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59화 (59/135)

59.

황당하다는 듯 이림범이 내쉰 한숨이 깊었다. 그에 웅 실장은 제 실수를 깨닫고 얼른 뒷짐을 지고 섰다. 젊은 황제의 얼굴에는 짙은 피로감이 가득할 뿐, 근래 들어 왕왕 보여주던 소년 같은 면모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로부터 아주 미세하고 얇은 한 겹의 변화가 느껴지건만 웅 실장은 도무지 그게 무어인지 콕 집어 말할 수 없었다.

“내 말이 잘 안 들려, 웅 실장?”

이림범이 물었다. 질문이 아닌 타박임을 알기에 웅 실장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여 보였다. 서류와 펜을 툭 소리 나게 내려놓고 이림범은 제 눈가를 손 끝마디로 지압했다.

“무화더러 돌아가라 전하라고 했다. 그러잖아도 바빠 죽겠는데, 지금 내게 잔병치레할 겨를이 있어 보이느냐?”

“아, 아닙니다. 폐하.”

발소리 없이 다가온 시종들이 탁상 주변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결재를 마친 서류를 모두 넘겨주며 이림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여상스럽게 명령했다.

“양 상궁에게 전해라. 내일 그 무화에게 의사를 보내주고, 감기가 낫거든 침전에 들 수 있게 순서상 편의를 봐주라고.”

침상으로 향하는 그의 손에 가벼운 서류철과 태블릿PC가 들렸다. 외투를 준비해 온 시종이 종종걸음으로 그를 쫓아가, 커다란 어깨 위로 중치막 가운을 걸쳐주었다. 금빛 윤이 반들반들한 너른 소매가 황제의 팔뚝 옆으로 길게 늘어졌다.

“오늘은 좀 편히 잘 수 있겠군…. 불 끄고 다 나가 봐라.”

침상에 들며 그리 말하기에, 웅 실장은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주무십시오, 폐하….”

그리고 침전의 불이 꺼졌다. 침상 자리에 앉은 이림범을 비추는 작은 등 불빛만이 희미했다. 대나무 발에 의해 파쇄되기라도 한 듯 줄줄이 뜯겨 나온 빛줄기를 바라보며 웅 실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래 들어 하련솔을 아끼다 못해 그에게 옴팡지게 빠져서는, 사방천지가 뜯어말려도 그를 껴안고 불구덩이로 뛰어들 것처럼 굴던 황제께서 왜 변심하신 건지 알 수 없었다. 마음이 안 맞는 일이 있어 크게 싸우기라도 한 걸까 싶었다.

그러자니 하련솔이 가여웠다. 황제의 말을 최우선으로 따르는, 황제의 호위 실장 김웅진에게도 측은지심이 있었다. 침전에 들어 쉬고픈 마음이 간절한 환자를 매정하게 돌려보내는 일이 쉬울 리 없었다. 영 모르는 사이라면 또 다르겠으나, 하련솔의 시종과 친해진 바람에 입장이 찝찝해진 것이다. 갓김치 받는 줄에 나란히 선 아침에 그 시종이 어찌나 제 무화님 자랑을 하던지, 그녀 말에 따르면 하련솔은 무척 좋은 사람 같았다. 그에 대해 피상적으로 알 뿐인 제 마음도 이리 불편한데, 황제께서는 도대체 무슨 일로 그를 외면하시는가 싶었다.

무거운 걸음을 끌고 침전 밖으로 나서는 웅 실장의 뒷모습이 시무룩했다. 고뇌로 가득 찬 그의 머리 꼭대기를, 테라스에 선 박 비서가 내려다봤다. 금연 중인지라 담배 대신 민트 맛 껌의 포장지를 벗겨내던 손을 멈추고, 그는 두 눈을 끔벅거렸다. 멀찍이 선 무화를 돌려보내는 웅 실장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어어’ 하고 둔한 감탄사를 흘리기도 했다.

단단한 껌이 물컹해지도록 어금니로 짭짭 씹으며 그는 휴대폰을 꺼내 쥐었다. 그대로 메시지 입력창을 열어두고 고민하기도 잠시, 새로운 소식을 적어넣기 시작했다. 수신인은 이차혁이었다. 연락처를 받아놓고도 할 말이 없어 안부 한 번 나눠본 적 없는 그에게, 처음으로 기쁜 소식을 보내줄 차례였다. 폐하께서 무화 하련솔에게 질리신 듯하다고, 침전으로 찾아온 아픈 이를 그냥 돌려보내시더라고….

***

밤 산책을 핑계로 처소에서 빠져나와, 이차혁이 향한 곳은 황제의 침전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로부터 바람맞은 마흔한 번째 무화, 하련솔의 조그마한 처소였다.

개구멍으로 향하는 길에는 따로 가로등도 설치되어 있질 않았다. 야밤에 걷자니 궁궐 안인지 야산인지 분간되지 않을 정도였다. 저린 무릎을 무시하며 바삐 향하던 중 이차혁이 눈살을 좁혔다. 저 멀리 느릿느릿 움직이는 사내의 뒷모습이 보였다.

치맛자락처럼 팔랑팔랑 움직이는 철릭의 뒷자락이며 축 늘어진 옷 소매 때문에 그는 행인이라기보다 유령 같았다. 그를 향해 빠르게 다가가며 이차혁은 제 외투를 벗었다. 도톰한 장옷은 곧바로 홀로 걷는 유령, 하련솔의 어깨에 둘렸다. 대뜸 저를 끌어안는 옷가지 감촉에 놀란 듯 하련솔이 제자리에서 팔딱 뛰었다.

“나야, 형.”

이차혁이 속삭였고,

“아… 아아.”

하련솔은 무척 낯선 목소리를 흘렸다.

“안녕.”

쌀쌀한 저녁 바람을 오래 쐰 탓에 쉬어버린 음성으로 그가 인사했다. 이차혁의 얼굴은 누군가 밟아 부순 과자처럼 와그작 구겨졌다. 손길과 목소리로 저를 알아볼 뿐, 하련솔의 눈동자가 온통 탁했다. 그마저도 무척 졸리고 지친 사람처럼 감길 듯 말 듯 하여 제대로 살펴볼 수 없었다.

이차혁은 하련솔에게 제 외투를 단단히 둘러주며 그의 어깨를 바짝 끌어안았다. 곱상한 옷을 차려입고 깨끗한 얼굴로 선 하련솔이건만, 손바닥에 감기는 어깨의 감촉은 포대 자루에 든 마른 나뭇가지 같았다. 힘없는 이에게 누가 불을 붙였는지 열기가 홧홧했다.

“…열이 많이 나네.”

홀로 서보려는 듯 애써 허리를 펴는 하련솔을, 이차혁은 손길로 설득했다. 제 몸 가까이 끌어안고, 한 손으로 그의 허리를 받쳐주며 부축하고자 했다. 몇 발짝 어색하게 움직이는가 싶던 하련솔도 금세 그에게 기대어 붙었다. 부축받는 일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부축을 받지 않고서는 도무지 제 처소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이차혁의 뺨에 닿는 밤공기가 차가웠다. 열이 끓는 하련솔에겐 더더욱 추운 밤이었다. 한데 하련솔의 걸음걸이가 워낙 느리고 숨이 가빠, 도통 빨리 이동할 수가 없었다.

“헉…, 헉….”

흙바닥 위에 끄적끄적 발자국을 남기며 하련솔은 색이 빠진 입술을 빠끔거렸다. 그 바람에 이차혁은 애가 탔다. 하련솔을 업고 뛰고픈 마음이 굴뚝 같았다. 두 다리가 멀쩡했더라면 그랬을 터였다. 그러나 그는 남을 업고 뛰기는커녕 혼자서도 힘껏 뛸 수 없는 무릎을 갖고 있었다.

애써 힘주어 걸으며, 이차혁은 하련솔의 관자놀이에 제 하관을 붙였다. 그대로 입 맞추다시피 하며 뭉개진 발음으로 물었다.

“형. 무슨 일 있어? 폐하랑 싸우기라도 한 거야?”

“아냐, 그런 거….”

하련솔의 대답은 그저 덤덤했다.

“범이가 바빠서 그런 거지, 뭐….”

애써 황제를 이해하려는 그의 말이 무척 비루하게 느껴졌다. 초라해 보이는 하련솔의 모습에 이차혁은 가슴이 죄였다.

이림범과 멀어지는 그의 모습을, 솔직히 상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내심으로는 바라오기도 했다. 이림범이 관심을 거두고 하련솔이 홀로 남으면, 이차혁은 당장에 하련솔을 가질 자신이 있었다. 그는 하련솔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이길 원했다. 하련솔을 제 사람으로, 제 것으로 삼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상상과 사뭇 달랐다. 이차혁의 상상 속 하련솔은 이토록 기운 없이 시들지는 않았다. 그를 보는 제 마음이, 원인도 모르고서 저릿저릿 아프지도 않았다.

가까스로 개구멍 처소에 다다라 하련솔은 쪽마루에 몸을 앉혔다. 풀썩 주저앉더니 더는 움직이질 않았다. 신을 벗지도 못하고, 방 안으로 들어서지도 못했다. 안도한 듯 앉은 자세 그대로 두 눈을 감고 색색거리는 게 전부였다.

이차혁이 그 앞에 쪼그리며 몸을 낮췄다. 잘 굽혀지지 않는 왼쪽 다리는 옆으로 펴고, 오른쪽 다리만 구부린 희한한 자세였다. 불편하게 허리를 숙이고서 그는 하련솔의 신발을 벗겨주었다. 연홍색 매화 자수가 놓인 신이 완전히 새것이었다. 황제를 뵈러 가는 길이라 처음 꺼내 신은 것인지, ‘265’ 치수가 쓰인 스티커가 뒤꿈치에 붙어있었다.

꾸벅꾸벅 조는 하련솔을 흔들어 깨우며, 이차혁이 물었다.

“형. 의료원에 가는 게 낫지 않겠어요? 아니다, 내가 다녀올게. 해열제라도 좀 가져다줄까?”

그는 급한 마음에 말을 쏟아내는데, 하련솔은 미적미적 상체를 돌리더니 복합문을 열었다. 그러곤 침실 안으로 상체부터 미끄러뜨렸다.

“괜찮아, 괜찮아…. 좀 자야겠어….”

뱀처럼 기며 방 안으로 들어서는 하련솔을 눈으로 좇으며, 이차혁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 나니 달리 해줄 일이 없었다.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인사하는 게 전부였다.

“응…. 쉬어요, 형.”

어둡고 작은 처소에 감도는 기운이 쌀쌀했다. 복합문 너머 컴컴한 방의 온도는 야외와 다를 바 없었다. 황제의 침전에서 밤을 보낼 예정이었으니 온돌도 꺼 버렸고 시종도 퇴근한 뒤였다.

창백해진 손으로 제 턱을 어루만지며 이차혁은 안절부절못했다. 개화병에 걸리고 처지가 돌변했다곤 하나, 언제고 하수인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아온 이차혁이었다. 타고나길 황자요 지내기를 서열 높은 무화인 그는 구들방 데우는 방법을 몰랐다. 그렇다고 하련솔의 처소로 제 시종들을 불러 부리자니 뒷말이 돌 게 뻔한 터라 곤란했다. 아예 제 처소로 하련솔을 데려가자니 그건 더욱 안 될 일이었다.

어찌하나 갈등하며 속 태우는 그를 향해, 덜 닫힌 방 안에서 빠져나온 목소리가 닿았다.

“혁아.”

“네, 형!”

반사적으로 버럭 외치다시피 대답하며, 이차혁이 쪽마루로 다가갔다. 어둠 안에서,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바닥에 드러누운 하련솔이 보였다.

“나… 책 좀 읽어줄래?”

못내 반가운 소리였다. 이차혁은 활짝 미소 지으며 얼른 방 안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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