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65화 (65/135)

65.

황제의 고뇌를 조금이라도 덜어내고자, 박 비서가 말했다.

“제가 아는 스님께 부적을 보내 볼까요? 어떤 부적인지 물어보면 마음이 편해지실….”

“내가 너를 어찌 믿고?”

이림범이 그의 말을 끊어놓았다. 황제가 내뱉은 매정한 목소리에, 박 비서의 얼굴이 돌처럼 얼어붙었다.

“박 비서. 한 번 명령해선 쉽게 따르질 않고 꼭 네 뜻대로 판단하지. 회주를 이 방까지 넙죽 모셔 온 게 너였다. 그런데 그를 믿지 않는 나더러, 그를 이곳에 들인 너를 믿으라고?”

난데없는 말에 박 비서의 머릿속이 희게 질렸다. 황제께서 저라는 비서를 그렇게 판단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웅 실장이며 양 상궁에게 그리하는 만큼, 도통 저에게는 자리를 내어주질 않는다고 내심 원망만 해 보았을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곤 생각한 적 없었다. 매일 같이 황제를 모시며 지켜보면서도, 그 황제께서 지난여름 가피 스님을 집무실에 들인 일을 여태껏 잊지 않은 줄도 몰랐다. 박총명 본인은 그 일에 대해 더는 반성하지 않고 크게 개의치도 않기에 더더욱 충격이었다.

“폐하…, 저는….”

당황하여 우적우적 변명을 씹는 박 비서의 어깨를 웅 실장이 붙잡았다.

그들을 대신하여 답을 내놓는 이는 따로 있었다. 바로 2분 전 쫓겨났던 늙은 시종이었다. 얼굴을 빨갛게 붉힌 채 울상으로 나갔던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안색과 단정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러곤 몹시 공손한 자세로 두 손을 모아쥐고서 말했다.

“폐하. 지난 보름 방문하셨던 평은사의 주지 스님을 기억하시지요?”

이림범은 구태여 두 번째 그를 쫓아내진 않았다. 시종이 수치스러움에 떨지 않고 덤덤하게 제 할 말을 하듯이, 이림범은 그의 말을 곰곰이 곱씹으며 대답했다.

“그래. 기억한다.”

“연락처를 찾아 부적 사진을 보내었더니, 곧바로 전화를 주셨습니다.”

그러더니 그는 휴대폰을 공손히 받쳐 들고, 스피커폰 모드로 통화 소리를 들려주었다. ‘통화 중’ 글씨가 새하얀 액정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의 스님이 허허 웃음 지었다. 그리고 부적에 대해 설명했다. 그저 화마를 방지하고자 귀한 건물에 흔히들 쓰는 물건이라는, 설명은 단순명료한 만큼 허무했다.

“감사합니다, 스님.”

황제를 대신해 인사하며 통화를 마치고, 시종이 고개를 들었다.

“폐하의 집무실이기 이전에는 가치 있는 책을 보관하는 서고였으니, 궁을 관리하는 어느 누군가 붙여 두었는지도 모릅니다. 자세히 보니 종이 모서리가 꽤 낡았습니다. 오래전에 두고는 잊어버린 듯합니다.”

“그래….”

“다른 절에도 연락을 취해 알아볼까요?”

“그래, 그리 해 줘. 고맙다.”

노련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시종은 그 자리에서 곧바로 다른 스님에게 연락을 취했다. 두 명의 스님이 곧장 답변을 보내왔다. 어투만 다를 뿐 내용은 전과 같았다. 그러고 나니 더는 의심의 여지가 남지 않지 않게 됐다. 덕분에 이림범도 안심한 듯 보였다.

“다행이군….”

그러면서도 그는 부적을 죽죽 찢어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그리고 왼손을 툭 내밀어 보이며 말했다.

“박 비서. 라이터.”

그에 박 비서가 어깨를 움찔거렸다. 크게 꾸중을 듣고 방 밖으로 쫓겨났던 시종도 안색을 밝히고 제 살길을 찾는데, 박 비서의 태도는 여전히 시무룩했다. 몸 안에 구부러지지 않는 심지가 꽂힌 사람처럼, 그는 어색한 동작으로 자신의 재킷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러곤 껌 두 통과 함께 품고 있던 라이터를 꺼내어 황제의 손바닥 위에 올렸다.

이림범은 집게 손끝에 쥔 부적 조각에 불을 붙였다. 그대로 툭 철제 쓰레기통 안에 집어넣자, 옅은 불빛이 그의 하관을 비추었다.

“담배 끊었지?”

타닥타닥 종이 타는 소리를 들으며 그가 물었다. 그러곤 비서의 라이터를 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흡연을 향한 마지막 미련을 압수당한 뒤, 박 비서는 고개를 끄덕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박 비서는 ‘시대를 다르게 타고났더라면 전매청에서 일했을 것’이란 농담을 달고 다니는 골초였다. 금연을 다짐한 이유는 순전히 이림범에게 있었다. 신경 예민한 황제께서 담배 냄새를 싫어하시기에, 그의 비위를 맞추어 보려 억지로 금연하며 인내하던 참이었다. 그래 봐야 티도 나질 않는데 참 허무하다고도 생각했더랬다. 그런데 ‘담배 끊었지’ 라니…. 그 말에 담긴 한 조각 관심이 위로 같고 호의 같아, 좀 전의 설움을 잊게 했다.

한편 황제의 시선은 은색 휴지통 속에 처박힌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주홍빛 안광이 비쳤다. 화재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긴 시간 제자리를 지키던 부적이 잿가루가 되는 모습이 참 기묘했다. 마지막 불씨가 꺼질 때까지, 이림범은 그것을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무속 신앙이라면 무어가 됐건 질색이었다. 그는 그것을 믿지 않음을 떠나, 신봉자들을 증오하기까지 했다. 힘든 사람을 달래어 주고, 무너진 이를 일으켜 주고, 삶의 의미를 심어 주는 것이 종교인데, 그가 봐 온 종교인이라는 작자들은 그러지 못했다. 그보다는 남의 등을 내리치고 다리를 꺾으려 하고 생애를 갈취하고자 혈안이었다.

“경비대를 불러라….”

잿가루가 된 부적을 내려다보며 이림범이 말했다.

“이제 문정궁에 부적은 필요치 않다. 경비대를 불러, 궁 안의 모든 전각을 빈틈없이 모조리 뒤지도록 해라. 이와 같은 부적이 나오거든 그 용도를 샅샅이 살피고, 만일 새것처럼 보이거든 누가 사용한 건지 출처를 밝혀라.”

저녁 시간은 넉넉하게 보낼 것이다, 통째로 비우도록 일정을 잡아달라… 그렇게 요청하던 황제는 어딜 가 버렸는지 없었다. 그는 그 자신을, 그리고 의금부 직원들을 바쁘게 하며 한바탕 수색 작업을 명령했다.

그에 경비대 직원들은 곧바로 문정궁의 구역을 여덟 개로 나누어 수색을 시작했다. 황제가 그리하라 명령을 내린 이상 다른 누구의 허락이나 지시는 필요치 않았다. 정해진 규약이 있고 방법이 있어 그에 따를 뿐이었다.

부하들이 한지로 만든 엄심갑을 입고 가슴에 카메라를 단 채 무화들의 동의를 구할 때쯤, 의금부 팀장은 황제의 집무실로 찾아들었다. 사방천지 부하들이 돌아다니니 곤혹스러울 법도 한데 그는 그저 덤덤했다. 궁궐의 주인이 바뀔 때마다 기습적인 수색은 절차상의 일일 뿐이었다. 이후 일어날지 모를 불미스러운 사건의 연계를 따지자면 한 번쯤, 대대적인 청소를 해두는 게 좋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무전기를 통해 전해 듣기로 몇몇 큼직한 처소의 대청마루 아래며 서까래 위에서 벌써 오염된 부적이 등장했다고도 했다.

의금부 팀장이 황제를 찾은 이유는 그보다는 다른 일에 있었다. 누가 되었건 황제의 집무실 문을 두드릴 때는 성과를 손에 쥐어야만 했다. 오늘날 의금부 팀장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폐하. 무화 윤슬찬과 시종 보리를 의금부에 압송하였습니다. 확실한 물증이 나오기 전까지는 자백하지 않겠다고 우기고 있습니다만….”

뒷짐을 지고 선 채 그는 이림범의 안색을 살폈다. 화려한 자수가 빼곡히 놓인 외투는 저 멀리 던져놓고, 그는 흰 셔츠에 정장 바지 차림새로 책상에 앉아 있었다. 한바탕 운동을 한 사람처럼 땀을 흘린 탓에 굵은 목덜미에 비치는 백열등 빛이 번들번들했다.

영 심기가 나빠 보이는 황제를 향해, 의금부 팀장이 말했다.

“이제 CCTV 영상을 좀 사용해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이림범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는 잠시간 말없이 의금부 팀장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단숨에 표정을 고쳤다. 무엇에 취했다가 정신이 든 사람처럼 ‘아’ 하는 소리와 함께였다.

“…그래, 그 일.”

이마를 짚으며 그는 곧장 탄식했다. 문정궁 곳곳을 샅샅이 수색하라 지시한 일이 곧바로 후회스러웠다. 그야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긴 하였으나, 때가 나빴다. 기껏 저녁 시간을 넉넉하게 비워 놓은 오늘, 그는 문정궁으로 돌아오는 길에 작은 그림 선물과 간식을 사 올 계획이었다. 그리고 하련솔의 감기가 잘 나았는지 병문안을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다 잊어버리고야 말았다. 제 머릿속에 공백이 생겼음을 인지하고 그 정체를 골몰하면서도, 미처 떠올리질 못했다.

‘그래놓곤 무슨 놈의… 부적 탓을 하고….’

이마를 짚으며 그는 제 비이성적인 반응을 자책했다.

“폐하.”

의금부 팀장이 재차 황제를 불렀다. 그에 이림범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절도 사건이 회의장에 언급되었던 첫날, 회의를 마치자마자 양 상궁이 그에게 건넨 자료가 있었다. 이차혁의 처소 정원과 내부 통로, 보록이 있는 방의 CCTV 영상이었다. 모든 화면에 아주 꼼꼼하게 시종 보리가 찍혀 있었다. 이림범은 자료가 든 USB를 곧바로 의금부 팀장에게 건네주었다. ‘기다려’ 하는 명령과 함께였다.

이후 의금부 팀장이 할 일이라곤 혀를 내두르는 것뿐이었다. 가진 패를 쓰지 않고 구태여 하련솔에게 벌을 내리고, 모두의 행동거지를 유심히 지켜보는 황제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림범은 지금쯤, 누구를 오래도록 곁에 두고 누구는 싹둑 잘라내야 좋을지 분별하고도 남았을 터였다.

그러니 잠시간 이 일에 대해 완전히 잊어버렸던 사람처럼,

“…그래. 슬슬 그래야지.”

뜬금없이 중얼중얼 대답하는 것이었다.

겨우 받아낸 허락을 끌어안고, 의금부 팀장은 황제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러곤 집무실을 나섰다. 이제 윤슬찬과 보리를 각각 심문하고, 자백을 받아 내어 사실관계를 따지는 일만 남았다.

한데 그의 곁에 황제가 함께 걸었다.

“…폐하께서 직접 가시려고요?”

팀장이 당황해 묻자, 이림범이 쯧 혀를 찼다. 성질을 못 이겨 벌어진 와이셔츠의 가슴께 단추를 다시 잠그는 손길이며 찡그린 미간에서 짜증이 묻어났다. 훤히 보이는 사실을 왜 굳이 묻느냐는 듯한 태도였다. 팀장의 귀가 절로 달아올랐다.

의금부 건물에 도착하자마자 이림범은 두 개의 심문실 앞에 섰다. 황제께서 바라시는 대로, 팀장은 그를 윤슬찬을 가두어 놓은 방으로 안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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