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스물일곱 번째 여름, 이림범에게 있어 하련솔은 선물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느껴본 기쁨이자 설렘이었다. 그가 머무르는 변두리 처소, 개구멍이 황제의 숨구멍이 되기 충분할 정도였다. 덕분에 이림범은 더는 악몽을 꾸지 않았다. 이은재 또한 더는 꿈에서조차 볼 일이 없게 되었다. 야속하게도 그는 지옥 같던 유년기 기억에만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이림범은 괜찮았다. 한때는 불에 타 죽는 고통이 얼마만큼 큰가 하는 물음에 집착했고, 이은재의 무덤 앞에서 밤을 새우며 죽은 이가 깨어나길 기다리기도 했었지만, 그 모든 추모를 이제는 그만둘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오늘날 그의 문정궁에 하련솔이 있기에 가능한 회복이었다.
딱 그만큼, 이림범은 하련솔을 알았다. 그의 성격, 입맛, 건강도 그랬지만 특히나 외모를 세밀히 살펴 왔다. 몇 번이고 그에게서 이은재를 향한 향수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이림범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곤 이은재와 전혀 다른 면들뿐이었다.
“형이… 왜.”
잇새로 흘러나가는 상념을 막아내지 못해, 이림범은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왜 여기에…, 왜 이런 모습으로….”
그의 손끝이 조심스럽게 하련솔의 뺨 위를 쓸어내렸다. 핏줄이 비치도록 희고 얇은 피부는 연약하기 짝이 없었다. 커다란 눈망울과 아래로 길게 뻗은 속눈썹은 순종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벌어진 입술은 보는 이의 마음이 다 약해지도록 말랑했고, 살짝 드러난 아랫니는 초식동물을 엿보는 것 같았다.
개화병을 앓았으니 체중이 줄고 수척해지는 건 크게 문제가 아니었다. 긴 시간 외톨이로 살았으니 기백이 꺾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머리칼과 눈썹의 흑단처럼 검던 색, 밤하늘보다 더욱 진하고 또렷하던 눈동자의 빛까지 달라진 건 너무나 이상한 일이었다. 평생토록 그를 그리워한 이림범조차 알아볼 수 없게, 이은재는 변해버렸다. 신이라는 작자가 그라는 남자를 물에 담가놓고 희석하기라도 한 것 같았다. 온몸의 털과 피부의 색이 다 빠졌고 존재감도 흐려졌다.
이림범은 이은재를 똑바로 기억하고 있다고 자부해 왔다. 사진 한 장 없음에도 아쉽지 않을 정도였다. 그에게 있어 이은재는 커다란 영웅이었고 강인한 용사였다.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에, 이은재는 열다섯 살 소년이었다. 오늘날 하련솔의 나이가 스물아홉이었다.
‘그럼 지금보다 더… 작았을 텐데. 은재 형이… 이렇게나 작았었다니.’
어른보다 더 어른스럽던 이은재도 사실은 소년이었다. 거인처럼 크지 않았고 영웅처럼 강하지 않았다. 이림범의 기억 속 이은재가 단숨에 덩치를 줄였다. 지금의 하련솔보다 작고, 지금의 이림범보다는 훨씬 더 작은, 어린 소년으로 돌변했다. 그런 이은재가, 이림범은 도리어 좋았다. 어린 시절 제 손을 잡고 몇 번이고 진창에서 끌어 올려주던 이가 영웅도 용사도 아닌, 작고 어리숙한 소년에 불과했다는 게 너무나 좋았다.
“형.”
애정을 담아 부른 말에 하련솔이 눈을 깜빡였다. 밀려드는 과거의 기억에 이림범이 혼란스러운 만큼, 하련솔도 상대의 정체를 추측하느라 바쁜 눈치였다. 장난스러운 미소로 입가를 환히 밝히며 이림범이 물었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겠어?”
그러자 하련솔이 끄덕끄덕 고개를 움직였다. 강한 확신을 가진 듯한 동작에 이림범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리움에 휩싸여 그가 행복을 느낄 때쯤, 하련솔이 헛소리했다.
“너 걔 아냐? 엄마랑 같이 놀러 왔던… 부잣집 도련님.”
“…그건 혁이고.”
황당함에 이림범이 실소했다. 하련솔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 하고 의미 없는 소리를 흘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표정이 변했다. 예쁜 별장에 놀러 왔던 부잣집 도련님이 이차혁이라면, 이차혁의 형제인 이림범이 누구인가는 뻔한 문제였다.
웃는 낯으로 이림범이 입을 열었다. 아주 오랜만에 해묵은 이름으로 저를 소개할 차례였다. 그러자 의지와 달리 형편없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가 빠져나갔다.
“나야…. 나, ‘도깨비’….”
말끝에 이림범은 제 입술을 짓씹었다.
하련솔의 두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그는 언제나 이림범에게 위로를 줬다. 당장 지금만 해도 그러했다. 상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서 마냥 반가운 듯 웃던 하련솔이, ‘도깨비’ 세 글자에 눈썹을 퍽 구기며 눈시울을 붉혔다. 혼란스러운 얼굴에서 깊은 향수가 느껴졌다.
제가 그를 그리워하였듯이 그도 저를 잊지 않았단 사실에 이림범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두 손으로 하련솔의 뺨을 감싸 쥐고, 연신 쓰다듬고 또 쓰다듬으면서 이림범은 애걸하듯 말했다.
“형…. 나야. 아직 모르겠어?”
“네가…, 어, 네가….”
“날 봐. 나 좀 제대로 봐 봐.”
말끝마다 이림범은 입맞춤을 남겼다. 하련솔의 벌어진 입술 위에 제 입술을 문지르고, 달아오른 뺨에 제 뺨을 맞댔다. 피부에 자국이 아로새겨지도록 깊은 포옹을 나누었고 점성 섞인 소리가 울리도록 그의 목덜미를 핥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무화의 시력을 회복시켜 주려는 이림범의 노력은 하련솔의 발버둥만 자아낼 뿐이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당황한 하련솔이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그를 밀어냈다. 그러면서 그는 제풀에 나가떨어져, 좁은 방의 벽면에 뒤통수를 찧었다.
“뭐, 뭐 하는 거야….”
아픈 뒤통수를 손으로 문지르며 하련솔이 속삭였다. 목덜미가 빨갛게 달아오르고 얼굴 위엔 약간의 원망이 스민 채였다.
그에 비해, 이림범은 조급했다. 당황한 이에게 진정할 새도 주지 못하고 그는 제 상의를 벗었다. 진땀에 젖어 답답해진 셔츠 단추를 뜯어내다시피 하며 풀고, 커다란 어깨가 드러나도록 옷깃을 홱 젖히자 하련솔이 기겁했다. 희미한 시야로도 이림범의 피부색은 충분히 잘 보였다. 눈앞이 살빛으로 꽉 차는 바람에 하련솔은 괜스레 제 앞섶을 꽉 여몄다.
“야, 뭐 하는 거야! 옷을 왜 벗어?”
노출을 감행한 건 이림범인데 얼굴이 새빨개진 쪽은 하련솔이었다. 두 다리를 꼭 맞붙이고 양팔로 가슴 앞에 엑스자를 그려놓은 그를 보며 이림범은 웃었다. 상의를 완전히 벗어 던진 채 그는 하련솔을 단숨에 덮쳤다. 커다란 남자의 상체에 갑작스럽게 내리깔려, 하련솔이 헛숨을 헉 들이켰다. 이림범은 그런 그의 손을 덥석 움켜쥐고 제 옆구리에 가져다 댔다. 하련솔이 주먹을 꽉 쥐며 거부해도 소용없었다. 하련솔은 너무나 약했고, 이림범은 지나치게 건강했다.
고개를 돌린 채 이림범을 쳐다보지 않으려 노력하던 하련솔이 움찔, 잡힌 손목을 굳혔다. 그러곤 꽉 쥔 주먹을 서서히 풀었다. 이림범이 잡았던 팔을 놓아주어도 그는 도망가지 않았다. 다만 제 손날에 닿았던 살결을 더듬더듬, 자진해서 만져 보았다.
피아노 건반처럼 칸칸이 탄탄한 윤곽을 자랑하는 옆구리를 지나자, 손끝에 닿는 피부의 결이 돌변했다. 어째선지 울퉁불퉁한 선이 만져지는 것이었다. 그 자국을 가로로 따라 훑다 손을 위로 움직이자 두 번째, 진한 흉터 줄에 손금이 닿았다. 당황하며 네 손가락을 펼쳐 이리저리 만져보아도 흉터가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보드라운 살가죽으로 덮여 있어야 할 젊은 황제의 등은 온통 기다란 흉터 줄로 가득했다. 화살나무 회초리를 부러뜨릴 때까지 얻어맞은 흔적이었다.
하련솔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이마가 구겨지고 눈썹 끝이 아래를 향했다. 떨리는 입술이 느릿하게 열렸다.
“너….”
이제 하련솔은 이림범을 거부하지 않았다. 황제로 보고 사내로 보아 밀어내기 바쁘던 손도 태도를 바꿨다. 거센 흔적으로 남은 과거의 상처를 연신 쓰다듬을 따름이었다.
이림범의 애가 다 타 버리도록 천천히, 하련솔이 말했다.
“네가 정말 도깨비야? …그 조그만 애기가 너란 말이야?”
“애기가 아냐.”
이림범이 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오늘날 그는 지난날의 그 조그만, 이름도 없고 기운도 없고 삶의 의지도 없던 불행한 아이가 아니었다.
“백 번 천 번을 상상하고 소원했어. 형한테 내 이름을 알려주고, 형이 날 제대로 불러 주기를….”
하련솔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허공을 향해 흔들리던 눈동자도 차츰 안정되더니, 비로소 이림범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잘 자랐다’는 칭찬을 수십수백 번 듣고 살아온 그였다. 그러나 지금의 제 모습을 정말로 보여주고 싶은 이는 따로 있었다. 애석하게도 눈이 멀어 버려, 숨 가쁘게 떨리는 이 순간에도 그는 저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형편없이 흔들리는 목소리를 내어 이림범이 말했다.
“안녕…, 은재 형. 다시 만나서 반가워….”
“…….”
“내 이름은… 이림범이야.”
말을 마치고도 그는 입을 제대로 다물지 못했다.
“범아.”
긴 시간을 건너, 오래도록 기다려온 답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