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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62화 (62/135)

62.

“언제는 관심 가지지 말라면서…. 내 관심이 부담스럽고 싫은 것처럼 말하더니, 왜 서러워해. 뭐가 그렇게 서러웠어, 왜….”

야트막한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움직이는 걸 뺨으로 느끼며, 이림범은 하련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요상한 각도에서 올려다보는데도 하련솔은 참 예뻤다. 매번 위에서 내려다보기만 해 몰랐는데 콧대가 무척 높았다.

정말이지 이상하고 또 이상했다.

‘이 얼굴을 내가 지나쳤다니.’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도 이림범은 제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렇게 무심하게 하련솔을 돌려보냈었는지,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잠시간 다른 사람이라도 되었던 것 같았다. 한데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 제가 아니라, 하련솔이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이상했다.

“미안해.”

미안하고 또 미안해, 이림범은 이불 양쪽으로 두 손을 집어넣어 하련솔의 팔뚝을 주물렀다. 잠든 이 위에 납작 엎드리다시피 기댄 채 안마하는 모습을, 남이 보았다면 우스꽝스럽다 비웃었을 터였다. 그러나 이림범은 진지했다. 그러면서 연신 어리둥절했다.

분명히 웅 실장이 ‘무화 하련솔’이라 이름을 말했고 저는 그것을 들었다. 한데 그 순간에는 그 이름을 제가 사랑하는 솔이 형으로 연관 짓질 못했다. 정확히는 제가 사랑하는, 솔이 형 자체를 떠올리질 못했다. 아예 생각조차 나질 않았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두려웠다.

따져 보자면 타당한 원인이 있기는 했다. 근래 들어 푹 잠들지를 못한 게 문제 같았다. 그래서 제 인지 능력이 순간적으로 흐려졌는지도 몰랐다.

황제의 과로가 예전만큼은 아니라지만, 정도가 덜할 뿐이었다. 황제로서 이림범은 얼굴 비추어야 할 곳이 많았고 그만큼 새로이 배우고 익혀야 할 것도 많았다. 그 때문에 금주 들어 하루 평균 수면시간이 세 시간에 못 미쳤다.

가뜩이나 바쁜 와중에 이림범은 자진하여 무리하고 있었다. ‘젊은 황제’라는 타이틀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그는 전대 황제들의 즉위 당시 나이에 비해 몹시 어렸다. 그렇기에 말 한마디, 행보 한 발짝 삐끗했다가는 ‘어린 황제’로 순식간에 격하 당할 게 분명했다. 잠자리에서도 그에 대한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어린 것이 절대적으로 나쁘지는 않으나, 한때는 저 또한 어렸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이들은 그 형용사를 비칭으로 쓰곤 했으므로. 이림범은 어디에서건 완벽한 황제이자 어른으로 있기 위해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했다.

숱하고 무거운 고민은 그러나, 하련솔의 숨소리에 밀려 사라졌다. 시간에 따라 새근새근 깊어지는 호흡을 듣고 있자니 이림범도 눈이 감겼다. 가물가물 흐려지는 시야로 그는 하련솔을 마냥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어여쁜 눈을 보고 오똑한 코를 보고 도톰한 입술을 보았다. 턱 언저리에 분홍색 시럽 같은 것이 묻어있기에, 제 엄지 끝마디에 침을 묻혀 닦아주기도 했다.

밤새도록 하련솔의 가슴팍에 얼굴을 대고, 이림범은 잠들었다가 깨기를 반복했다. 감기 기운에 취한 하련솔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마다 그들은 서로에게 잠꼬대 같은 소리를 늘어놓았다.

“범아….”

“응, 형.”

저를 부르는 소리에 이림범이 눈가를 문지르며 고개를 들자, 하련솔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졸음에 취한 그의 눈빛을 보자마자 이림범은 그가 저를 꿈속 존재로 착각했음을 알았다. 그래서 웃었다. 그의 꿈에 등장하는 자신이 늘 웃는 얼굴이었으면 바라서였다.

“네 관심이 부담스러워서… 싫어서 그런 게 아냐.”

들릴 듯 말 듯 아주 작은 목소리로 하련솔이 속삭였다.

“네가 너무 좋아…. 범아, 네가…. 네가 나한테 해주는 것들이 다 좋아.”

“…….”

“…그런데 그 좋은 게 끝나버릴까 봐, 네가 나를… 잊어버릴까 봐. 그 뒤가 무서워….”

…그래서 그래. 뒷말은 아주 작은 웅얼거림으로 남았다.

하련솔의 꿈속 ‘너무 좋은 범이’가 되어, 이림범은 그와 약속했다. 새끼손가락을 단단히 걸고 그의 손가락 등에 입 맞추며, 굳세게 맹세했다. 절대로 형을 잊지 않겠다고, 만에 하나 아주 잠시 잊는다 해도 무조건 기억해 낼 것이라고, 이 관심이 그칠 날은 결단코 오지 않을 것이라고….

긴긴 속삭임 끝에 하련솔이 웃었다. 쏟아지는 빗소리가 과격해, 이림범은 그 웃음소리까진 들을 수 없었다.

***

비 갠 뒤 이른 아침에는 새 우는 소리가 유독 컸다. 여름 내내 가로수를 울창하게 꾸미던 이파리도 비바람에 떨어져 흙과 만났다. 부지런한 이들이 싸리 빗자루로 싹싹 쓸어모은 나뭇잎이 길목 군데군데 둔덕을 이뤘다.

실력 좋은 시종이 용 모양으로 구불구불 다듬어놓은 나뭇잎 뭉치는 고양이들 놀이터가 됐다. 청기와 전각을 누비다 담장 밖으로 쫓겨난 고양이가 여럿인데, 연못 속 붕어를 보며 에오… 에오… 소리를 질러댄 게 원인이었다. 황제의 집무실을 시끄럽게 한 죄로 추방당해도 고양이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설움은 금세 잊고 나뭇잎 뭉치 위를 뛰놀기 바빴다.

귀여움을 잃은 대신 고요함을 되찾은 전각으로 직원들이 모여들었다. 하나같이 텀블러며 종이컵, 서류철과 태블릿PC로 손을 채운 모습이었다. 아침 회의장으로 향하면서 모두가 눈여겨 살피는 것은 의금부 팀장의 복장이었다. 그가 유니폼을 차려입고 발언하는 날이면 이외 부서에도 일감이 떠밀려 오기 일쑤인 탓이었다.

그리고 오늘, 의금부 팀장은 푸른 철릭을 반듯하게 차려입고 머리에는 자주색 당상관을 썼다. 관의 꼭지에 꽂아 장식한 보리 이삭이 걸음을 따라 흔들거렸다.

“…….”

“…….”

그 모습을 본 동료 팀장들이 경악하며 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줄줄이 전각 대문으로 돌아가 휴대폰을 들고, 바삐 제 슬하 인턴 직원을 불렀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달려온 인턴들이 두건이며 감투를 건네 주면, 팀장들은 거무죽죽한 얼굴로 그것을 머리에 썼다. 부랴부랴 챙겨 입을 유니폼이 마땅찮은 몇몇 이들은 넥타이와 정장 재킷을 차려입고, 바지 벨트에 금패를 묶는 성의라도 보여야 했다.

황제, 이림범이 그들 복장을 꼬장꼬장하게 따져 검사하느냐면 그렇진 않았다. 아침 회의에 중요한 안건이 오르는 날이면, 그는 남에게는 구태여 명령하지 않고 저 스스로 금빛 자수가 놓인 원룡포를 차려입었다. 그런 황제와 한자리에 앉자면 필시 구색을 갖추어 규율과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좋은 아침, 부디 좋은 아침….”

정복 모자에 허리띠를 동여맨 이들이 일제히 회의실로 들어섰다. 그러면서 그들 시선은 일제히 한 곳으로 향했다. 황제가 자리할 상석 바로 옆에 못 보던 여분 의자가 있고, 그 자리에 앉은 낯선 이가 보여서였다. 애써 허리와 어깨를 곧게 펴도 그뿐, 체구가 작고 얼굴이 어리숙해 도통 회의장과 어울리지 않는 이였다.

“누구?”

옆자리에 앉은 동료에게 귓속말하는 팀장이 여럿이었으나 마땅히 이렇다 할 대답은 나오질 않았다. 팔자 좋은 홍문관 교수만이 여유롭게 낯선 이를 맞이했다. 제 텀블러 뚜껑을 컵 삼아 가져온 커피를 나눠준 것이었다. 동글동글한 안경을 낀 노인이 허허 웃으며 건넨 음료를, 낯선 이가 두 손으로 받았다. 그러곤 손을 달달 떨며 가까스로 한 모금 목을 적셨다.

이내 하나둘 그녀의 정체를 알아챘다. 머리꼭지에 앉은 개구리 장식을 보아 시종이 분명했다. 덕분에 한결 상냥해진 목소리로 몇몇이 말을 걸었다.

“뭘 잘못해서 여기 온 건 아니죠?”

그러자 시종이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그 모습에 그래, 그래… 나이 든 팀장들이 그녀를 달랬다. 스물네 살 먹은 다 큰 시종도 회의장에서는 누구네의 어린 딸자식, 혹은 손녀 취급이었다. 어째서 황제께서 어린애를 데려다가 이 자리에 앉혀 놓으셨을까, 그 의도를 추측하느라 이마에 주름을 늘릴 따름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가 등장했다. 팀장들이 추측한 바 그대로 정복을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허리에 두른 옥대가 백열전등 빛을 받아 반짝거리기에, 팀장들은 괜스레 제 옷 소매를 매만지며 각을 잡았다.

뜬금없이 어린 시종을 불러다 옆자리에 앉혀 놓은 황제였다. 그러나 그는 시종에 관해서는 일언반구 아무 말도 하질 않았다. 아무렇잖게 회의가 시작됐고 각 부서에서 몇 가지 소식을 공유했다. 그러는 내내 팀장들은 젊은 황제와 어린 시종을 번갈아 살피기 바빴다. 가만 보면 액면가에는 크게 차이가 없는데, 존재감은 천년 묵어 용이 된 이무기 출신의 사내와 갓 태어난 아기 토끼 같으니 괴상했다.

결국 직원이 먼저 질문을 꺼내게 됐다. 텀블러 뚜껑을 동아줄처럼 꼭 쥔 시종이 두고 보기 가여웠던, 그녀는 홍문관 교수였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폐하?”

웃음기 반, 호기심 반이 섞인 목소리에 이림범이 왼쪽 입꼬리를 씩 올렸다. 홍문관 교수가 손날로 시종을 가리키며 물었다.

“여기 이 시종 아이에게도 안건이 있는 듯한데, 먼저 발언하고 물러나라 하심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시종 아이’의 낯빛이 밝아졌다. 타 부서 직원들 또한 듣던 중 반가운 말에 후련함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황제의 의도대로 굴러가기 시작한 공 위에 올라탔다는 불안감을 삭일 수가 없었다.

황제가 손짓하며 발언권을 주자, 시종이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먹 쥔 두 손을 차렷 자세로 내리고서 그녀는 호방하게 외쳤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무화 초롱…! 아! 아니, 아닙니다! 제가 무화가 아니라, 제가… 무화 하련솔의 전담 시종 초롱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이 자리에 선 것은…!”

참았던 말을 쏟아내느라 정신없는 모습에 교수가 ‘아이고’ 탄식했다. 긴장한 탓에 흥분한 초롱을 가라앉히려 왼손을 휘휘 저으며, 이림범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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