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63화 (63/135)

63.

“제보할 것이 있다 하여 내가 불렀다.”

황제가 말했다. 치미는 웃음을 감출 의향조차 없어 보이는 그를 향해 몇몇 이들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그가 두 번째 까딱까딱 손짓하자 시종, 초롱이 다시금 착석했다. 그리고 숨을 고르며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눈썹 끝이 아래로 향하고 턱에는 호두알 같은 뼈가 도드라지도록 긴장한 채, 초롱은 또박또박 제 할 말을 했다.

“무화 하련솔의 무고함을 알리고자 저는 알리바이 진술도 하였고, 추가로 의심스러운 인물을 찾아 제보도 했습니다. 그러나 의금부에서는 제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 하고, 제보 또한 억측이라면서 귀담아 들어주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종장이랑 전화로 상담을 했는데, 양채림 상궁에게 연락이 닿아서, 다시 자료를 모아 제보했더니….”

길어지는 이야기에 팀장들의 눈이 점차 가늘어지고 고개가 앞으로 튀어나왔다. 숨 막히게 이어지는 말을 끊어놓은 것은 다시, 황제였다.

“각설하고 짧게 말해.”

“아, 네!”

늘어지는 뒷말을 꿀꺽 삼킨 뒤, 초롱이 재차 입을 열었다.

“무화 윤슬찬이 도둑입니다.”

“…너무 각설한 거 아닙니까?”

의금부 팀장이 물었다. 그에 몇몇 치들이 치미는 웃음을 삼키려 노력하는 소리가 ‘흡’ 울렸으나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대다수 팀장은 낯빛이 어두워졌다. 문정궁의 모든 부서는 서로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었다. 황제와 함께하는 자리에서, 제보자로 등장한 시종이 대놓고 의금부를 꼬집었으니, 의금부는 물론이고 유관부서 모두에게 책임 소지를 묻는 파도가 밀려들 게 뻔했다.

“무화 이차혁의 보록이 저희 처소에서 발견되기 전날 밤, 기록에 따르면 무화 윤슬찬의 시종 보리는 야근하지 않았습니다.”

초롱이 말했다. 그에 의금부 팀장이 느릿하게 되물었다.

“그게 뭐가 수상합니까?”

그의 얼굴은 무표정하다 못해 편안해 보이기까지 해, 여러 이들의 동정을 한 몸에 샀다.

‘완전 정신을 놔 버렸나 보다….’

어깨가 무거운 팀장의 사정을 모르는 만큼 초롱은 잔인했다. 보다 자신감 실린 목소리로 그녀는 웅변 실력을 뽐냈다.

“수상하고 말고요! 시종 보리는 그날 밤 열한 시 경, 세답방에 들러 옷가지를 빨래했습니다. 건조기 앞에서 조는 모습을 본 시종이 여러 명입니다. 그런 사람이, 도대체 왜, 야근해 놓고 기록을 안 남기죠?”

회의장이 웅성웅성 시끄러워졌다. 야근 수당을 받질 않고 일만 더했다니, 확실히 수상하고 몹시 의심쩍었다. 그 시각에 해선 안 될 다른 짓을 저질렀다면 또 모를까…. 문정궁에서 지급하는 야근 수당이 짭짤하다 못해 매콤한데 그 돈을 사양할 이유가 따로 없었다.

큰 설득력을 지닌 말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의금부 팀장에게 꽂혔다. 황제의 눈길 또한 그의 안면에 똑바로 가 박혔다.

“이왕 제보가 들어왔으니 재수사를 해야겠구나. 이번에는 태만하지 마라. 성실히 조사하여 제대로 된 성과를 보이도록 하라.”

“네, 폐하….”

애당초 의금부 팀장이 사건 보고서를 게시했던 날, 피바람에 게눈 감추듯 일을 처리한 게 바로 황제, 이림범이었다. 하련솔을 두고 ‘참 몹쓸 놈’이라며 사형을 시켜야겠단 말까지 서슴없이 내뱉질 않았던가. 그래놓곤 이제 와 제보자를 앉혀 놓고 재수사를 명령하니, 의금부 팀장만 불쌍했다.

가여운 의금부 팀장에겐 일언반구 변명할 기회조차 주질 않고, 젊은 황제는 기쁜 듯 웃었다.

“아주 똑똑하고 용감한 시종이 아니더냐? 직접 포상을 내려야겠는데, 뭐가 좋을까?”

검지 끝에 잘생긴 턱을 걸고 읊는 말이 그랬다. 그런데 마땅히 무얼 주라고 거드는 이가 없었다. 침묵이 3초를 넘기자 양 상궁이 입을 급히 열었다. 황제에게 강령이 하나 있다면 ‘할 말 없으면 내 맘대로 한다’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의견을 내는 것보다 이림범이 빨랐다.

“쥐똥만 한 처소에서 일하기엔 아까운 인재다. 일터를 옮겨 줄까? 어디 보자…. 이왕 터를 옮길 것이라면, 교태전이 어떠하냐?”

그에 모두의 안색이 돌변했다. 깜짝 놀라 입을 벌리며 직원들은 뒤늦게 그를 말렸다.

“폐, 폐하…!”

“그건 안 됩니다. 너무 과하고, 또 급진적입니다.”

교태전은 예로부터 황후가 머무르는 처소였다. 이림범의 어머니가 살던 터이자, 매년 유지 보수에만 큰돈을 퍼붓는 귀중한 전각이기도 했다. 시종 초롱을 교태전에서 일하게 한다는 것은 그녀가 모시는 이, 하련솔을 교태전으로 보내겠단 말과 같았다. 결국은 그를 황후로 점지하겠다는 소리였다.

놀란 얼굴로 반대 의견을 쏟아내는 이들에 비해 이림범의 태도는 무척 평온했다. 오가는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고개를 까딱거리며 그는 구석 자리에 앉아 타자기를 두들기는 서기를 한 번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애당초 하련솔이 머무르는 건물은 그 용도가 처소조차 아니질 않으냐. 리모델링도 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일일이 온돌을 연기로 데워야 하는 아주 후진 곳이다.”

“…폐하.”

“그래, 변변찮은 곳이라 정정하마.”

양 상궁을 향해 휘적휘적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이림범이 말을 이었다.

“…그런 집 아궁이에서 보록이 발견된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지. 어느 도둑이 곧장 불을 지필 아궁이에 물건을 숨기겠느냐? 가장 똑똑하다는 이들만 이곳에 모아 두었건만, 내게 이 점을 지적하는 이는 몇 없더군.”

말끝이 예상치 못한 부분에 닿자 팀장 여럿이 눈을 굴렸다. ‘몇 없다’라는 것은 있기는 했단 의미이기 때문이었다. 황제의 집무실로 직접 찾아가 말을 나누었거나, 하다못해 황제에게 메일을 보낸 이들은 낯빛이 평온했다. 그러나 미꾸라지 같은 새 무화가 벌을 받건 말건, 그 부조리에는 신경 쓰질 않던 치들은 내심 마음이 뜨끔했다.

“…….”

이어지는 것은 그저 침묵이었다. 이림범은 미소를 띤 얼굴로 회의장에 둘러앉은 이들의 면면을 가만히 훑어보았다.

그리고 뜻밖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들려왔다.

“교태전은 안 됩니다, 폐하….”

거절 의사를 밝혀온 이는 다름 아닌 초롱이었다.

“저는 솔 님이 좋습니다. 아, 아니…. 무화 하련솔이 좋습니다. 그의 시종인 게 좋습니다…. 다른 곳으로 가긴 원치 않습니다.”

황제 앞이라 급히 낮추어 말하긴 하나, 하련솔의 이름을 부르는 초롱의 태도에서 애정이 묻어났다. 황제가 저를 교태전으로 보내겠다 하니, 하련솔은 개구멍에 내버려 두고 시종인 저만 똑 떼어다 그곳에 붙이는 줄 착각한 모양이었다.

순진한 시종이 용기 내어 건넨 거절이 이림범을 웃게 했다. 큰 소리로 하하 웃음 지으며 그가 되물었다.

“그래? 그건 너무 과분한가?”

그에 초롱이 바삐 고개를 끄덕였다. 한결 가벼워진 분위기에 힘입어, 탁상 자리 끄트머리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폐하. 개별 포상은 잘잘못이 명백히 드러난 뒤에 생각하여도 늦지 않습니다.”

그에 이림범이 즉답했다.

“그래. 그럼 보상은 어떠하냐?”

“…….”

포상이라 하면 제보자인 초롱에게 내려질 몫인데, 보상이라 하면 엄한 처벌을 당한 하련솔에게 내려질 것을 의미했다. 내가 지뢰를 밟았구나… 후회 속에 사내가 잠시간 숨을 골랐다. 그의 직급이 승정원 도승지라, 그가 ‘이렇다’ 말하면 타 부서의 어느 팀장도 ‘아니다, 저렇다’ 반박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짧은 침묵 속에 아무리 생각을 굴려 보아도, 도의적으로 옳은 답은 하나뿐이었다.

“보상도 그러하옵니다, 폐하.”

그에 온 직원의 안색이 사색이 됐다. 황제가 바뀌는 해는 워낙 바쁘기 마련이라, 수많은 일을 끝도 없이 처리하느라 가뜩이나 정신없는 시절이었다. 다른 모든 일에는 마치 로봇처럼 매뉴얼에 충실하여 대응하는 황제께서 유독 이리 퍽, 저리 쾅 튀는 것이 무화 하련솔 앞이었다. 그러니 최대한 그에 대한 언급을 피하고 싶건만, 일이 처리되는 대로 하련솔에게 보상을 내리겠다 하니 미칠 노릇이었다. 그마저도 도승지가 먼저 뱉은 안건이라 파훼하거나 미룰 방법이 없어 보였다.

무너져가는 둑 위에 놓인 화려한 일감 앞에 모두가 우울했다. 적막이 감도는 회의장 속에, 홀로 딴생각에 잠겨 여유로운 이는 초롱뿐이었다.

‘분위기 정말 괴상하네…. 역시 우리 처소가 최고야.’

그녀 덕분에 무한대로 길어진 오전 회의는 쉬는 시간을 맞이했다. 셔츠 맨 위 단추를 풀어 내리는 직원들을 피해 초롱은 냉큼 회의실 밖으로 나섰다. 그런 그녀의 팔목을 누군가 가볍게 붙들어 쥐었다.

“흐악.”

급히 덜커덩 멈추느라 제자리에서 흔들리는 초롱을 바로 세우는 이는 황제였다. 커다란 그림자로 시종의 정수리를 죄 덮어놓고, 그는 아무렇잖게 말했다.

“초롱아.”

그 친근한 부름에 초롱은 머리 뚜껑이 날아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황제가 저를, 하련솔이 그리하듯이 이름으로 부르니 팔뚝 위로 소름이 돋고 뺨의 솜털까지 뾰족하게 섰다. 똑바로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토끼 눈을 뜬 채 올려다보는 초롱에게, 이림범은 제 할 말을 편히 건넸다.

“형한테 전해, 저녁에 찾아가겠다고.”

그러더니 툭툭 그녀의 어깨를 두들겼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격려를 받으며 초롱은 청기와 전각 밖으로 도망치듯 나섰다. 가출 직전인 영혼을 가까스로 붙들어 쥐고 비틀비틀 떠나는 그녀를 웅 실장이 배웅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