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하련솔은 백색 삼각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게 뭘까… 멍한 정신으로 곰곰이 생각한 끝에, 그는 그것이 제 이마에 올려진 물수건의 끄트머리라는 걸 알아차렸다.
이어 눈동자를 모로 굴리자 타인의 손이 보였다. 큼직하고 번듯한 손이 유리 대접에 든 수건을 첨벙첨벙 적시고 있었다. 더러워진 손에서 재와 먼지를 닦아내느라 흰색 수건이 회갈색이 되어 버리고, 그릇을 채운 물도 구정물이 됐다.
문득 코끝으로 고소한 냄새가 감돌았다. 견과류 냄새와 비슷하긴 한데 음식에서 풍기는 것은 아니고, 물성을 지닌 공기를 못 이겨 바닥으로 가라앉는 그을음의 향기였다. 그러고 보니 등이 따끈따끈했다. 뜨겁게 데워진 온돌에서 풍기는 냄새가 비로 인해 짙어진 모양이었다.
그제야 제 옆자리에 놓인 손이 이해됐다. 누군가 저를 위해, 없는 솜씨로 아궁이에 불을 지피느라 손을 더럽히고, 간호를 해 주느라 곁에서 밤을 새우는 모양이었다. 그런 그의 손이 아주 크고 두껍다.
‘좋은 꿈이네.’
하련솔은 그렇게 확신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사람의 손이 제 눈에 보일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런 꿈이라면 이어 꾸어도 좋았다. 중도에 깨고 싶지 않았다. 어렴풋이 들려오는 빗소리를 외면하며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속절없이 잠들어 버린 하련솔의 뺨을 향해, 이림범이 손을 뻗었다. 그러다가도 찬물에 젖은 손이 그에게 오한을 안겨줄까 봐 얼른 거뒀다. 제 침의 바짓단에 문질러 닦아낸 손을, 그는 침상 이불 아래에 숨기듯 집어넣었다. 손끝까지 후끈하게 열기로 데운 뒤에야 하련솔을 만질 수 있었다.
손 끝마디에 닿는 하련솔의 뺨은 무척 부드러웠다. 놀라울 만큼 약한 몸을 가진 그는 하룻밤 사이에도 눈에 띄게 여위어 이림범을 마음 아프게 했다. 깊은숨을 묵묵히 내쉬며 그는 새근새근 잠든 이의 뺨을 어루만지고, 땀에 젖은 목을 닦아주고, 이불 위를 토닥토닥 도닥였다. 그러는 내내 시선은 하련솔의 얼굴에 고정했다.
반듯한 눈썹이 일자를 그리며 길게 뻗었다. 내리감은 눈두덩이가 넓고 둥글어서, 눈을 감은 채로도 눈이 커 보였다. 아래로 길게 뻗은 속눈썹은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으로 젖어 군데군데 뭉쳤다. 그 바람에 더욱 색이 짙고 선명해 보였다. 그를 점령한 설움과 아픔이 그를 더욱 예뻐 보이게 만든다는 건 참 불가해한 일이었다.
지쳐 잠든 얼굴이 달 조각 같다.
‘내가 미친 건가?’
어둠 한편에 앉아 이림범은 홀로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형을 다른 무화와 헷갈렸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하련솔의 손이 하얗다. 손가락이 길고 색이 고와 겉보기에 참 예쁜데, 맞잡고 유심히 살펴보면 군데군데 흉터가 많고 굳은살도 박여 있다. 다섯 손가락을 염주 만지듯 보듬자니 울퉁불퉁한 감촉이 반복해 느껴졌다.
늦게나마 찾아와서 참 다행이었다. 이림범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련솔을 괴롭히던 열 기운이 순순히 사라져 다행이었고, 가을비 내리는 소리가 요란한 밤에 그를 홀로 두지 않을 수 있어 또 다행이었다. 제가 없었더라면 하련솔은 차갑게 식은 처소에 누워 홀로 병을 앓았을 텐데, 그토록 싫어하던 비까지 내리니 이 밤이 얼마나 길었겠는가. 그에게 싫은 기억을 안겨줄 뻔했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다 철렁했다.
“…응.”
하련솔이 대뜸 말했다. 꿈을 꾸는지, 꾹 다문 입술 끝을 꿈질거리며 낸 작은 침음성이었다. 그 소리에 이림범이 작게 웃었다.
그제야 마음이 진정되어, 이림범은 침의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꺼진 아궁이에 불 지핀 탓에 옷 소매며 바지 무릎이 지저분했다. 젖어 버린 장작과 진흙을 다 치우고, 새 장작을 태우느라고 흘린 땀자국도 얼룩으로 남았다. 불같이 급한 제 성격 탓인 걸 어쩔 수 없었다. 마른 장작을 구하러 간 웅 실장을 기다릴 인내심조차 없어, 제 손으로 불을 피우고야 만 황제였다. 그나마 바지 주머니에 숨어있던 휴대폰은 몰골이 말짱했다.
한 손으로 하련솔의 손을 꼭 쥐고, 다른 한 손으로 대충 만진 휴대폰은 갖은 알람으로 채워져 있었다. 전화도 여러 통 걸려 왔고 메시지 또한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개중 우선으로 확인한 것이 웅 실장이 보내온 메시지였는데, 밤새 문밖을 지키고 있을 테니 필요하시거든 부르라 했다.
‘빗속에서 무슨 놈의 청승이야?’
크게 목소리 내어 어디 창고에라도 들어가 있거라 명령하려다가, 하련솔이 깰까 싶어 그만두었다.
다음으로 박 비서가 보내온 연락이 눈에 들어왔다. 무화 이차혁이 제 처소로 잘 돌아갔다는 보고 뒤에, 오늘 소란의 후유증이 없게끔 시종들의 입단속을 잘 시키겠단 말이 함께였다. 딱히 그럴 필요는 없다고 답장하려다 귀찮은 마음에 그만두었다.
그대로 무심결에 시선을 내렸다가, 이림범은 우뚝 멈췄다. 하련솔의 커다란 갈색 눈동자와 똑바로 시선이 마주친 것이었다. 언제부터 깨어 있었는지 놀란 기색 하나 없이, 하련솔은 무표정한 얼굴에 아주 빤한 눈길로 이림범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색하고 미안한 마음에 이림범이 입을 벙긋거렸다. 그러나 먼저 말을 걸어온 이는 하련솔이었다.
“폐하께서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듣는 이 애달프도록 쉰 목소리로 뱉는다는 말이 그랬다. 공손하기 짝이 없는 존댓말이, 이림범에게 와 그의 가슴을 퍽 쳤다. 당황한 탓에 이림범이 되물었다.
“뭐? 뭐야.”
그러자 하련솔이 두 눈을 내리깔았다. 몸을 점령했던 열이 가시고 팔다리의 저릿저릿한 근육통도 가벼워진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가만히 상황을 파악하기도 잠시, 그는 창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기껏 앞이 보이게 되었고 그립던 이림범이 제 곁에 함께하건만, 하련솔은 창문에 걸린 무렴자 무늬나 구경하길 선택했다.
쌀쌀맞은 분위기를 풀풀 풍기며 하련솔이 말했다.
“감기라도 옮으면 어찌하려 그러십니까? 그만 침전으로 돌아가시지요.”
“형…. 하던 대로 해. 이상한 말투 쓰지 말고….”
맹랑한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생각이 막혀버려 이림범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손으로 이마를 짚고, 마른세수로 당혹감을 닦아내는 그는 황제가 아닌 철부지 이림범이었다.
“하던 대로 막말해, 그냥.”
“제가 도대체 언제, 감히 황제 폐하께 막말을 하였다고 그러십니까?”
하련솔이 시치미를 똑소리 나게 뗐다. 그제야 장난기가 느껴져, 이림범이 피식 웃었다. 답답한 마음에 연이은 걱정과 반성 끝에 가까스로 되찾은 미소였다.
‘삐졌구나, 형….’
하련솔의 말대로 제 침전으로 돌아갈 생각은 추호에도 없었다. 이대로 ‘오냐’ 하고 돌아선다면 그보다 더한 바보짓이 없을 거였다.
대신에 이림범은 하련솔의 손을 고쳐 잡았다. 그의 한 손을 제 두 손으로 꼭 쥐고, 쓰다듬고, 보듬었다. 이불 밖으로 손만 내놓기를 한참, 하련솔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암만 황제라도 그러시는 거 아닙니다. 어떻게 사람을 오라 가라…. 가라 할 거면 오라고도 하지 말았어야지. 요즘은 개도 그렇게 키우면 학대인 거, 알긴 하십니까?”
그에 이림범이 마른침을 삼켰다. 하련솔이 무화 노릇을 하듯, 저도 황제 노릇을 하려 그는 목소리를 큼큼 가다듬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그래…. 그렇지, 안다. 알고말고.”
그러자 하련솔이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가늘어진 눈매가 ‘이것 봐라’하고 절 꼬집는 듯해, 이림범은 입꼬리를 올리며 더욱 웃어 보였다. 제 웃는 낯에 대고 침 뱉을 수 있는 이가 세상에 없음을 알기에 보인 미소가 환했다.
그러나 황제와의 긴긴 악수 끝에 반쯤은 보이고 반쯤은 눈이 먼 하련솔에게 그 미소의 효과는 미미했다. 도리어, 하련솔은 더욱이 힘주어 말했다.
“왜 굳이 사람을 불러다 놓고 바람맞히십니까? 황제면 다예요? …그야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그러는 거 아닙니다.”
“그래. 내가 잘못했다, 솔아. 미안하구나.”
이림범이 재깍 대답했다. 역할 놀이를 빙자하며 건넨 말이라도, 사과는 사과였다. 미안하다는 말만큼은 숨김없이 진심이었다.
“정말 미안하다…. 미안해.”
연이어 두 번, 세 번째 사과하자 하련솔의 표정이 느슨해졌다. 딱딱하게 굳혔던 얼굴을 펴더니 그는 뒤척뒤척 어깨를 움직였다. 편안한 자세로 고쳐 눕더니 푹 내쉬는 숨소리가 곤했다.
구겨지고 흘러내린 이불을 재차 반듯하게 펴 주며, 이림범이 물었다.
“그래서 서러워했느냐.”
조심스럽게 건넨 질문에,
“네, 폐하.”
하련솔이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눈썹을 꿈틀 움직이며 이림범은 차분한 척 이불 위를 다듬었다. 하련솔의 목 위까지 부드러운 요를 덮어주고, 전과 같은 어투로 재차 물었다.
“얼마나 서러워했느냐. 내가 찾아오지 않았으면, 보고 싶어서 울었을 만큼?”
“네, 폐하….”
“하! 솔아.”
저도 모르게 그 이름을 불렀다가, 이림범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앉은 자세를 고치며 다시 말했다.
“…아니, 형. 형이 지금 뭐라고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해?”
“네…. 폐하….”
세 번째 같은 대답을 흘려놓고 하련솔이 눈을 감았다. 짧은 대화 조금 나누었기로서니 거칠어진 숨을 씨근덕거리다가, 서서히 호흡을 가라앉히며 새근새근 콧소리를 냈다.
‘미치겠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기분이 되어 이림범은 하련솔의 가슴 위에 고개를 푹 파묻었다. 두 겹으로 단단히 덮어놓은 이불에 얼굴을 감추고, 깊은 한숨도 쉬었고 탄식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