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80화 (80/135)

80.

모두에게 친절한 소년. 그게 이차혁이 기억하는 이은재였다. 어린 마음에 그는 ‘이런 게 박애주의자구나’하고 책에서 본 단어로 은재를 이해하려 했었다. 그러나 모두를 좋아하고 모두에게 잘 대해 주는 이은재는 그와 동시에, 모두에게 어느 정도의 박탈감을 주는 존재였다.

사람은 모두가 자기중심적으로 산다. 누구나 자기 자신이 남보다 더 대단하고 중요하다. 그러니 남에게 향하는 어느 애정도 나에게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욕심을 내게 마련이다. 철부지 아이들의 우상이던 계곡의 인어, 이은재의 애정은 아이들의 이기심을 강하게 자극했다. 그 앞에선 둘째 황자도 별수 없이 어린애였다. 박탈감에 휘둘리고 질투심에 감정이 요동치는, 그저 어린애였다.

신기하게도 그 시절 이차혁의 이기심은 그를 더러 이은재를 더욱 좋아하게 했다. 아직 이름조차 받지 못한 제 형제를 특별히 예뻐하는 이은재의 모습을 보았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인생에 성수기가 있다면 이차혁에겐 유년기가 그러했다.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이 저를 가장 좋아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이차혁은 이은재를 신기하게 생각했다. 어째서 은재 형은 저를 최우선으로 좋아해 주질 않는 건지 궁금했다.

‘왜 내가 아니라 우리 형이지?’

순수하고 잔인한 물음이 참 쉬웠다. 불쌍한 형에 대한 동정심에서 비롯된 애정일 것이라고, 못 먹는 포도알을 비하하는 여우처럼 신 포도 취급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오늘, 이림범은 조금도 불쌍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모든 이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황제였고, 우상이었으며 으뜸이었다. 그에 비하자면 개화병에 걸려 다리를 절고 본명을 박탈당한 제가 훨씬 더 불쌍했다. 그런데도 무화 하련솔은 황제 이림범을 더 좋아했다.

그래서 이차혁은 함구하길 택했다. 당신이 이은재라는 사실을 아노라고, 이림범이 그 시절의 그 아이라고, 내가 그때 그 여름날의 도련님이었다고…. 그렇게 알려주고 나면 하련솔은 주저 없이 이림범을 안을 테니까. 저에겐 두 번 다시 그의 마음을 얻을 기회가 오지 않을 것만 같아서 그랬다.

상념에 빠져 입을 다문 이차혁 앞에서 하련솔은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혁아. 넌 어떻게 알았어?”

긴긴 침묵 끝에 하련솔이 물었다. 그와 동시에 침실 문이 드르륵 열렸다.

“헉!”

그리고 헛숨 삼키는 소리가 났다. 두 무화의 고개가 일제히 미닫이문으로 향했다. 문고리에 손가락을 걸고 선 이는 시종, 초롱이었다. 볼이 붉은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고, 이차혁은 빙그레 웃어 보였다. 반면 손님이 와 있었단 사실에 당황한 초롱은 바삐 고개를 숙였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차라도 내오겠습니다.”

그러면서 부지런히 돌아서려는 시종을, 이차혁이 붙잡았다.

“괜찮아. 이리 들어와.”

부드럽게 손짓하며 얹은 말에 초롱이 머뭇머뭇 눈동자를 흔들었다. 제가 모시는 이, 하련솔의 미소를 확인한 뒤에야 그녀는 방 안으로 조심스레 들어섰다.

차도 마다하고 시종을 가까이 부른 이유가 이차혁에게 있었다. 우물쭈물하며 다가온 초롱의 품에 안긴, 낡아빠진 인형 때문이었다. 이차혁은 그 인형을 손가락질하며 웃었다.

“저 인형이요. 나는 형이 누구인지, 저걸 본 날에 바로 알았어요.”

아주 간만에 천진난만한 목소리를 내며 그가 말했다. 신난 듯 웃음 짓는 표정에는 약간의 감동마저 스며 있었다.

하련솔이 황제의 침전 앞에서 소박을 맞고 돌아섰던 밤, 이차혁은 해열제를 찾아 작은 처소를 뒤졌었다. 그러다 보록 속에 든 인형을 발견했다. 제 기억 안에 든 것과 완전히 동일한, 다만 세월의 풍파를 혼자 맞은 듯 낡아빠진 인형이었다.

“개구리 포포. 형한테 내가 준 거잖아.”

그러자 하련솔이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가 여태껏 제 선물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다시금 들뜨고야 만 어린 도련님 앞에서, 하련솔은 이은재였다. 예쁜 꼬까옷보다도 맛난 과자보다도 멋진 로봇보다도 더욱 갖고 싶던 첫사랑, 이은재였다.

“옛날에… 우리 집에 불이 났던 날, 저 인형만 타지 않았어. 참 운 좋은 인형이야.”

엉거주춤 선 채 초롱이 제 손안의 인형을 내려다보았다. 불이 난 집에서 건져냈다는 말과 달리, 인형에는 아무런 그을음도 없었다.

흥분한 듯 하련솔 가까이 상체를 기울이며, 이차혁이 물었다.

“저거 볼 때마다… 내 생각도 했어요?”

“그럼, 했지. 너희 생각 많이 했어.”

하련솔의 대답은 빠르고 또 쉬웠다. 그에 이차혁이 소리 내어 웃었다. ‘나’로 시작한 질문이 ‘우리’가 되어 돌아온 일이 어째선지 씁쓸했다. 단숨에 딱딱해진 입매를 손끝으로 닦아내고 나니 그의 얼굴엔 미련만이 남았다.

“…포포 잘 챙겨줘요, 형. 그 속에 든 것도요.”

“아. 그거….”

하련솔은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가, 머뭇거리며 다물었다. 그 앞에서 이차혁은 기쁜 듯, 서운한 듯 복잡한 표정이었다. 인사도 없이 그는 교태전을 떠났다.

대뜸 찾아왔던 손님이 사라진 자리에 하련솔은 눈시울이 발긋한 시종과 단둘이 남았다. 인형의 이름이 ‘개구리 포포’란 걸 처음 안 초롱이 그것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하련솔의 곁으로 왔다.

“귀한 건 줄 모르고 막 다룰 뻔했네요.”

하련솔에게 포포를 안겨주며 초롱이 말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왼손을 펼쳐, 손바닥에 놓인 반짝이는 단추 예닐곱 개를 보여주었다.

“눈을 좀 달아 줄까 하고 이것저것 구해 왔거든요.”

그러자 하련솔이 선뜻 낯빛을 밝혔다.

“정말? 그럼 좋지. 해 줘. 난 손재주가 없어서 그럴 생각은 못 했네.”

“어, 제가 그래도 될까요? 혁 님 이야기 들어보니까… 꽤 귀중한 물건 같던데.”

“그렇지 않아.”

그러면서 하련솔은 개구리 포포의 등에 붙은 지퍼를 찍, 소리 나게 열었다. 그제야 초롱은 어째서 제 무화께서 닳아빠진 인형을 보록에 보관해왔는지 알 수 있었다. 개구리 포포의 뱃속에 들어있던, 옥빛 형형한 노리개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장신구에 대해 문외한인 초롱이 보기에도 그 노리개는 보물이었다. 붉은 실이 엉키지 않게끔 빗어 내리고, 무릎 위에 기다랗게 올려놓는 하련솔의 태도 또한 아주 소중한 것 다루는 듯했다.

“아니…. 그렇게 예쁜 노리개가 있었으면 달고 다니지 그러셨어요….”

아름다운 노리개를 감상하기도 잠시, 초롱은 반짇고리를 가져와 개구리 포포에게 새 눈을 달아주었다. 새카맣고 작은 단추 두 개를 매단 포포는 인상이 훨씬 또렷해졌다. 하련솔도 그 모습을 좋아했다. 어여쁜 노리개는 다시금 포포의 뱃속에 들어갔다.

“아….”

귀한 보물이 있으면서도 장신구로 쓰지 않는 무화가 야속해, 초롱이 탄식했다. 그 소리에 하련솔이 피식 새는 웃음소리를 냈다. 그러면서도 혹여 노리개가 닳을까 싶어 인형의 지퍼를 꼭 잠갔다.

그리고 초롱은 부쩍 바빠졌다. 이차혁의 방문을 시작 신호 삼아, 교태전을 찾는 손님이 줄을 지은 것이었다. 처음에는 기운 센 사내 무화 서넛이 우르르 찾아들었다. 무화 중 으뜸이라는 이차혁이 다녀갔다 하니 등 떠밀려 교태전을 찾긴 하였으나, 저들끼리 웅성거리며 정원을 훑어보더니 멋대로 응접실을 점령하는 모습이 무뢰배가 따로 없었다.

내심 불청객을 욕하면서도 초롱은 마지못해 차를 내렸다. 그에 사내 무화들이 도리질을 쳤다. 혀를 쯧쯧 차는 소리가 초롱의 신경을 긁어놓았다.

“하련삼인가 하련솜인가, 네 무화 님은 이 넓은 전각으로 이사를 오면 뭘 한대? 시종이라곤 너, 달랑 하나뿐인데. 다과는 이게 또 뭐야. 참 조촐하다…. 폐하를 모실 준비 자체가 안 되어있네.”

그러고는 코웃음을 치더니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것이었다. 손님이 왔다는 소식에 하련솔이 나오기도 전인데, 멋대로 들이닥치더니 멋대로 빠져나가는 모습에 초롱은 몹시 분노했다. 그들 머리털을 벅벅 쥐어뜯고픈 충동을 애써 삭이며, 그녀는 따끈따끈한 찻주전자를 정리했다.

느린 걸음으로 너른 복도를 지나느라 하련솔은 늦어서야 응접실에 도착했다. 텅 빈 방 안을 확인하고도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햇살 드는 자리에 놓인 커다란 소파로 걸어가 풀썩 몸을 눕히더니, 하품한 게 전부였다.

“솔 님…! 방금 그치들이 솔 님한테….”

초롱이 쌓인 울분을 터뜨리기도 전에, 또 다른 이들이 교태전을 찾았다. 고개를 기웃거리며 전각 안으로 들어선 이들은 이십 대 초반의 철부지 무화들이었다. 초롱은 그들을 전부 문전박대하고픈 마음이었으나, 하련솔은 방문을 거절하지 않았다. 덕분에 햇병아리 같은 무화들도 응접실에 수월하게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하련솔 님…?”

긴가민가하며 건네는 인사에 하련솔이 고개를 끄덕였다. 앉으시라며 테이블 자리를 손짓하자,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자리를 채웠다.

초롱이 치웠던 차를 두 번째 내릴 때쯤, 처음 보는 시종 세 사람이 줄을 지어 응접실에 들어왔다.

‘어…?’

양손 가득 쟁반을 든 시종들은 본래부터 하련솔을 위해 일했었다는 양 응접실 테이블을 다과로 가득 채웠다. 그러더니 벽 한편으로 가 두 손을 앞으로 모아쥐고 섰다. 비싼 차도 없고 다과도 없고, 시종도 몇 없다던 말을 믿고 들이닥친 철부지 무화들은 내심 크게 당황했다.

“…들은 거랑 다른데?”

꽃 모양, 용 모양, 소나무 무늬 한과들을 쳐다보며 귓속말하기도 잠시, 개중 가장 어린 무화가 손을 뻗어 꿀떡을 집었다. 그러자 옆자리 무화가 그녀의 손등을 찰싹 때리며 눈치를 줬다.

이내 큼큼, 목 가다듬는 소리를 내며 그들은 새 꼬투리를 덥석 잡았다.

“이렇게 큰 전각에 적응하기가 쉽진 않으시죠? 여전히, 그, 흠…. 하련솔 님 옷이, 그러니까 복장이요. 영 교태전의 주인처럼 보이진 않으시네요.”

그러면서 종종 열을 맞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응접실을 떠나려 했다. 하련솔은 별반 들은 말에 대응하질 않았다. 도리어 그는 초롱을 시켜, 손끝에 꿀을 묻힌 무화에게 다과 도시락 하나를 안겨 주었다.

“가져가서 친구들과 나눠 드세요.”

상냥한 인삿말을 끝으로, 새파랗게 어린 무화들이 후다닥 응접실을 떠났다. 그들 그림자가 사라지자마자 초롱은 제자리에서 팔짝 뛰었다.

“저런 싸가지 없…! 아, 아니! 예의 없는 자들의 어디가 예쁘다고 간식을 주세요, 주시기를?”

그러자 하련솔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귀엽잖아.”

짧고 간단한 대답에 순도 높은 즐거움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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