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77화 (77/135)

77.

이은재는 이림범에게 갈증을 주는 이름이었고, 하련솔은 그 모든 걸 해갈하는 이름이었다.

반짝반짝한 이은재의 존재는 어린 날 이림범으로 하여금 제 모자람을 한탄하게 했다. 덜 자란 키, 비쩍 마른 몸, 어눌한 말씨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어리숙한 면이 어찌나 미웠는지 몰랐다. 사랑받는 자식이 되지 못한다는 타의에 의한 문제까지도 순전히 제 잘못 같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오늘, 하련솔의 곁에서 이림범은 비로소 어른이었다. 여태껏 아무런 기쁨도 성취도 느끼지 못한 채 그저 의무에 의해 답습해 온 자산이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은 하련솔의 곁에서 빛을 발했다. 평균 성인 남성의 그것을 훨씬 웃도는 빼어난 육신, 황제라는 자리에 앉아 누리는 권력, 원 없이 베풀어도 곳간이 바닥나지 않는 부귀가 그에겐 있었다. 이림범이라는 이름 또한, 비로소 의미를 되찾았다.

“다시, 다시 불러 줘….”

이림범이 말했다. 애걸복걸하며 속삭이는 소리에 하련솔이 작게 탄식했다. 긴장한 듯 떨리는 음성, 달리기를 마친 사람처럼 가쁜 숨, 연신 크게 부풀었다가 꺼지길 반복하는 흉통의 움직임…. 표정을 보지 않고도 이림범을 읽어내릴 방법은 많았다. 그를 가득 채운 커다란 감격이 일부 하련솔에게도 옮겨왔다.

“…범아.”

마른 침을 꼴깍 삼킨 뒤 하련솔이 말했고,

“다시.”

이림범이 간청했다.

“범아…. 범아.”

하련솔은 그의 등을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비쩍 말라, 가엾기 짝이 없던 꼬마 아이가 오늘날 젊은 황제라는 사실이 믿기질 않았다. 환골탈태를 넘어선 변신이었다.

돌이켜 보면, 어린 시절에도 아이네 집안이 참 이상하다곤 생각했었다. 아이는 시골 마을의 절간 창고에 갇혀 지내건만, 아이의 동생은 좋은 옷을 입고 잘 다듬어진 모습으로 자신감을 풍기며 등장했으니 말이었다. 서울 깍쟁이 도련님이 아이에게 ‘형’, ‘형’하며 친근하게 구는 모습이 이상했다. 그 도련님만의 엄마인 듯한 예쁜 아주머니도 참 이상했다. 그러나 복잡한 사정을 지닌 집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었다. 아버지가 두 집 살림을 차린다거나 어머니가 자식들을 두고 도망간다거나, 형제자매 간에 다른 배에서 태어난다거나 하는 일이 고야읍에도 있었다. 아이의 가족도 그저 그렇게, 흔히 있는 콩가루 집안일 거라 생각했다. 그 집안이 대단하신 황실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머릿속에 각기 다른 이름으로, 다른 존재로 정리되어 있던 기억이 한데 묶였다. 구불구불 줄을 지어 이어놓고 보니 이제야, 아이와 이림범이 한 사람이라는 게 이해됐다. 그에 하련솔은 이마를 찡그리며 눈을 감았다. 제 품 안을 파고드는 이림범의 몸짓이 그저 애틋하고 마음 아팠다. 벌거벗은 몸을 들이붓다시피 하건만 그에게선 흑심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화 앞에서 연정을 퍼붓는 황제이던 남자가, 첫사랑의 품을 갈구하는 어리숙하고 연약하던 아이로 돌변했다.

‘이런 건… 싫어….’

하련솔은 그게 싫었다. 이따금 ‘아이’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그는, 괜찮은 어른이 된 그를 기대했다. 찾아 나설 방법도 없고 연락할 수단도 없기에 기억 한편에 묻어놓고 지내면서도, 평범하게 교복을 입고 괜찮은 친구를 서넛 사귀는 아이의 모습을 상상했다. 다른 이들이 그러듯이 욕설도 조금 배우고, 또래 은어도 섞어 쓰기도 하며, 축구를 하고 게임을 하고, 처음 사귄 애인에게 차이기도 하면서 평범한 일상을 살았으면 했다.

아이가 황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풍문으로만 들었더라면 기쁘게 축하했을지도 몰랐다. 참 잘됐구나, 인생이 대박 났나 보다, 쉽게 생각했다면 그랬을 터였다. 그러나 여태껏 곁에서 보고, 피부로 느껴온 모습이 있어 그저 웃을 수만은 없었다.

이림범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이마 위로 쓸어 넘겨 주자, 그가 손길 받길 좋아하는 짐승처럼 머리를 기대어 왔다. 하련솔은 두 눈을 꽉 감고서 침음했다. 두 손 뻗어 황제의 머리를 어루만져 주며, 그가 속삭였다.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났는데… 왜 너한테는 아직도 나뿐인 거야?”

다만 그게 싫었다. 제 인생에 함부로 가엾게 여기며 어려운 애정을 품은 이가 둘 있는데, 하나는 아픈 유년기를 지닌 아이였고 둘은 속을 채운 성화와 다투기 바쁜 이림범이었다. 하필 그들이 같은 사람이라는 게 싫었다. 한 사람이 전부 떠맡기에는 너무 무거운 인생이었다.

어른이 됐으면 이젠 잘 지내야지. 황제가 됐으면 그만 행복해져야지. 내가 베푼 어둑한 친절일랑 그만 잊고, 내일로 쉽게 나아갔어야지. …긴긴 잔소리가 하련솔의 입안에서 맴돌았다. 그러나 늘 그렇듯, 그는 상대가 내놓지 않는 말을 구태여 꼬집어 캐내는 법 없었다.

도리어 말꼬리를 붙드는 이는 이림범이었다.

“그래서 속상해?”

기쁜 듯 묻는 말에 하련솔은 기가 막혔다. 네가 여전히 불행해 보여서 걱정이라는 사람 앞에서, 이림범은 제 불행 따위는 아무래도 좋고 하련솔의 감정만이 중요한 모양이었다.

“속상하지, 그럼….”

한숨 같은 웃음소리를 섞어 하련솔이 말하자,

“그럼 책임져.”

이림범이 기다렸다는 듯 팔을 뻗었다. 그와 동시에 바닥에 털썩 쓰러져 있던 하련솔의 허리가 대뜸 허공에 떴다. 마른 옆구리 뒤로 손을 비집어 넣어, 이림범이 그의 상체를 덥석 안아 든 것이었다. 상체뿐만 아니라 엉덩이까지 덜렁 들려서는, 하련솔은 단숨에 이림범의 다리 위에 안착했다. 어른이 어린아이를 껴안듯이 단단히 붙들고 안아주기에 하련솔은 놀라 목젖이 튀어나올 뻔했다.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허리를 쥔 손을 떼어내려 해도, 그의 약한 반항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림범은 더는 귀엽지 않았다. 그의 말마따나 그는 더는 ‘애기’가 아니었다.

“은재 형. 형을 좋아했어…. 형도 알았겠지만.”

낮고 중후한 목소리에서 열 기운이 폴폴 풍겼다. 긴장하다 못해 소름이 끼쳐, 하련솔이 어깨를 바짝 움츠렸다.

“이거 내려놓고 말하면 안 될까?”

회유하듯 뱉은 말에 이림범은 끄덕조차 하지 않았다. 다만 제 속을 채운 말을 주저 없이 전했다.

“솔이 형…. 형을 좋아해. 벌써 네 번 말했지만.”

“…그걸 다 세고 있었어?”

“나는 같은 사람한테 두 번 반했어. 형이 좋아. 정말 좋아해. 너무 좋아해서 미치겠어.”

다섯 번, 여섯 번째 고백하며 그는 하련솔의 가슴팍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일곱 번째 제 마음을 전하면서는 야트막한 가슴에 높은 콧대를 뭉개려는 양 처박고 살 내음을 들이켰다. 하련솔의 온몸이 단숨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내 영민한 황제의 뇌리에 작은 깨달음이 내려앉았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근본이 있다. 어린 날 이름 없는 아이를 기억하는 하련솔이 이림범을 제대로 알아본 것처럼, 이은재라는 상냥한 소년을 기억하는 이림범도 하련솔을 똑바로 바라보고 머릿속에 새겨 넣을 수 있었다. 아무렇게나 지어낸 유령, 한솔이 아니라 계곡 물가에 볕을 받으며 실재했던 소년, 이은재를 바라보는 식이었다.

그러고 보니 참 공교로웠다. 이제는 은재 형을 놓아주겠다고, 무화 하련솔을 있는 그대로 좋아하노라고 스스로 다짐한 끝에 하련솔을 잊어버렸으니 말이었다.

“이제야 알겠어…. 어떻게 해야 내가 형을 기억할 수 있는지.”

하련솔의 가슴에 턱을 괸 채 이림범이 속삭였다.

“그런데 그걸로는 안 되겠어. 그걸로는 만족 못 해, 난.”

콩, 콩, 콩… 하련솔의 심장이 빠르게 내달렸다. 놀란 무화의 몸에 곧 담이 걸리고 쥐가 오를 것을 알기에 이림범은 그의 목덜미를 큰 손으로 미리 붙잡아 받쳤다. 엄지를 부드럽게 굴리며 주무르는 손길도 자연스러웠다. 마른 목이며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 더운 육신을 꼼짝 없이 내맡긴 채 하련솔이 헛숨을 들이켰다.

“형에게 필요한 것, 내가 다 가졌어.”

제 한 품에 들어오도록 연약해진 첫사랑을 향해 이림범이 맹세했다.

“이젠 내가 형에게 줄 거야. 그게 뭐든지, 얼마든지… 내가 채워 줄게. 형의 이름, 얼굴, 존재….”

제 눈앞의 아름다운 남자를 모두의 기억에 아로새길 것이었다. 수십 수백 명의 머리를 열고 뇌에 부조를 새겨야 한대도, 이림범에겐 그럴 자신이 있었다. 제가 하련솔을 잊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듯이, 모두가 그를 기억하게 될 것이었다.

“아무도 형을 잊지 못하게 만들 테니까.”

긴 시간을 지나 다시 만나게 된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이림범은 굳게 믿었다. 운명이 그에게 말을 거는 듯했다. 이번에야말로 네가 이은재의, 하련솔의 보호자이자 구원자가 될 차례라고.

이림범이 대비한 것과 같이, 놀란 하련솔의 몸에 쥐가 올랐다. 목덜미를 꽉 잡힌 채 황제의 너른 품에 안겨 하련솔은 손끝을 움찔거렸다. 작은 경직이 풀릴 때까지 이림범은 그의 마른 몸 곳곳을 주무르고 쓰다듬어 주었다. 저릿저릿한 기운을 완전히 쫓아낸 뒤에는 아이에게 그러듯이, 하련솔의 둥근 이마에 입맞춤을 남기기도 했다.

상황이 어리둥절하고 몸 상태가 저질이라, 하련솔은 이림범의 의중을 바로 알아채진 못했다. 그러나 성질 급한 황제는 제가 뿜어낸 열의의 의미를 금세 드러냈다.

그들의 해묵은 조우를 방해하는 자가 나타나, 처소 밖에서 낯선 목소리로 외쳤다.

“황명에 의해 수색차 찾아왔습니다! 무화 하련솔은 잠시 처소를 비워 주십시오.”

갑작스러운 방문 소식에 하련솔은 당황했다. 그러나 그 명령을 내린 황제인 이림범은 올 게 왔다는 듯 덤덤했다. 사사로이 사용된 부적이며 저주 인형 따위를 샅샅이 찾아내어 제거하고자, 의금부 직원이 도착한 것이었다. 늦디늦은 시간이었으나 마흔한 번째 무화와 그의 처소를 기억해낸 것 자체를 높이 살 만했다.

이림범은 하련솔을 아주 조심스럽게 침상 위에 눕혔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기에, 하련솔이 허둥지둥하며 외쳤다.

“너, 옷…, 옷 안 입었어!”

커다란 가슴팍이 움직거리도록 어깨를 끌어올리며, 이림범이 웃었다.

“알아.”

그러곤 처소 문을 벌컥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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