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64화 (64/135)

64.

황제의 호위 실장, 김웅진은 여태껏 새 황제의 변덕을 백 번 천 번 이해하고 받아들여 왔다. 외국에서 살다 돌아와 삶의 터전이 송두리째 바뀐 데다 슬하의 후궁만 마흔한 명이고, 궐 안팎으로 황제를 부르는 목소리가 무성하여 메아리칠 지경이니 그의 정신이 얼마나 혼미하겠는가. 때문에 김웅진은 젊은 황제를 가엾게 여겼으며, 다른 한편으로 동경하고 존중했다. 갖가지 압박 속에 그가 얼마나 유쾌하고 유연하게 제 길을 찾아가는지, 또 사랑 앞에서는 얼마나 순수한 청년으로 돌변하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늘, 그는 제 동경에도 한계가 있음을 깨달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하지 않나?’

아침 회의까지만 해도 즐거워 보이던 황제가 점심을 기점으로 돌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후 내내 이상기후를 감지한 멸종 위기 동물처럼 굴었다. 그 밖에 그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를 표현할 마땅한 말이 없었다.

방송국 카메라며 외국 인사 앞에서 매력적인 미소와 훌륭한 언변을 뽐내다가도, 이림범은 문득 어두운 얼굴로 착잡한 일이 있는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 있고는 했다. 그 위치가 마침 중요 인사가 선물로 건네 온 유명 작가의 작품 앞인지라, 황실 전속 사진기자가 감탄하며 셔터를 눌러 대기 바빴더랬다. 이림범은 변덕스럽게 찾아든 우울조차 예술에 매몰된 젊음이라 추앙받는 남자였다.

모든 일과를 마치고 문정궁으로 돌아갈 무렵 그의 상태는 더욱이 나빠졌다. 손님이 떠나간 이후 그는 가짜 웃음을 순식간에 지워버렸다. 리무진 뒷좌석에 기다란 다리를 아무렇게나 뻗어놓은 채 피로감에 찌든 모습이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눈가를 문지르는 동작은 어제의 그와 같았다. 그러나 묘하게 붕 뜬 것 같은 존재감은 웅 실장으로 하여금 기시감을 느끼게 했다.

그런 황제가 걱정되어 웅 실장은 기사를 돌려보냈다. 제가 직접 운전대를 잡지 않고선 안심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침전으로 드시겠습니까?”

문정궁 주차장 앞에는 열댓 명의 무화들이 황제를 마중 나온 참이었다. 검은 리무진을 멈추어 세우자 멀리서 차를 가지러 온 직원이 손을 흔들었다. 차창을 내리고, 웅 비서는 그를 향해 기다려달라 수신호 했다.

유리 격벽 너머 이림범으로부터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백미러를 힐긋 살피자 눈을 감고 움직이지 않는 그가 보였다. 잠들었나 하고 웅 실장은 아주 조심스럽게 제 몸에 두른 안전벨트를 풀었는데 달칵, 소리를 내자마자 이림범이 눈을 떴다. 그러곤 묵묵히 하차했다.

무화들을 달고 침전으로 향하는 대신 그는 청기와 전각으로 걸어갔다. 더욱 오래 산책하며 아픈 이들을 충분히 낫게 하기 위해서였고, 전각의 집무실 불을 밝히며 오늘은 어느 무화와도 지낼 여유가 없음을 드러내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무화들은 자연스럽게 이야기꽃을 피웠다. 피로한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다만 어색한 분위기만을 타파해 보려 저들끼리 도란도란 대화하는 식이었다. 이림범은 그들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였으나 누구도 황제의 태도를 지적하지 않았다.

개중 가장 어리고 겁 없는 무화가 용기 내어, 황제의 마음에 들고픈 티를 풍기기도 했다.

“저는 하련솔이 무고한 줄 진작 알았습니다, 폐하. 눈이 먼 사람이 어떻게 도둑질을 하겠습니까? 뭐가 귀하고, 뭐가 예쁜지 분간할 수 없는데 말이지요.”

그렇게 대놓고 하련솔의 편을 들면, 황제께서 제 얼굴 한 번 바라봐 주지 않을까 싶어 꺼낸 말이었다. 그러나 이림범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조차 보여주질 않았다. 그의 말을 듣긴 하였는지 무감각한 목소리로,

“그래.”

대답한 게 전부였다.

청기와 전각 앞에 도착하여 무화들은 새로이 할 일을 찾아냈다. 한결 열이 내리고 발걸음이 가뿐해졌으니, 카페 앞 정자로 이른 단풍놀이를 가겠다고 했다. 개중 키 큰 여자 무화가 이림범을 향해 넌지시 물었다.

“폐하께서도 함께 가시겠어요?”

별반 기대는 하지 않고 그저 예의상 건넨 질문이었다. 이림범은 그녀를 향해 흐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돌려주는 답은 당연히 거절이었다.

“아니. 오늘 저녁에는 선약이 있어, 바빠 안 되겠다.”

그에 무화들이 그를 향해 허리를 꾸벅 숙였다. 그러곤 오늘 황제께서 지어 보인 표정이며 꺼낸 말, 흘려보낸 미세한 반응을 두고 속닥속닥 수다를 떨며 멀어져 갔다. 홀가분하게 떠나는 무화들의 그림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림범은 집무실로 들어섰다.

그러더니 대뜸, 그는 집무실 노트북을 열어 바탕화면에 둔 급한 일감을 일일이 확인했다. 그러곤 가죽 노트를 펼쳐 적어둔 메모를 읽어내렸고, 이내 서랍의 모든 칸을 덜컥 열고는 서류의 날짜와 시간 따위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수색은 집무실 전체로 점차 범위를 넓혀나갔다. 웅 실장이 당황하며 왜 그러시느냐 물어도 이림범은 이해하기 힘든 소리를 중얼거릴 뿐이었다.

“내가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는데….”

“예? 폐하. 그게 뭡니까. 함께 찾겠습니다. 뭐가 사라졌습니까?”

“모르겠다.”

짧게 대꾸하더니 제자리에 멈추어 서, 이림범은 번듯하게 넘겼던 머리칼을 제 손으로 흐트러뜨렸다. 그의 얼굴이 단숨에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이마 위로 굵은 핏줄이 울퉁불퉁 불거지기에, 웅 실장은 깜짝 놀랐다. 그 모습이 마치 심각한 모멸을 당한 사람 같아서였다.

가만히 멈추어 서 있기도 잠시, 이림범은 집무실 내부를 재차 휘 둘러보았다. 그러더니 ‘이상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구석구석을 철저히 뒤지기 시작했다. 책상 아래, 책장 사이를 꼼꼼히 살피는 건 물론이며 사다리를 가져오라 하더니 책장 위의 먼지까지 긴 팔로 쓸어내기에 이르렀다.

황제를 말려야겠단 생각에, 웅 실장은 그를 애써 멈춰 세웠다.

“폐하. 도대체 뭐가 이상하다는 말씀입니까?”

“다! 다 이상하다. 무얼 잃어버렸다고 하지 않았느냐? 한데 그것이 무언지 모르겠다고도 하지 않았어? 그래놓곤 그것을 찾고 있지. 너는 이런 내가 이상하지 않으냐?”

버럭 소리친 말에 웅 실장이 입을 떡 벌렸다. 그러곤 신음하듯 대답했다.

“이상합니다…. 이상하긴 합니다만… 도대체 뭘 찾으시는 건지….”

“내게 빌어먹을 저주를 퍼붓는 여자가 있어 그런다. 나를 패 죽이지 못해 안달인 남자가 있어 그래. 그러니 찾아야겠다. 도대체 누구의 소행인지 알아내야겠어.”

기다란 사다리를 드르륵 소리 나게 끌고 가더니, 이림범은 집무실 중앙에 섰다. 그러곤 높은 천장을 향해 겁 없이 터벅터벅 사다리를 올랐다. 웅 실장이 급히 달려가 사다리 양쪽을 붙잡을 무렵, 황제의 손은 이미 서까래 위에 닿아 있었다.

더듬더듬 서까래에 쌓인 먼지를 쓸어내길 한참, 마침내 그는 주먹을 움켜쥐고 사다리에서 내려왔다. 황제는 멀쩡하건만 그를 지켜본 웅 실장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정신이 너덜너덜해진 채 그는 얼른 황제의 손아귀를 확인했다. 꽉 말린 주먹 안에 회색 먼지 한 움큼과 함께 노란 색지가 들어 있었다. 문양 같은 글씨를 빨간 물감으로 적어놓은, 그것은 부적이었다.

“도대체 누구를 어떻게 들였기에 이따위 물건이 내 집무실에서 나오지?”

이림범이 소리 질렀다. 소란을 느낀 박 비서와 시종들이 도착하자, 이림범은 그들에게도 다짜고짜 부적의 출처를 물었다. 황제의 떨리는 음성에서 어리숙한 불안감이 생생하게 느껴져, 웅 실장은 이림범의 주먹을 잡았다. 그러곤 조심스럽게 그의 손에 쥔 부적을 받아 들고 살폈다.

“흔히 봐 온 한자 같기도 합니다. 이상한 수작질은 아닐 겁니다.”

그에 나이 든 시종이 목소리를 냈다.

“가피 스님을 모셔 와 물을까요?”

그러곤 크게 혼이 나고야 말았다. 당장 꺼지라는 말로 그를 쫓아내며 이림범은 여태껏 보인 모습 가운데 가장 거칠게 화를 냈다. 흐린 미소를 지어 보이며 무화들과 함께 느릿느릿 산책하던 황제는 어디에도 없었다. 문정궁과 가장 가까이 사는 스님이 가피 스님이고, 전대 황제가 회주라 부르며 모시던 모습을 봐 온지라 그리 말했다며 시종이 사죄해도 소용없었다.

부드러운 손짓으로 그를 내보내는 일은 웅 실장의 몫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시종의 손에 구겨진 부적을 쥐여 주었다. 호위 실장의 눈짓을 확인하고 시종은 바삐 문밖으로 나섰다.

발화자가 사라진 뒤에도 ‘가피 스님’의 존재는 이림범의 곁에 남았다. 분노를 삭일 방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이림범은 제 가슴을 퉁퉁 쳤다.

“어쩐지 기분이 개 같다 했다. 이따위 수작질을 벌여 놓았으니 그랬던 거야.”

그러면서도 그는 조금도 홀가분해 보이지 않았다. 고삐 풀린 말처럼 제자리에 있질 못하고, 몇 주를 굶은 호랑이처럼 예민하게 굴었다.

부쩍 지치고 짜증스러운 모습으로, 이림범은 집무실 책상에 걸터앉았다. 제 손목 위에서 쉬지 않고 움직이는 초침을 바라보기도 잠시, 재차 이마를 짚고 골몰하기도 했다.

답답한 감정을 못 감추며 이림범은 주먹 쥔 손으로 제 머리를 퉁퉁 두들겼다. 그러면서 물었다.

“오늘 내게 남은 일정이 있더냐?”

그를 향해 반 발짝 다가서며 박 비서가 바삐 대답했다.

“아니요, 없습니다. 저녁 시간을 넉넉히 비워 두느라, 종일 바쁘게 보내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면… 구태여 비운 저녁 동안에는 무얼 할 예정이었지?”

이번에 박 비서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오만상을 구기며 짜증을 삭이는 황제를 향해, 그는 떠오르는 추측을 머뭇거리며 읊었다.

“혹시 평소처럼… 무화 이차혁을 보러 가시려 한 게 아닐지요. 저녁 식사를 왕왕 함께하셨으니….”

“무화?”

이림범의 관자놀이 위에서 핏대가 꿈틀 움직였다. 양 뺨에 옴폭 파인 자국이 생기도록 이를 악물고서 그는 침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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