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78화 (78/135)

78.

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

10월 14일. 황실 조회 기록. 서기 윤민하 작성.

황제가 회의의 시작을 알리다.

승정원에서 전일의 황명을 기록한 서류를 제출하다. 그리고 자문을 전하다.

승정원 팀장이 말하기를, “폐하, 의금부를 시켜 궁궐 일대를 수색한 일의 뒷정리를 모두 마쳤습니다. 사사로운 주물을 없애고 물신숭배를 파하고자 하신 뜻을 모두가 이해하고, 그에 따를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어젯밤 폐하께서 나신인 채 모 무화의 처소에서 모습을 보였다는 등 궂은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하다.

황제가 말하기를, “내가 미리 말 안 해주고 수색해서 삐졌어? 승정원만 빨리 퇴근한 걸 어떡해.” 하다.

승정원 팀장이 말하기를, “꼭 그런 건 아닙니다.” 하며 두어 마디 이야기를 덧붙이나, 제대로 들리지 아니하다.

황제가 말하기를, “소문이 참 발칙하군. 그건 사실이 아니다. 내가 미쳤다고 하체까지 다 내놓고 아무 데나 돌아다니겠느냐?” 하다.

승정원 팀장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안심입니다. 헛소문을 단단히 입막음을 시키겠습니다.” 하다.

황제가 말하기를, “그래, 정정 좀 해 줘. 하체까진 아니고 상체만 보여줬거든. 그리고 모 무화의 처소가 아니라 무화 하련솔의 처소였다. 내 직접 그 처소를 살펴보니 문제가 많더군. 해서 오늘 내로 무화 하련솔의 처소를 교태전으로 옮기고자 한다.” 하다.

일제히 논의하다.

황제가 말하기를, “민하 씨. 우리 민하 씨 목소리 좀 들어볼까? 10월 1일 회의 기록 좀 낭독해 봐. 오전 10시 30분, 여기 승정원 팀장님 발언부터.” 하다. 그에 서기 윤민하가 이하 발췌 내용(10월 1일. 황실 조회 기록. 서기 윤민하 작성.)을 소리 내어 읽다.

승정원 팀장이 말하기를, “하련솔의 처소는 누구나 드나들 수 있게 생겼습니다.” 하다.

홍문관 부제학 교수가 말하기를, “맞습니다. 담장도 낮고, 특히나 부엌 창고는 문만 밀 줄 안다면 아무나 들어갈 수 있겠는데요.” 하다.

일제히 논의하다.

여러 부서에서 동시에 말하기를, “일을 너무 키우셔선 안 됩니다.” 하다.

황제가 말하기를, “조언을 해 주면 좀 들으라고 한탄할 땐 언제고, 내가 여러분의 이야기를 귀담아듣겠다는데 뭐가 문제야? 무화 하련솔의 처소에 문제가 많다고 하지 않았어? 그러니 더 튼튼하고 좋은 처소로 옮겨주겠다는데, 이번엔 뭐가 불만이야?” 하다.

의정부 일원이 입을 모아 말하기를, “처소를 옮긴다 해도 어째서 교태전입니까?”, “일개 무화를 교태전으로 옮기는 일엔 필시 반발이 따를 것입니다.”, “뒤따를 바람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하다.

황제가 말하기를, “처소마다 이미 주인이 있는데 그럼, 무화더러 둘씩 짝지어 룸메이트를 하라고 할까? 교태전이 뻔히 남아있는데 거길 굳이 비울 이유가 뭐가 있어.” 하다. 더불어 홍문관 부제학 교수의 제자를 홍문관 직제학으로 벼슬을 내리다.

일제히 논의하다.

일제히 논의하다.

일제히 논의하다.

황제가 말하기를, “그래, 양껏 떠들어 둬. 하련솔은 곧 품계를 초월할 텐데, 그때 가선 감히 그 이름을 입에 담을 수나 있겠어? 지금이 기회지.” 하다. (품계를 초월한 자는 정실 황후 1인을 의미한다. 서기 윤민하 덧붙임.)

여러 부서에서 동시에 말하기를, “성급하게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하다.

황제가 말하기를, “나더러 어쩌라고? 내년이면 솔이 형이 서른 살인데, 벌써 두 달밖에 안 남은 걸 어떡해. 형이 아직 이십 대일 때 빨리 황후로 만들고 싶다고.” 하다.

황제가 말하기를, “지금도 몸이 연약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생긴 것만 이십 대 초반이지 몸 상태는 노인 정도 되는 거 같아. 신체 나이 계산해 보면 아흔 정도로 나오는 게 아닐까 모르겠어. 좀 놀라기만 해도 담이 걸려서 꼼짝을 못 하는 게 얼마나 불쌍하고 마음 아픈지 알기나 해? 바짝 굳어서는 숨도 잘 못 쉬는데 내가 꼭 옆에서 주물러 줘야 겨우 낫는단 말이야. 목이고 손목이고 발목이고 가냘파서는 그 얇은 데에 쥐 오를 게 뭐가 있다고 아파, 아프길? 나 원 참. 그런 사람을 어떻게 그 쪼그만 개구멍에 더 처박아 둬? 지금도 침실이 찹찹한데 겨울이면 바람 줄줄 새고 고드름 꽁꽁 얼 거 아냐. 내가 뭔 중국 황제인 줄 알아? 냉궁보다 못한 그딴 처소에서 우리 솔이 형을 어떻게 재우겠어? 형이 또 싫어하는 건 어찌나 많은지 몰라. 비 오는 것도 싫고 물놀이도 싫고 혼자 아픈 것도 싫다잖아. 나도 형이 혼자 아픈 건 싫으니까 잘된 일이지. 그야말로 천생연분이야. 안 그래? 내 침전이랑 제일 가까운 교태전에 형을 두고 자주 찾으면 딱 좋잖아. 흠.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왜 물을 무서워하지? 수영선수 뺨치게 물개인 걸 내가 다 아는데. 이따가 물어봐야겠네.” 하다.

황실 후궁 전담 실장이 말하기를, “폐하. 진정하십시오.” 하다.

황제가 말하기를, “형이 은근히 겁보란 말이야. 평소엔 성질이 똑 부러져서는 무화들 중에 제일 어른스러운 사람인데, 알면 알수록 물렁물렁한 면이 있어. 그런 점이 참 귀엽지. 야속할 정도로 무심한 사람이 아플 때만 가뭄에 콩 나듯이 투정하는데 그게 진짜. 하. 안쓰러운데 깜찍하단 말이지. 하필 개화병도 제일 지랄 맞게 심해서는 잘 고쳐지지도 않아. 손도 잡고 안아도 보고, 키스도 해 봤는데 눈이 잘 안 낫더라고. 이제 남은 방법이 몇 없는데 어떻게 해야 좋을까. 사실 딱 하나 있긴 한데. 그걸 하자면 더더욱 처소를 옮겨야지 않겠어? 일국의 황제가 미래의 황후와 대사를 치르고자 한다면 비루한 개구멍보다는 교태전이 훨씬 더 잘 어울리지.” 하다.

황제가 말하기를, “여태껏 먹인 게 얼만데 살도 잘 안 쪄. 형보다 그 뭐야, 후문 지키는 개가 더 무거울걸. 그런데 형은 그 쪼그맣고 마르고 연약한 몸으로 나랑 후사까지 봐야 할 거 아냐. 나이 들고 애 가지면 더 힘들다는데. 내가 대신 낳아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미치겠어. 아직 갈 길이 천만리야. 그런데 지금 팀장님들 일감이 중요해? 뭐 그리 바쁘다고 안 된다, 기다려라, 참아라 이 발광들이야? 내가 얼마나 오래 기다려 왔는지 알기나 해? 성급하긴 도대체 뭐가 성급하다는 건지. 나야말로 인생 계획이 바빠 죽겠는데.” 하다.

황제가 말하기를, “민하 씨. 좀 전에 한 말은 기록하지 마.” 하다.

황제가 말하기를, “아니. 타자를 치지 말고 백스페이스를 누르라니까.” 하다.

일동 동의하에 회의의 쉬는 시간을 가지다.

황제가 회의의 재시작을 알리다.

승정원 팀장이 황제에게 몇 가지 자문을 전하나, 제대로 들리지 아니하다.

승정원 팀장이 말하기를, “우선 홍문관에 대해 논의해야겠습니다. 폐하께서는 홍문관을 의과 대학으로 만들 계획입니까? 현재 홍문관 소속 직원의 태반이 의학 연구원입니다.” 하다.

황제가 1분간 웃다.

황제가 말하기를, “내가 책임진 무화의 수가 마흔하나임을 잊었나? 그들이 평생 같은 병을 앓으며 고통받는 일이 그대들에겐 몹시 당연해진 모양이야. 내겐 조금도 그렇지 않다.” 하다.

승정원 팀장이 말하기를, “폐하. 개화병은 다른 질병과는 사뭇 다르지 않습니까. 전염되지도 않고 변이되지도 않습니다. 하물며 그 병은 무화의 자격과도 같은데, 만에 하나 병을 완치하게 된다 하면 그때는 무화를 어찌 가름합니까?” 하다.

황제가 말하기를, “역시 승정원은 나와 마음이 참 잘 맞아. 나보다 더 희망차기까지 하군. 나는 무화들을 좀 덜 아프게 하자는데, 팀장은 벌써 그들을 완치시켜 떠나보낼 생각까지 하다니 말이야. 내 마음이 참 흐뭇해.” 하다.

일제히 논의하다.

황제가 말하기를, “왜들 화를 내지? 듣던 중 반가운 가정이 아닌가. 병을 고쳐 궁을 떠나길 바라는 자가 있다면 그리하다 이르면 될 일이지.” 하다.

일제히 논의하다.

황제가 홍문관의 새로운 직제학을 황실 회의에 참여시킬 것을 권유하다.

일제히 논의하다.

황제가 홍문관 부제학 교수에게 명예직을 내릴 것을 예고하다.

일제히 논의하다.

황제가 말하기를, “그대들의 의견이 정 그렇다면 부제학에게 명예직을 내리는 일은 일시 보류하겠다. 이것 참 속상하게 되었군. 교수는 너무 상심치 말라.” 하다.

홍문관 부제학이 말하기를, “아니요.” 하며 말끝을 흐리다, “저는 괜찮습니다. 폐하. 그런 청을 드린 적도 없는데요.” 하다.

황제가 말하기를, “참 속상하다, 속상해. 황제의 자리에 앉아 내 뜻대로 편히 할 수 있는 일이 없군. 오늘 그대들의 의견에 따라 내 한 발짝 물러섰다. 대신에 무화 하련솔의 처소만큼은 내 뜻대로 교태전으로 옮기겠다.” 하다.

일제히 논의하다.

의금부 팀장이 말하기를, “다들 그만 떠드십시오. 아래에서 한 마디를 얹으면 위로 두 가지를 취하는 폐하임을 아직도 모르십니까?” 하다.

황제가 오래 웃다.

무화 하련솔의 거처를 교태전으로 이전하기로 결단하다. 더는 발언이 없다.

황제가 회의의 종료를 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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