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60화 (60/135)

60.

이차혁은 복합문을 단단히 닫았다. 방 한편에 차곡차곡 개어놓은 이불을 펼쳐 하련솔의 몸 위에 두툼하게 덮어 주기도 했다. 그러곤 마음 급한 도둑처럼 방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조그마한 협탁 안에 티슈, 점자책, 손난로가 순서와 각을 맞추어 나열되어 있었다. 장식이 소박한 보록 안에는 풀린 올이 너덜너덜한 개구리 인형만 들어 있었다. 달그락달그락 소음을 내며 열어본 서랍장 속에 드디어, 비타민을 비롯한 영양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차혁은 한참 시간을 들인 끝에야 시럽 형태의 해열제 병을 찾아낼 수 있었다. 방 안이 바깥보다 어두운 탓이었다. 무릎으로 기다시피 하며 침상으로 다가가, 그는 병의 뚜껑을 열고 하련솔의 턱을 잡았다.

“형. ‘아’ 해요.”

그대로 병 입구를 아랫입술에 대주자, 하련솔이 고개를 내저었다. 제가 직접 들고 마시겠다며 이불 밑에 깔린 손을 꺼내려는 것을 이차혁이 만류했다.

“얼른요.”

병 입구로 재차 입술을 꾹꾹 누르자, 하련솔이 황당하다는 듯 실소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차혁은 그의 벌어진 잇새에 병을 밀어 넣었다. 그대로 병을 기울여주자, 하련솔은 시럽 약을 반은 삼키고 반은 흘리며 꿀꺽꿀꺽 들이켰다.

다시금 협탁 문을 열어 이차혁은 티슈를 찾았다. 서너 장 뽑아다가 턱에 묻은 약을 닦아주려는데, 감각이 없는 건지 무언지 하련솔이 고개를 돌리며 거절했다. 열 기운과 잠결에 취해 정신없는 그를 이해하기에 이차혁은 손을 거뒀다.

그러곤 원고지 뭉치를 집어 들었다.

“이제 책 읽어줄게요. 어떤 장면까지 봤어요, 형?”

“혁아.”

대답 대신, 하련솔은 이상한 질문을 건넸다.

“…너는 나 안 잊을 거니?”

“응? 뭐라고요?”

난데없는 소리에 제 귀를 의심하며 이차혁이 원고지를 내려놓았다. 그새 어둠에 눈이 익어, 며칠 새 수척해진 하련솔의 옆얼굴을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피부가 워낙 희고 안색이 창백한 탓에 그의 얼굴은 검은 종이 위에 오려 붙인 백지 같았다. 이차혁은 그 앞으로 아주 바짝 다가갔다. 시들시들 잠들기 직전인 하련솔의 입 앞에 고개를 대고, 가까이 귀 기울이기 위해서였다.

색, 색… 벌써 잠들었는지 깊은 숨소리를 들려준 끝에 하련솔이 말했다.

“나 잊지 마….”

짧은 당부에 이차혁의 몸이 우뚝 굳었다. 허리 숙인 자세 그대로 그는 얼어붙어 버렸다. 그대로 한참을 석상처럼 멈추어 있다, 그는 천천히 하련솔의 얼굴을 살폈다. 맥없이 감긴 눈가로 삐죽 빠져나온 눈물방울이 보였다. 그마저도 힘이 없어 오래 흐르지 못하고 콧대에 고였다. 기절하듯 잠들어 색색거리는 숨결에도 물성이 가득했다.

하련솔은 몹시 서글프고 외로워 보였다. 지독하게 외로워 보였다.

충동을 못 이겨, 이차혁이 입을 열었다. 그러곤 소리 없이 하련솔의 입술을 삼켰다. 잠든 이의 뺨을 받치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영문 모를 외로움에 질리고 이름 모를 감정에 사무쳐 이차혁은 벌벌 떨었다. 벌벌 떨면서 잠든 이의 입술에 제 입술을 내리눌렀다.

“…….”

그러곤 엉망진창으로 찌푸린 얼굴을 하련솔의 어깨에 풀썩 파묻었다. 커다란 동물처럼 웅크린 상체로 그는 잠든 이를 덮었다. 가슴이 타는 것 같아 숨이 막혔다. 이대로 하련솔을 핥고, 깨물고, 삼키며 독식하고 싶었다.

그런 와중에도 입가에 감도는 해열제 맛이 익숙했다. 토 나오게 친숙하고 빌어먹게 잘 아는 맛이었다. 이전에도 백 번 천 번 먹어본 해열제였다. 전날 약을 먹었음에도 열이 떨어지지 않는 아침이면 살고픈 의지가 얼마나 꺾이는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흐으….”

이를 갈며 이차혁이 신음했다. 잠든 이의 가슴팍에 뺨을 문지르며 한참 동안, 그는 병증 대신 감정을 앓았다. 그러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애써 뒤를 돌아보지 않으며 그는 조그마한 처소 밖으로 뛰쳐나갔다. 벗어놓은 부츠에 두 발을 욱여넣고는 빨리 뛰기 시작했다. 무릎이 금세 아리고 정강이뼈가 시큰했다. 다리의 통증이 커질수록 가슴 안의 감정에도 열이 올랐다. 뜨거워질 대로 뜨거워진 상태로 도착한 곳은 불 꺼진 황제의 침전이었다.

깜짝 놀란 얼굴로 저를 보는 호위 실장도, 냉큼 허리 숙이는 시종도 죄 무시하며 이차혁은 빠르게 걸었다. 황제의 침전 문을 제 두 팔로 벌컥 열어젖히며, 그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대체 뭐 하자는 거야?”

그러자 대나무 발 너머의 황제, 이림범이 보였다. 그는 작은 등불에 의지하며 서류철을 살피던 손을 우뚝 멈췄다. 금빛 가운을 어깨에 걸친 모습이며 여상스러운 태도에서 여유와 카리스마가 넘쳐흘렀다. 고개 들어, 대뜸 들이닥친 이차혁을 확인하면서도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이차혁을 화나게 했다.

“내가 갖고 싶다고 해서 그래? 그래서 골이라도 난 거야? ‘다 망가지는 꼴을 보고 네 주제를 알아라’, 뭐 그런 소릴 하고 싶은 거냐고!”

“갑자기 쳐들어와선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말해.”

“형이야말로 알아듣게 말 좀 해 봐!”

그러자 이림범이 한쪽 팔을 들었다. 황제의 손짓을 확인하고, 시종들이 얼른 침전 문을 닫았다. 그러곤 타닥타닥 발소리를 내며 바삐 물러났다. 그제야 이림범이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나무 발을 팔로 밀어 걷으며, 그는 낮은 목소리로 제 동생을 타일렀다.

“혁아.”

그 편편한 태도에 이차혁은 기가 막혔다. 침전에 감도는 훈훈하고 따듯한 기운이 차가워진 그의 몸을 녹이고 있었다. 그 바람에 신경이 더욱 곤두섰다. 이토록 너른 방 한편에 하련솔을 뉘어두는 게 뭐가 그리 어려웠나 싶었다.

태어날 때부터 이차혁의 인생에 존재해 온 이림범이었다. 어른들의 사정이 어찌 되었건 간에 그들 형제 사이는 언제나 좋았다. 그런 형의 모습이 오늘처럼 낯설기로는 처음이었다.

“내가 솔이 형 좋아한다고 했지, 형더러 절대 만나지 말아 달라고 그랬어? 들쑤시지 말라 그랬지, 다 죽여놓으라고 그랬냐고! 아니잖아.”

“…솔이 형?”

“형, 대체 왜 이래?”

버럭 성질을 쏟아내던 중 이차혁이 얼굴을 굳혔다. 이마에 구김이 지고 눈살을 찌푸린 표정 그대로 그는 눈을 두어 번 깜빡거렸다. 그리고 당황했다. 이림범의 표정이며 반응이 영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둔한 얼굴로 서서는, 그는 ‘솔이 형’ 하고 들은 말을 곱씹었다. 그게 누구인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제 동생이 이토록 화를 내는지, 정말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뭐야, 진짜 왜 그래? 기억 상실이야? 대가리에 총 맞았어?”

이차혁의 어투가 금세 달라졌다. 성화보다 걱정이 더욱 커져, 그는 얼른 이림범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제 형의 머리통을 두 손으로 붙들어 쥐었다. 좌로 우로 흔들며 상처가 있는지 확인했고, 멍하니 끔벅거리는 두 눈동자를 똑바로 살폈다.

감각이 둔해진 사람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던 끝에, 이림범이 말했다.

“솔이 형?”

까맣게 죽어있던 눈동자에 번뜩 빛이 들었다. 오래도록 숨을 참았던 사람처럼 드는 대뜸 ‘허’ 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곤 중얼중얼 혼잣말했다.

“그래…, 솔이 형…. 내가 방금, 무화를 돌려보내라고, 무화 하련솔을….”

누군가 이림범을 활시위에 끼워 넣곤 세게 잡아당긴 게 틀림없었다. 그런 믿음이 생길 만치 빠른 속도로, 그는 침의 차림새 그대로 뛰쳐나가 버렸다.

“아, 형!”

황제의 어깨에서 바닥으로 떨어진 커다란 중치막을 집어 들고, 이차혁이 그를 따라 달려 나갔다. 침전 대문을 지나 밤길을 내달리는 이림범은 백색 짐승 같았다. 새하얀 침의 차림으로 미친놈처럼 뛰는데, 어찌나 빠른지 흰 빛깔이 얼룩처럼 번질 지경이었다. 누가 보았더라면 해태 석상이 살아 날뛰는 줄 착각하고도 남을 터였다.

헉헉거리며 이차혁은 그의 뒤를 쫓았다. 어리둥절한 감정을 떠안고 내달리느라 숨이 막히고 다리가 아팠다. 그러다 불쑥 무릎이 휘는 느낌이 들었다. 별수 없이 그는 이를 악물고 속도를 늦추었다.

“아, 씨…. 헉…, 허억….”

빠르게 멀어지는 이림범을 그는 차마 따라잡을 수 없었다. 어릴 적부터 이림범은 달리기가 빨랐다. 궁궐 안이고 산길이고 가리질 않고 어디에서건 잘 뛰었다. 쏜살처럼 내달리는 형을 쫓던 어린 날, 이차혁은 자주 이를 갈곤 했었다. 언젠가 제가 자라 어른이 되면, 그때는 형을 달리기로 이겨볼 것이라고 말이었다. 이제는 흐려진 지 오래인 다짐이었다.

터덜터덜, 관성에 의해 몇 발짝 움직이다 이차혁은 걸음을 멈춰 세웠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울상이 된 채 그는 제자리에서 발을 굴렀다. 답답한 속을 토로할 방법이 따로 없었다. 잘한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잡는 게 전부였다.

오늘 이차혁이 하련솔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더는 없었다. 영양가 없는 소설을 읽어주는 것보다야, 황제의 품에 한 번 안기는 게 훨씬 좋을 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언젠가 하련솔에게 최악의 순간이 닥쳐온다면, 이차혁은 그와 함께해 줄 자신이 있었다. 저도 그런 날을 겪어보았다고 자부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림범이 존재하는 한, 이차혁이 꿈꾸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러한 나락으로 하련솔이 떨어지지 않게 잡아줄 수 있는 유일한 이, 황제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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