어 섰다. 희미한 시야로 저 멀리 침전의 불빛이 보였다. 거인이 붙잡고 찢은 것처럼 가로로 기다랗게 번지는 빛을 올려다보며 하련솔이 말했다.
“초롱아. 너 이제 퇴근해.”
황제의 침전에 들고 나면 내일 아침까지는 처소로 돌아갈 일이 없으니 건넨 소리였다.
“에이, 들어가시는 거만 보고 갈게요.”
“언제는 무화가 혼자 찾아가야 하는 길이라며?”
저 때문에 벌써 며칠째 쪽잠을 자는 시종이 가여워, 하련솔은 단단하게 말했다.
“들어가 봐. 얼른.”
그러자 초롱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련솔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빗겨준 뒤, 그녀는 좋은 밤 보내시라는 인사를 마지막으로 퇴근길에 올랐다. 타닥타닥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하련솔도 다리를 움직였다.
기침이 연신,
“콜록, 콜록….”
목젖을 두드리며 올라왔다.
마침내 침전 앞에 도착하자, 익숙한 목소리의 호위 실장이 그를 맞이했다. 기침하며 비틀거리는 하련솔을 똑바로 세워주며 그가 물었다.
“감기 기운이 있으십니까?”
“네? 네….”
손등으로 하관을 가리며 하련솔이 답했다. 그러다가도 침을 잘못 삼켜 사레가 들렸다.
“콜록! 컥…, 켁….”
켁켁 기침하는 그의 어깨를 웅 실장이 거듭 붙잡았다. 어지간해선 무화에게 손을 대선 안 됐지만, 제 눈앞에서 자빠지는 꼴을 보는 것보다야 부축해 주는 게 훨씬 나은 일이었다. 그러면서 웅 실장은 약한 데자뷔를 느꼈다.
‘가만. 전에도 이랬었는데….’
그대로 잠시간 고민하다, 웅 실장은 그를 굵은 기둥에 기대어 세웠다. 그러곤 홀로 침전으로 뛰어 들어갔다.
근래 황제 폐하의 최대 관심사인 무화 하련솔이었다. 평소 같았더라면 들쳐업어서라도 침전 안으로 들였겠으나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박 비서가 전해 준 말도 안 되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오늘 아침, 폐하께서 산책로에서 마흔한 번째 무화와 마주쳤는데 그를 대놓고 외면하시더라느니, 아무래도 그들 사이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느니….
‘그러니 웅진 씨도 조심하십쇼. 폐하의 심기가 매일 같이 오락가락한데, 줄을 잘 타야지 않습니까?’
줄을 타도 폐하의 줄을 타야지, 애먼 무화의 줄을 타느냐고 대꾸한 게 두 시간 전 일이었다. 웅 실장은 수다쟁이 박 비서가 알려주는 소식의 태반은 믿질 않았다. 그러나 전과 같이 기침하며 휘청거리는 하련솔을 보자니, 당장 그를 돌려보내야 하는 건지 냉큼 들여야 하는 건지 헷갈렸다. 전과 같이 돌려보냈다가는 함부로 무화를 소박맞히느냐고 두 번째 시말서를 쓰게 될 것 같은데, 냉큼 들이자니 그들 사이가 틀어졌다는 소식이 못내 거슬렸다.
성큼성큼 움직여 황제의 침실 앞에 도착한 웅 실장을 위해 시종들이 문을 열어주었다. 너른 방의 한가운데에, 이림범은 대나무 발을 쳐놓고 탁상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정면에는 서류 한 묶음이 놓였고 좌측으로는 태블릿PC 화면이 환했다. 창백한 빛이 그의 얼굴 반절을 밝히고 있었다.
가벼운 침의 차림인 황제를 향해, 웅 실장은 고개 숙이며 말했다.
“폐하. 무화 하련솔이 침전 앞에 왔습니다. 그런데 기침을 심하게 하고, 열 기운이 있다는데 어찌할까요?”
그러자 곧바로 돌아온 질문이 뜻밖이었다.
“개화병 증세라더냐?”
그 즉시 웅 실장은 이상 기류를 느꼈다. 얼굴을 번쩍 들어 살펴본 이림범은 아무런 표정도 짓고 있질 않았다. 헐렁하게 주먹 쥔 손가락 위로 태블릿 전용 펜을 굴리며 잔일에 한참이었다.
하련솔의 개화병 증세가 어떠한지야, 누구든 그에게 알려 줄 필요가 없었다. 무화 하련솔에 대하여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이림범 본인인 터였다. 한데 왜 굳이 질문을 건네는가 싶었다. 따로 의중이 있어 저를 시험하시는가 싶어, 웅 실장은 우선 사실대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아무래도 이른 감기에 걸린 듯합니다. 부쩍 날씨가 쌀쌀해진 터라….”
하련솔과 관련된 일이라면, 특히나 그가 아프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순간에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할 이림범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웅 실장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그는 태블릿 액정 위로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전자 서류 하단에 서명을 갈겨 적더니, 돌처럼 얼어있는 웅 실장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그럼 돌아가라 해라.”
염려하는 기색도 어투의 고조도 없이 건넨 말에, 웅 실장은 얼빠진 대거리를 내뱉고야 말았다.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