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14년 만에 새 주인을 맞이하며 교태전의 정경이 비로소 빛을 발했다. 그곳에 제 두 발을 들여놓고 문패를 건 무화 하련솔이 아니라, 그의 시종 초롱 앞에서 그러했다. 그녀는 두 눈을 정열적으로 빛내며 교태전 곳곳을 집착적으로 구경했다. 그리고 제가 본 아름다움을 제 주인에게 고스란히 전달하고자 힘썼다. 해사하고 드넓은 정원에 우뚝 선 나이 많은 느릅나무, 아치형 다리를 얹어놓도록 크고 깊은 못, 백색 배경에 홍색 무늬를 그려놓아 눈 위에 내려앉은 꽃잎처럼 보이는 처마 무늬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설명하느라 목이 쉴 지경이었다.
“본래 대문은 적갈색이고 창문은 청색이었대요. 시간이 지나면서 분홍색과 연두색에 가까워졌다고 해요. 폐하의 어머니이신 전대 황후께서 이 빛깔을 워낙 좋아하셔서, 사후에도 덧칠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 중이지요.”
희미하게나마 하련솔은 하얀 벽면에 새겨진 꽃나무 벽화를 구경할 수 있었다. 하루아침에 새 전각에 이사 온 일이 여전히 어리둥절하여 거의 무표정한 채였다. 두 눈을 끔벅끔벅 깜빡이며 이리저리 전각 곳곳을 유랑하듯 훑고는, 그것만으로도 종아리와 발이 부어 신발이 작아진 바람에 침실로 향해야 했다.
지난 처소에 비해 열 배는 더 크고 천 배는 더 아름다운 침실에 들어서 초롱은 혓바닥이 근질거렸다. 장롱을 가득 채운 자개 무늬며 창틀의 문양, 이부자리의 배치에 이르기까지 설명하고픈 것이 한 트럭이었다. 신난 시종 옆에서 무화 하련솔은 열의 없었다. 지친 숨을 헉헉거리며 그는 침상으로 직진하더니 풀썩 몸을 눕혔다.
들뜬 마음을 가까스로 참아내며, 초롱은 하련솔의 퉁퉁 부은 종아리를 통통 두드려주었다.
“제가 너무 흥분했죠…? 죄송해요. 이렇게 아름다운 전각에서 솔 님을 위해 일할 수 있다니 꿈만 같아서 그랬어요.”
“아냐, 초롱아…. 네가 기뻐하니까 나도 재밌어.”
옅은 웃음을 지으며 하련솔이 대답했다. 다정한 말에 힘입어 초롱이 헤헤, 아이처럼 웃었다.
평화로운 시간을 즐기는 무화와 시종의 등 뒤로 미닫이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허리를 꾸벅 숙이며 들어선 것은 하인 서넛이었다. 무화의 이사를 돕고자, 개구멍 처소의 짐을 막 옮겨 온 참이었다. 그래 봐야 잡동사니가 든 박스 두 개와 도서관 스티커가 붙은 점자책, 열댓 벌의 옷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궁에서 지급된 계절별 철릭과 가벼운 두루마기, 내의인지라 ‘21세기 무화 복식’ 캡션을 붙여 문정궁 초입에 전시해도 될 성싶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초롱은 옮겨 온 짐을 하나둘 확인했다. 그러곤 고개를 번쩍 들고 물었다.
“보록은요?”
그러자 하인이 뺨을 긁으며 대답했다.
“교태전과 어울리는 새 보록이 지급될 겁니다. 폐하께서 말씀하시길 ‘기존의 보록은 너무 작아 황제의 총애를 담기엔 부족하다’고… 훨씬 아름답고 큰 것으로 준비하라 명령하셨습니다. 하여 그에 맞는 물건을 제작 중인 줄로 압니다.”
“아뇨. 제 말은… 그, 보록 안에 든 물건이 안 와서요.”
초롱의 지적에 하인들이 서로의 면면을 바라보았다.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듯한 태도였다. 대외적으로 무화 하련솔은 가난뱅이 출신에, 황제의 총애를 받은 지 오래되지 않은 신성이었다. 그러니 별달리 귀중품도 없는 게 당연했다. 개구멍 처소에 있던 보록은 워낙 생김새가 하찮고 무게도 가벼웠다. 그러니 속에 든 것도 없겠거니 생각하여 열어보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에 초롱은 이마를 찌푸렸다. 얼른 가져다 달라 요청하면 될 일이었지만, 남들 보기에 그 속에 든 물건이 하잘것없을 줄을 이미 알았다. 하련솔에 대해 조금도 모르는 작자들이, 그의 물건을 하찮게 여기며 옮겨 올 모습을 생각하니 속이 답답했다. 그래서 초롱이 직접 나섰다.
“솔 님. 남은 짐을 가지러 다녀올게요. 여기서 푹 쉬고 계세요!”
“응.”
씩씩한 초롱에 비해 하련솔은 무척 지친 상태였다. 장소만 옮겨 왔다 뿐이지 그는 여전히 그였다. 푹신한 침상에 누워 신도 벗고 양말도 벗고 축 늘어진 모습이 영락없는 폐쇄은둔족이었다.
침실 밖으로 하인들을 내쫓으며 뛰어나온 오후, 초롱은 즐거웠다. 이제는 무화를 억지로 외출시키지 않아도, 아름다운 교태전에서 수많은 일을 해결할 수 있었다. 게다가 황제 폐하의 처소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붙어 있으니, 개화병 증세도 도질 틈이 없을 터였다.
방실방실 웃는 얼굴로 초롱은 개구멍 처소로 향했다. 이제 이 구불구불한 길을 걷는 일도 마지막이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홀가분했다. 짐을 옮기고 잡동사니를 버리느라, 하인들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처소는 더욱 가난하고 조촐해 보였다. 교태전의 아름다운 장관을 눈에 담은 직후인지라 그 몰골이 더욱 비루했다. 소 코딱지 같은 이 처소를 여태껏 어찌어찌 다듬어가며 지내 왔다는 데에 초롱은 자부심을 느꼈다.
작은 침실 문을 열자 진작 치워버린 침상 자리와 버려진 수납장, 낮은 서까래가 한눈에 들어왔다. 조그만 보록 역시 벽면에 덩그러니 존재했다. 초롱은 초라한 보록을 조심스레 열고 속에 든 물건을 확인했다. 눈알이 사라지고 없는 개구리 인형이 덥석 초롱의 손에 들렸다. 하련솔이 입궁하던 때부터 간직하고 있던 유일한 소지품, 그의 애착 인형이었다.
“너도 좋은 곳으로 가자!”
씩씩하게 외친 뒤 초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창문 위에 둘러놓은 회색 무렴자가 보였다. 해태 무늬와 누빔이 새겨진 두툼한 무렴자가, 주인이 떠난 방에 스미는 가을 공기를 여전히 막아주고 있었다. 이제 저것보다 훨씬 더 화려하고 멋진 무렴자를, 구태여 요청하지 않아도 알아서들 가져다 바칠 것이었다.
“헤헤….”
황제 폐하께서 하련솔을 좋아해서 어찌나 다행인지 몰랐다. 이제 초롱은 이 낡은 처소에서 하련솔의 팔다리를 주무르며, 그의 열병을 가라앉히기 위해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었다. 하련솔이 외로운 듯 멍하니 창틀을 쳐다보거나, 전자책 읽어 주는 소리를 벗 삼아 기운 없는 낮잠을 잘 때마다 그의 기분을 좋게 해 주려 간식을 구해 올 일도 없을 것이었다. 치킨과 맥주 한 잔을 생각하며 퇴근하려다 소나기가 내려 마지못해 야근하고, 잠든 하련솔의 시무룩한 잠꼬대를 듣는 일과도 이제 없었다.
“…헤헤….”
씩씩한 턱 위에 호두 무늬 뼈대가 두드러지도록 입을 꾹 다물고 초롱은 웃었다. 영문을 모르고서 흘린 눈물이 그녀의 양 뺨을 축축하게 적셨다. 훌쩍, 훌쩍, 헤헤… 점성 섞인 웃음을 흘리며 초롱은 주먹으로 눈물을 벅벅 문질러 닦았다. 그러면서도 제가 왜 우는지, 제 마음이 무진 서글픈 이유가 무언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폐하께서 솔 님을 좋아해 주시는데, 다 잘 됐는데, 진짜 기쁜데….’
마음 안으로 중얼거리면서 초롱은 콧물을 삼켰다. 낡은 개구리 인형을 꼭 끌어안고서 그녀는 가까스로 제 감정을 갈무리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솔 님 기다리시겠다.”
깨닫지 못해 이름 한 번 붙여본 적 없는 감정이 시원하게 떨어져 나갔다.
***
무화 하련솔이 교태전으로 처소를 옮겼다는 소식은 문정궁 곳곳으로 빠르게 번졌다. 가을을 맞이하여 출시된 율무차가 불티나게 팔리는 카페며 정자, 구석 자리 처소에 이르기까지 삼삼오오 모인 자리마다 그 이름이 거론됐다. 황제께서 그를 황후의 자리까지 올릴 것인지, 이쯤 되면 그에게 먼저 인사를 올리러 가야 하는 건지, 그렇다면 언제 어떻게 방문해야 좋을지 의논하는 소리로 가득했다. 숫기 없고 힘없는 무화들이 남의 눈치를 살살 살필 때, 제일 무화로 오래도록 자리해 온 이차혁은 이미 교태전 침실 안이었다.
침상에 누워 잠든 하련솔은 일어날 기미를 보이질 않았다. 외출복 차림으로 지쳐 잠든 이를 깨우는 대신, 이차혁은 짐이 든 상자를 열고 소품들을 꺼내놓았다. 기운 없는 하련솔을 대신하여 짐을 정리해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내용물을 확인하고 보니 정리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무늬 없는 두루마기며 조촐한 내의, 몸에 비해 통이 큰 바지는 얼마 못 버티고 교태전 밖으로 쫓겨날 게 뻔했다. 조만간 하련솔의 침실은 황제가 선물한 옷과 보석, 꽃으로 가득 차게 될 터였다.
장식 하나 달리지 않은 허리끈을 주물럭거리던 중, 이차혁은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다.
“너도 정말 잘 컸다….”
그 소리에 이차혁이 동작을 멈췄다. 손안에 쥔 붉은 끈을 내려다보며 숨을 고른 뒤에야, 그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상체를 반쯤 일으키고 앉은 하련솔이 보였다. 눈이 완전히 낫진 않은 듯, 반은 허공을 보고 반은 상대의 윤곽을 보면서도 그는 이차혁을 알아보았다.
“…….”
짧은 침묵 끝에 이차혁이 웃었다. 하하… 공기보다 가벼운 소리가 하련솔의 귀를 간질였다.
기억 속의 예쁜 도련님을 되짚으며, 하련솔이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네 원래 이름이 뭐였더라? 기억이 안 나….”
“기억할 필요 없어요, 형. 이제 없어진 이름인걸.”
이차혁의 대답은 기다렸다는 듯 빨랐다. 그에 하련솔이 묵묵히 굴리던 생각을 멈추었다. 대신에 질문했다.
“별로 놀라질 않네…. 넌 알고 있었던 거야? 내가 이은재인 거.”
“확신한 진 얼마 안 됐어요.”
아무런 동요 없이 돌아온 말소리에 하련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는 옛 인연을 알자마자 반가워서 소리 내어 말하는데, 이차혁은 진작 확신을 하고도 어째서 저에게 귀띔하질 않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언제나 아이를 최우선으로 아끼고 좋아하던 이은재로서는, 젊은 황제를 가장 좋아하고 마음 깊이 들여다보는 하련솔로서는, 앞으로도 영영 이차혁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