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이림범에겐 더 낭비할 시간이 남아 있질 않았다. 가타부타 입을 열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여, 그는 테이블 한가운데에 갖추어진 노트북을 열었다. 그대로 화면을 휙 돌려, 무화 윤슬찬에게 그의 시종 보리가 보록을 안고 나서는 장면이 찍힌 CCTV 녹화본을 보여주었다.
문제는 윤슬찬의 태도였다. 의금부 직원들에 이어 황제가 직접 나서 증거 영상을 내밀어도 그는 고개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화면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는 비협조적인 태도는 그러나 상대로 하여금 더 큰 확신을 안겨줄 따름이었다. 무고자라면 저를 코너로 몰아넣는 증거물에 예민하게 반응할 텐데, 이미 그 내용을 잘 아는 범인이다 보니 증거를 똑바로 살필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제 속내가 환히 보이는 줄도 모르고서 윤슬찬이 거짓말했다.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제 시종이 혼자 꾸민 짓이에요.”
“하하!”
심문실이 울리도록 황제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에 윤슬찬이 테이블 위의 두 손을 움찔거렸다.
용의자로 심문실에 앉은 처지의 윤슬찬에게, 의금부에선 구태여 수갑까진 채우지 않았다. 어느 무화에게도 도주의 우려는 없기 때문이었다. 다만 두 손을 훤히 내놓아야 하므로, 매일같이 피부처럼 끼고 다니던 손가락 장갑을 빼앗은 지 오래였다. 윤슬찬이 마지못해 내보인 두 손은 고사리 잎사귀처럼 꽉 굽은 상태였다. 빛깔이 노랗게 질리도록 세게 말린 손을 옷 소매로나마 감추려 애쓰며, 윤슬찬은 연신 제 범행을 부정했다.
“제 시종이 보록을 훔쳤다는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시켰다는 증거는 없지 않습니까?”
뻔뻔한 무화 앞에서 이림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시간 들여 윤슬찬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심문이 길어지고 마음의 불안이 증식되면 증식될수록 윤슬찬의 몸은 건강해졌다. 꽉 말렸던 손가락이 점차 펴지며 원래의 반듯한 모양을 되찾았다. 노랗던 피부에 분홍빛이 돌고 차갑던 손가락이 따듯해지며 기분 좋은 쥐가 올랐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완전히 펴진 열 손가락은 기다랗고 고왔다.
고통이 사라지고 모양은 편안해진 두 손을 내려다보며 윤슬찬이 이마를 찡그렸다. 황제 앞에서 거짓말을 늘어놓아서는 안 된다고 그의 육신이 말하고 있었다. 젊은 황제 이림범은 그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 절대자였다. 그에게 바라는 회복을 안겨주는 유일한 이였다.
머뭇머뭇 손을 움직이길 한참, 윤슬찬이 입을 열었다.
“…만일 제가 범인이라 해도 제 탓이 아닙니다. 그건…, 그건 폐하께서 하필 하련솔을 아끼셔서 일어난 사고죠.”
대답 대신, 이림범은 왼쪽 눈썹을 추켜 올렸다. 더 말해보라는 양 보내온 눈짓 한 번에 윤슬찬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러곤 두 시간 내내 의금부 직원들이 벌인 설득과 회유에도 자백하지 않은 범행동기를 말했다.
“왜… 하필… 하련솔입니까. 그게 이해가 안 됩니다.”
황제 앞에서 무화는 의존적이게 마련이었다. 사회에서는 독립적이던 자들도 무화가 되면 쉽게 성질을 바꿨다. 어린 나이에 입궁한 경우 그 정도가 더욱 심했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입궁하여, 올해 스물세 살이 된 윤슬찬도 그런 무화 중 하나였다.
입술 끝을 비죽거리며 윤슬찬이 입을 열었다. 그의 언행은 그다지, 심문실에 앉은 용의자 같지 않았다. 그보다는 보호자에게 떼를 쓰는 아이 같았다.
“이차혁 님이라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태껏 그분이어서 인정해 온 겁니다. 저만 그런 게 아닐걸요? 다들 비슷한 생각일 거예요. 그런데… 왜 하필, 왜… 왜 하련솔이에요? 폐하, 어째서죠?”
“그래. 어째서지?”
이림범이 도리어 질문했다.
“그게 궁금해서 널 보러 왔다. 네 입으로 말해 봐라, 하련솔이 어떤 무화인지.”
그에겐 제 눈치를 보지 않고, 하련솔과 친하거나 그를 좋아하지도 않는 제삼자가 필요했다. 정확히는 제삼자의 눈에 비치는 하련솔이 어떠한지 객관적인 지표가 필요했다. 거듭 하련솔을 잊어버려 미치광이가 되기 일보 직전인 채 그는 확신하고자 했다. 이상증세의 원흉이 저에게 있고 누군가 저를 음해하고자 하는 건지, 혹은 질 나쁜 문제가 하련솔에게 있어 저를 비롯한 모두가 그를 잊어버리는 건 아닌지….
생판 다른 목적을 갖고 심문실에 앉은 황제의 의중일랑, 윤슬찬은 알아채지 못했다. 다만 무화 하련솔이 받아온 복에 겨운 총애를 생각하며 양 뺨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가 생각할 때 무화 하련솔에게는 그럴 만한 자격이 없었다. 불쑥 하련솔에게 안겨진 총애에 걸맞은, 진짜 주인은 따로 있었다.
제 성질을 못 이겨 경련하며 윤슬찬이 외쳤다.
“무화 하련솔은, 그는 아무런 장점도 특징도 없는, 허수아비 같은 놈입니다!”
“‘허수아비’?”
“예! 허수아비가 아니면 그놈이 뭡니까? 무화들을 다 모아놓고 물어보십시오. 하련솔의 무엇 하나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지…! 전 도저히 그런, 투명 인간 같은 사람에게 혁 님이 밀려났단 걸 참을 수가 없어서….”
씩씩거리며 하련솔을 욕하다가, 윤슬찬은 이마를 찡그렸다. 어리숙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그는 황제를 원망했다.
“폐하…, 폐하가 밉습니다!”
그에 이림범이 이마를 탁 짚었다. 한쪽 벽을 채운 이중 거울 너머의 직원들도 그와 비슷한 반응을 보일 터였다. 부도덕한 사건으로 궁궐의 질서를 어지럽힌, 범인의 범행동기는 터무니없이 황당하고 어리숙했다.
큰 손으로 제 눈가를 문지르며 이림범은 들은 말을 이해해 보려 노력했다. 그러면서도 덤덤한 척, 무표정을 가장하며 무뚝뚝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차혁을 은애하느냐?”
“…….”
그러자 윤슬찬의 입이 딱 다물렸다. 원망을 쏟아내던 두 눈도 동그랗게 커졌다. 순진하기 짝이 없는 무화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이림범이 실소했다.
“무화라 해서 구태여 황제를 사랑할 필요는 없다. 애당초 너는 그러한 척을 할 생각조차 없어 보이는구나. 하긴… 생각이라는 걸 하는 놈이었으면 이런 짓을 벌였겠느냐.”
“…….”
처음에 이림범은 범인이 꾀를 부려, 하련솔과 이차혁을 동시에 공격하나 보다 생각했다. 자질구레한 사건 사고를 일으켜 하련솔의 인상에 피로감을 더하고, 이차혁은 그런 하련솔을 덫에 자빠뜨리려 계략을 일삼는 무화로 모함하는 줄 알았다.
한데 윤슬찬의 태도가 너무나 단순했다. 그는 일을 저지르기 전에 깊이 생각할 줄 아는 어른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이림범도 추측을 바꿨다. 정말이지 단순하기 짝이 없게, 도둑놈인 하련솔은 악당, 피해를 본 이차혁은 무고한 꽃으로 보이길 바랐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한데 어찌하면 좋을까.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이차혁은 하련솔을 모함한 죄로 조사를 받아야 할 텐데.”
이차혁이 인기 많은 무화라는 것쯤이야 이림범도 익히 알았다. 무화가 되기 전부터, 이차혁은 남들이 주는 선물이며 관심을 하나하나 제 형에게 자랑하길 좋아했다. 덕분에, 이림범은 제 동생이 남들 앞에서 얼마나 아름답고 착한 사람으로 보이는지 지겨울 만큼 잘 알았다.
실제로 이차혁은 예쁘고 착한 동생이었다. 이따금 지랄한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삐딱하게 굴 때가 있어 그렇지….
“…아닙니다. 혁 님은 이 일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저는, 저는 그렇게 하면 폐하께서 다시 그분을 아끼실 줄 알고….”
윤슬찬이 허둥지둥 변명했으나,
“입만 열면 거짓말이지.”
이림범의 태도는 차가웠다.
“이차혁이 일부러 제 보록을 내준 게 아니냐? 그놈이 못된 마음을 먹고, 처음부터 계략을 짜 함께 일을 벌인 것이지. 가만 보니 네가 아니라, 이차혁을 처벌해야겠다.”
솔직히 말해 이림범은 더는 윤슬찬에게 볼일이 없었다. 그가 이차혁을 좋아하건 말건 제 알 바가 아니었다. 막말로 무화들 간에 연애 감정이 생겨 저들끼리 처소를 합치겠다고 말해 오면, 그는 흔쾌히 그들을 축복해 줄 황제였다. 그러잖아도 처소 수가 모자랐는데 잘 되었다… 그리 생각하고 넘겨버릴 것이었다.
무화 윤슬찬에게 이림범이 바라는 건 딱 하나였다. 이제 그만 자백을 하고, 덜 구차해질 길을 찾아가는 것뿐이었다.
황제의 무심한 눈짓이 주는 압박감에 짓눌려, 윤슬찬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말했다.
“제가… 전부 자백하겠습니다. 제가 벌을 받겠습니다….”
그러니 그러지 말아달라, 이차혁은 건드리지 말아달라… 의미 없는 말을 반복하며 윤슬찬은 두 손을 싹싹 빌며 애원했다. 제가 좋아하고 선망하고, 그러면서도 질투하는 무화, 이차혁이 황제의 형제인 줄은 꿈에도 모르는 채였다.
이림범의 대답은 심드렁했다.
“그래.”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의금부 팀장이 심문실의 문을 열었다. 짧은 심문 끝에 개화병 증세가 싹 사라진 윤슬찬을 내려다보며, 이림범이 말했다.
“외출금지령 3일이다.”
그러곤 휙 돌아섰다. 제가 내린 선처를 두고 감사해하는 모습 따윈 보고 싶지 않았다. 하련솔에게 내린 처벌이 그러하였으니, 차별 대우를 하였다고 괜스레 튀는 기름이 없게끔 똑같이 처리한 것뿐이었다. 황제의 총애는 각기 다르게 주어지는 것이라지만, 황명에 의한 처벌은 상대가 누구이건 간에 차별해선 안 됐다.
직접 명령하지 않았을 뿐이지 의금부를 무능하게 내버려 둔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다른 기관도 아닌 의금부가 뒤를 봐준다는 소문이 돌면, 무화 하련솔의 이미지가 지저분해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차라리 그를 억울한 피해자 입장으로 오래 내버려 두고, 뒤늦게 우연한 계기로 결백을 확인 받도록 하는 게 좋았다.
그런 의미에서 초롱은 참 쓸 만한 패였다. 마침 필요하던 제보자 역할에 딱 맞추어 뛰어든 것을 보면 그랬다. 남들에겐 기분 좋을 우연도 이림범에겐 당연지사였다. 그가 필요로 하면, 그게 무어건 늦지 않게 주어진다. 마치 중력이나 시간의 흐름처럼 자연스럽게 말이었다.
이제 그에게는 더 중요한 조사가 주어졌다.
‘허수아비에, 투명 인간이라고…?’
복도 밖으로 나선 황제 앞을, 양채림 상궁이 부드럽게 가로막았다. 그녀는 무화 윤슬찬의 근신을 직접 관리하겠다고 나섰다. 오늘 심문으로 치료된 두 손으로는 피아노를 칠 수 없게 압수하고, 앞으로는 전담 시종도 붙이지 않겠다고 했다.
진땀 흘리는 양 상궁을 향해 이림범이 대꾸했다.
“악기는 내버려 두고, 시종만 떼어내.”
한때 어린 피아니스트였던 윤슬찬의 사정이야 이림범이 구태여 봐줄 필요는 없었다. 다만 그는 사람을 다루는 법을 알았다. 억지로 목줄을 조이고 자유를 빼앗는다고 해서 개선되는 문제는 없었다. 한때는 그 또한 보이지 않는 목줄을 차고 자유를 빼앗긴 아이였으므로, 그에 대해서라면 아주 잘 알았다.
“양 상궁.”
“네, 폐하.”
양채림을 통해 황제가 확인코자 하는 일은 따로 있었다.
“무화 하련솔에 대해 떠오르는 것을 전부 말해 보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