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73화 (73/135)

73.

누구도 칭찬해 주지 않아 본인도 몰랐을 뿐, 아이는 천성이 착하고 순했다. 아이를 만족시키는 건 무척 쉬웠다. 따듯한 밥과 조미김 반찬, 잘 데워진 방과 포근한 이불, 그리고 이은재가 있으면 됐다. 그것만으로도 아이는 행복했다. 세 가지 조건이 저에게 매질하는 스님과 함께한다 해도, 등의 상처가 아무는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 새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려 들어도, 그래도 아이는 좋았다. 감금으로 인한 칩거와 아슬아슬한 자유 생활, 두 가지 시간 모두에 이은재가 함께했으므로.

본디 아이는 남의 말에 쉽사리 수긍했다. 저에게 악귀가 씌었다는 스님의 말도 그러려니 받아들였고, 그런 저를 멀리 고야읍으로 쫓아내 버린 아버지의 선택 또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이는 종종 40분씩 걸었다. 마을 초입의 공중전화 부스까지 내려가, 외우고 있는 유일한 번호로 전화를 걸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때마다 수신 거부 신호를 듣고 돌아서야 했다. 다시 40분을 걸어 절간으로 돌아가면서, 아이는 어머니의 거절을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다 나한테 문제가 있어서 그런 거야.’

그런 저를 회주께서 언젠가는 고쳐주실 테니까. 그러고 나면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고 그랬으니까. 그러니 괜찮다…. 아이는 어른들의 말을 모두 믿었다. 저를 내친 아버지를 믿었고, 목소리 한 번 듣기 어려운 어머니를 믿었고, 어디에서건 신처럼 군림하는 회주, 가피 스님을 믿었다. 그야말로 꾸역꾸역, 억지로 고개 끄덕이는 믿음이었다. 그래야만 하기에, 그러지 않으면 더 크게 고통스러울까 봐.

그런 아이의 순종적인 태도는 이은재의 곁에서 비로소 빛을 발했다. 은재가 먹자는 것, 놀자는 것, 가자는 곳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 ‘응’ 하고 고개를 끄덕이면, 행복한 일이 생겼다. 은재가 주는 음식은 전부 달콤하고 맛있었다. 은재가 알려주는 놀이는 모두 재미있고 즐거웠다. 은재가 데려가 준 비밀기지, 과수원 밭, 도롱뇽이 사는 개울가는 온통 평화로웠다.

이은재는 곧 행복의 이름이었다. 이은재와 함께 아이는 행복한 날을 늘려 갔다. 은재가 저를 ‘도깨비’라 불러도 좋았고, ‘애기’라며 순 아기 취급을 해도 좋았다. ‘백구’라고 부를 때면 머리를 쓰다듬어주어서, ‘작은 친구’라고 칭할 때면 어깨동무를 해 주어서 좋았다. 고야읍의 아이들 모두 은재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아이의 존재를 당연하게 여겼는데, 그것 또한 아이에겐 행복이었다. 이은재를 대장으로 한 무리의 일원으로 저를 받아 들여준 듯해서, 아이 인생에 소속감일랑 그것이 처음이어서, 아이는 행복했다.

여름에 은재를 만나 겨울을 맞이하면서, 아이는 더는 부모님을 그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저를 시골 절간에 처박아놓고 잊어버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스님을 통해서만 연락할 뿐 저를 찾지 않는 아버지의 무심함도, 일절 소식을 들려주지 않는 어머니의 외면도 도리어 잘된 일이었다. 가끔은 궁궐 안을 함께 뛰놀던 동생이 보고 싶긴 했다. 그러나 그리움은 그게 전부였다. 그밖의 것들이 워낙에 고통스러웠던 탓이었다.

‘여기엔 은재 형이 있으니까.’

물길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져 더는 계곡에서 놀 수 없게 되었을 무렵, 아이는 팔다리가 길어졌다. 몸은 여전히 마른 편이었지만 전과 같이 기아처럼 보이진 않았다. 순전히 은재가 안겨 준 관심 덕분이었다. 은재와 함께 다니며 마을 곳곳에 아이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많아지자,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스님이 적당한 수준으로 아이에게 밥을 주고 방을 주고, 매질 후에는 반드시 걸칠 옷을 준 것이었다.

그 덕에 초겨울의 밤, 아이는 춥지 않았다. 은재와 함께 계곡 물가에 앉아 해가 저무는 풍경을 구경하면서, 아이는 두툼한 누빔이 진 검은색 외투를 입고 있었다. 스님이 한 벌 건네준 겨울 외투였는데 밑단이 벌써 해져 회색이었다.

그리고 아이는 은재의 부모님을 만났다. 밤이 되어도 집으로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 아들을 데리러, 그의 아버지가 직접 찾아온 것이었다. 어른의 인기척에 아이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그는 아이를 발견하고는 호의적인 태도로 말을 붙였다.

“너구나. 우리 은재 새 친구가.”

아이는 은재의 다정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이전에 은재가 그랬듯이, 은재의 아버지 또한 선뜻 아이의 손을 잡고 절간 앞까지 바래다준 것이었다. 아이가 도리질을 치며 사양해도 소용없었다. 왼손에는 낯설고도 다정한 어른의, 오른손에는 따듯한 은재의 손을 잡고 아이는 산골짜기 나무 계단을 올랐다. 그 시간이 꿈결 같았다.

산책이라도 하는 양 여유롭게 도착한 절은 껌껌했다. 퇴마에 꼭 필요하다는 물건을 구하러, 가피 스님이 서울에 가 돌아오지 않은 탓이었다. 그의 부재가 벌써 사흘째였다. 아이는 어두컴컴한 흙길을 익숙하게 가로질러, 제 작은 방 앞에 도착했다. 그러곤 고개를 꾸벅 숙이며 낯선 어른의, 그보다 더 낯선 친절에 감사를 표했다.

은재의 아버지는 그런 아이의 손을 다시금 고쳐 잡았다. 그리고 질문했다.

“얘야. 몇 살이니?”

그러자 아이가 짧게 고민했다. 은재 형은 곧 중학교에 들어갈 거라 했다. 그런 형 앞에서 아이는 어린애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내년에 열두 살 돼요.”

애써 한 살이라도 많아 보이려 꺼낸 대답에 어른이 피식 웃었다. 안면 가득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가 말했다.

“이 산중에 널 혼자 두고 갈 순 없어. 오늘 밤엔 눈이 내릴지도 모르는데, 폭설에 갇히기라도 하면 큰일이잖니.”

진지하게 건넨 걱정에 아이가 눈을 끔벅였다. 고개 들어 살펴본 하늘에는 별이 많았다. 코를 타고 시원하게 스미는 공기 또한 맑기만 했다. 어린 머리로 추측하기로 폭설이 내릴 것 같진 않았다.

벙찐 아이 앞에서 은재가 제 아버지의 귀에 대고 무어라 속삭였다. 그러곤 고개를 끄덕이는 허락을 받아냈다. 활짝 웃음 지으며, 은재는 아이의 손을 덥석 쥐었다.

“오늘 내 방에서 자도 된대! 가자!”

절간에서 벗어나 하산하는 길은 오르던 때보다 훨씬 짧게 느껴졌다. 거의 뛰다시피 하며 은재는 신이 나 웃었고, 아이는 어리둥절한 설렘을 안고 그를 따라 바삐 움직였다.

은재의 집은 정원이 딸린 2층 주택이었다. 붉은 지붕을 올려다보며 아이는 내심 놀랐다. 잠이 오지 않는 밤마다 아이는 산골짜기 위에서 마을을 내려다보곤 했는데, 그때마다 눈여겨 살펴보았던 집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었다. 정원은 아름답고 지붕은 깨끗해서, ‘동화 속 주인공이 사는 집’이라고 홀로 생각했었다. 의심의 여지 없이 마을에서 가장 좋은 집이었다.

현관으로 들어가는 길에 은재는 정원의 백구, 덕순이를 집안으로 들였다. 은재의 아버지는 익숙하다는 듯 개와 소년들을 욕실로 몰았다. 그러곤 샤워기를 틀어, 큼직한 개와 두 소년의 발을 순서대로 겨냥했다. 아이들의 발바닥에서 개보다 더 진한 구정물이 흘러나왔다.

따듯한 수건에 발자국을 턱턱 찍자마자, 은재는 2층 안방으로 뛰어 올라갔다. 아이는 눈치를 살피며 머뭇거리다 그의 뒤를 따랐다.

온기 감도는 복도에서 아이는 문틈 새를 바라보았다. 수많은 액자와 그림, 책이 한가득 쌓인 침실에 은재의 어머니가 누워 있었다. 은재는 제 어머니의 옆자리로 달려가 폴짝 뛰어오르더니, 모로 함께 누워 무어라 귓속말을 속삭였다. 그러자 어머니가 은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정에도 뿌리가 있음을 아이는 배웠다. 손을 잡아주는 아버지가 있고 머리를 만져주는 어머니가 있기에, 은재도 아이에게 제가 받은 것을 그대로 전해 온 것이었다. 아이는 그 다정에 마음을 빼앗겼다. 이은재가 좋은 만큼 이은재의 부모님도 좋았다.

“엄마. 내가 말한 친구야.”

뻣뻣한 태도로 선 아이를 그렇게 소개한 뒤, 은재는 아이를 제 방으로 데려갔다. 책과 게임기, 풀다 만 학습지가 놓인 방은 무척 포근했다. 구석 자리에는 정사각형 냉장고가 있었는데, 그 속이 과자로 꽉 차 있었다.

은재와 한 침대에 앉아 아이는 밤새도록 키득키득 장난을 쳤다. 별것 아닌 사소한 수다에도 신이 나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다정한 가정집의 분위기에 완전히 정신이 빠져버려, 아이는 들뜬 기분에 가감 없이 웃었다.

“야, 네 웃음소리 처음 들어봐.”

하얀 이를 드러내며 은재가 말했다. 아이는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았다. 아이 또한 제 웃음소리를 그날 처음 들었다.

은재의 아버지가 했던 말과 달리 밤새 눈은 한 송이도 내리지 않았다. 이튿날 해가 밝자마자 아이는 절간으로 돌아가야 했다. 서울에서 돌아온 스님이 곧바로 아이를 데리러 온 탓이었다. 가식적으로 위선을 떠는 가피 스님에게, 은재의 아버지는 아이의 손을 넘겨주었다. 그 손을 다정한 척 움켜쥐는 가피 스님은 은재의 말마따나 ‘땡중’이 맞았다.

이은재의 집에서 지낸 하룻밤은 신기할 만치 완벽했다. 딱 그만큼, 다시금 절간으로 돌아간 순간 아이는 불행했다. 아이의 눈에 비로소, 이전에는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던 불운이 보였다.

끔찍할 만큼 익숙해진 작고 어두운 공간, 부적 붙은 창고 방 안의 반상 위에 앉혀진 순간, 아이는 생애 처음으로 의심을 품었다. 그리고 반항했다.

“나한테 악귀가 씐 게 진짜 맞아요?”

아이의 외침에 가피 스님이 동작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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