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81화 (81/135)

81.

옅은 웃음을 눈가에 걸치고서 하련솔은 새 시종들에게 손짓했다. 그에 시종 셋이 빠릿빠릿하게 다가와 일렬로 섰다. 그러곤 세로, 보리, 도롱이라며 궐에서 쓰는 이름을 소개했다.

“황제 폐하의 명 받잡아 인사드립니다. 앞으로 교태전을 쓸고 닦으며 하련솔 님의 보필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도롱이 말했다.

어깨부터 각이 잡힌 두 사람은 신입이었으나 하나는 그렇지 않았다. 일터를 옮겨온 시종, 보리를 확인하고 초롱의 두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그녀는 이차혁의 처소에서 훔쳐온 보록을 개구멍 아궁이에 숨겼던 바로 그 시종이었다. 감봉을 비롯하여 적절한 처벌을 받았다곤 하나, 떳떳하게 하련솔 앞에 설 수 있는 상황이 조금도 아니었다. 본인도 그 사실을 아는지, 창백한 얼굴로 덜덜 떨기 바빴다.

‘왜 하필 보리 언니가 여기로 와?’

황제의 뜻을 이해하지 못해 초롱은 두 눈에 쌍심지를 켰다. 반면에 하련솔의 태도는 그저 편안했다. 무화 윤슬찬이며 시종 보리의 이름이라면 알고 있었다. 젊은 황제의 성격 또한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렇기에 하련솔은 웃는 낯으로 보리를 살폈다.

그 앞에서 보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차렷했다. 이마와 인중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지조차 못하고 선 그녀는 무화보다 더 병자 같았다.

“이리 와. 앉아 봐.”

하련솔이 손짓하자 세로, 도롱이 보리를 힐끔 살폈다. 보리는 두 눈을 질끈 감고서 그 앞으로 다가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자 하련솔이 경악했다.

“아니, 아니지! 그러지 마. 의자에 앉아.”

그러면서 그는 남일 구경하듯 저 멀리 선 시종 둘에게도 연이어 손짓했다.

“너희들도 이리 와.”

황제는 하련솔에게 채찍을 주고자 했다. 지나간 일을 무기 삼아 이리 철썩 저리 철썩 휘두르기를 원한다면, 하련솔은 시종 보리를 당장 내쫓을 수도, 속된 말로 갈구며 구박할 수도 있었다. 보초 일을 시켜 교태전 밖에 세워두면 경고의 본보기가 될 것이고, 역지사지로 윤슬찬의 처소로 심부름을 보내 약을 올려도 될 일이었다.

그러나 하련솔에겐 그럴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모자란 시력으로 살펴도 알 수 있을 지경으로 벌벌 떠는 시종이 가엾기만 했다.

따듯한 찻주전자를 더듬더듬 잡아 들고, 그는 세 명의 시종에게 각각 차 한 잔씩을 따라주었다.

“간식을 너무 많이 가져와서 그래. 자, 같이 먹자.”

그러자 긴장이 턱 풀린 듯 시종들이 일제히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콧김을 흥 내쉬며 초롱은 그들과 하련솔의 사이를 갈라놓으며 가운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하인들이 교태전을 찾았다.

“실례합니다.”

열린 문에 대고 똑똑 노크하며 들어선 이를 시작으로, 옷을 가득 채운 행거가 비엔나소시지처럼 줄줄이 따라왔다.

“폐하께서 보내신 의복입니다. ‘가을옷을 추려 보내니 확인하고, 마음에 들지 않거든 투정하라’. …고 하셨습니다.”

약과로 가득 채운 볼을 우물우물 움직거리며 하련솔은 일렬로 나열된 행거를 훑어보았다. 뿌옇게 흐린 눈으로 살피자니 빨주노초파남보 색상환을 그린 듯했다. 하나같이 형형색색 반짝반짝한 것이, 귀하고 화려한 옷들이었다.

하련솔은 데면데면하니 옷가지를 쳐다보기만 하는데, 초롱은 재빠르게 일어나 옷의 가짓수를 확인했다. 개중 검은 댕기를 허리끈 삼아 둘러놓은 철릭이 예쁘기에, 치수를 확인할 겸 가져다가 하련솔에게 입혔다. 인형 놀이하듯 척척 두 팔을 꿰어 넣게 하고, 허리끈을 리본으로 묶어주고 보니 품이 남았다.

그러고 보니 제 무화님의 때깔이 퍽 탁월했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살피기도 잠시, 초롱은 큼큼 헛기침하며 표정을 고쳤다. 그리고 말했다.

“모두 같은 치수로 지은 옷인가요? 솔 님께는 조금 큰 듯하네요.”

황제의 하사품에 대고 감히 불만을 표하는가 하고, 하인들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그들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초롱이 후후 입김을 불듯 웃으며 종알거렸다.

“하긴! 교태전에서 편안히 지내시며 겨우내 총애를 받으실 테니, 큰 옷도 품이 맞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에 하인들이 끄덕끄덕 동의를 표했다. 대충 보아도 무화 하련솔의 앞길은 장밋빛일 게 분명했다. 그는 물론이고 그의 시종인 초롱에게도 잘 보여서 나쁠 게 없었다.

“아휴. 그럼요, 그럼요….”

“화려한 옷이 어쩜…, 참 잘 어울리십니다.”

입을 모아 칭찬하는 대상은 하련솔인데, 어째 우쭐해진 이는 초롱이었다. 다 제가 먹이고, 빗기고, 씻겨 가며 돌봐온 우리 님이 아니겠는가. 하늘 높이 솟아오른 콧대로 흥흥거리며 그녀는 하인들을 돌려보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세 번째 손님들이 교태전에 찾아들었다. 스물세 살 두 사람에 스물다섯 살이 또 두 사람이라 ‘삼삼오오’라 불리는 동아리 무화들로, 황제의 출퇴근 길을 빠짐없이 지키는 게 활동의 전부인 자들이었다. 체면을 차리느라 소설책과 예쁜 병에 든 사탕, 조그만 화분을 선물로 챙긴 채, 그들은 응접실에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그리고 일제히 당황했다.

‘듣던 거랑 또 다르잖아…!’

오늘 문정궁 정자 앞 카페는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다 같이 입을 모아 떠들어 대는 화제는 단연 무화 하련솔이었다. 일찍부터 교태전에 다녀온 사내 무화들은 그를 비웃기 바빴다. ‘다과도 없고 시종도 없고 참 비루해!’하고 욕을 하길래, 귀가 얇은 어린애들이 씩씩하게 교태전으로 향했더랬다. 그러더니 씩씩거리며 돌아와서는 또 다른 말을 했다. 오빠들이 거짓말을 했다고, 영 틀린 소리였다며 또박또박 화를 내는 것이었다.

간식 도시락을 껴안고 히죽거리는 아이를 제외하고, 철부지 무화들은 하련솔을 새로이 헐뜯었다. 걸친 옷가지가 비루하고 못나서, 폐하께서도 금세 질리실 거라 했다. 얼굴도 밋밋하니 별반 볼 것도 없더라, 이차혁 님 발끝에도 못 미친다고도 했다.

그 말을 반은 믿고 반은 의심하며, 그나마 예의를 차리며 찾아왔더니 이게 웬일인가. 무화 하련솔은 그들로서는 난생처음 보는 어여쁜 차림새로, 시종 아이들과 풍족한 간식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었다.

“가, 갑자기 찾아와 죄송합니다. 인사를 드리러 온다는 게….”

‘삼삼오오’ 중 첫째 ‘삼’을 담당하는 무화가 얼른 고개 숙였다. ‘오’들 역시 당황한 채 눈부신 응접실을 두리번거리기 바빴다.

제대로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다시 실례합니다.”

하인들이 우르르 들어섰다. 다른 무화들에겐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그들은 하련솔 앞에 허리를 꾸벅 숙이며 가져온 꽃다발을 전달했다. 방긋한 해바라기가 아기자기한 수국에 둘러싸인 모양새가 환하니 예뻤다.

“폐하께서 곧 외근을 나서는지라, 오후 내 바라보며 지내라 하며 보내셨습니다.”

꽃다발을 건네받는, 하련솔의 표정이 무덤덤했다. 킁킁 향기를 맡기도 잠시, 그는 귀한 꽃을 그대로 시종에게 넘겨주었다. 그 심드렁한 태도가 무화들에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벼락 맞은 듯, 땅바닥에 발이 꽂힌 듯 오도카니 선 이들 앞에서 초롱이 꽃다발을 뒤적거렸다. 조그만 쪽지가 들어있기에 꺼내 쥐고, 하련솔을 대신하여 한 줄 문장을 읽어내렸다.

“꽃말, 당신만을 바라봅니다. …라고 하시네요.”

그에 무화들이 추측하기를, 궁을 비운 동안에도 황제를 기다리며 내도록 그리워하라는 의미로 하사하신 게 아니겠는가 싶었다. 한데 하련솔의 해석은 달랐다.

‘하여간 간지럽게 굴어. 외근 좀 갔다 오는 게 뭐 대수라고.’

그의 이림범은 여느 무화들이 바라보는 젊은 황제와 사뭇 달랐다. 그는 자신이 궁을 비운 동안에도 하련솔이 보고 싶을 거라, 벌써 형이 그립다고 아양을 떨고 있었다.

그 생각을 하니 귀엽기는 해, 하련솔이 피식 웃었다. 문간에 선 무화, ‘삼’이 그 모습을 홀린 듯 눈에 담았다. ‘오’는 그 와중에도 트집 잡을 구석을 찾아내기 바빴다.

“폐하께서 이리도 신경을 쏟아 주시니 부럽습니다. 그런데 폐하의 편지도 직접 읽지 못하신다니….”

그에, 둘째 ‘삼’이 어깨를 흠칫 떨었다. 가만히 들은 말을 복기해 보자니, 시종이 모자라다 지적했더니 인원수가 불어나 있지 않았나 싶은 것이었다. 다과가 없다고 꼽을 줬더니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지 않은가 싶기도 했다. 기본 지급된 옷이나 입고 있다고 비웃었다더니, 황제 뺨치는 화려한 철릭으로 무장을 하고 있질 않은가. 그렇다면….

“자, 잠깐….”

둘째 ‘삼’이 입을 열었으나,

“…두 눈이 나을 만치 충분한 총애는 아직인 모양이지요?”

질투의 늪에 자빠진 친구를 말리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만, 그만해! 이 멍청이들아!’

무화들이 더한 헛소리를 뱉기 전에, 그는 허둥지둥 제 친구의 실언을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연신 허리를 굽신거리며 가져온 선물들을 그 앞에 내려놓고, 후다닥 도망치듯 퇴장하기도 재빨랐다. 선물을 확인한 하련솔이 무어라 대답할 새도 없었다.

그의 팔에 붙들려 교태전 밖으로 뛰쳐나온 ‘오오’ 둘이 투정했다.

“아, 왜 그래!”

“우리가 왜 도망쳐야 하는 건데?”

눈치 없는 형과 누나를 담벼락에 몰아세우며, 그는 박박 이를 갈았다.

“아직도 모르겠어? 우리가 욕하는 만큼 폐하께서 저 무화를 챙기시는 걸!”

가슴을 퉁퉁 치며 둘째 ‘삼’이 외쳤다. 그러자 ‘오오’ 두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멀뚱멀뚱 살피더니, 헉 소리를 내며 손으로 입을 가로막았다. 이미 늦은 후회에 속이 터질 듯 답답해져, 둘째 ‘삼’은 첫째 ‘삼’을 홱 돌아보았다. 그런데 평소 눈치 빠르기로 유명한, 동갑내기 친구가 이상했다. 그는 어째서인지 멍하니 넋을 놓은 채 교태전 처마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야, 뭐 해?”

퍽 팔뚝을 치며 묻자 좌우로 흔들거리며, 첫째 ‘삼’이 중얼거렸다.

“저기…, 방금 하련솔 님 말인데…. 소문으로 듣던 거랑 너무… 다르게 생기지 않았어?”

그에 세 명의 무화들이 어리둥절하니 눈살을 찌푸렸다. 밋밋하니 향기 없는 꽃이다, 별반 기억에도 남질 않는 얼굴이다, 특별할 게 조금도 없는 인상이다… 하련솔은 소문과 완전히 일치하는, 백지 같은 무화였다.

작은 말로 구시렁구시렁 그 사실을 알려주자, 첫째 ‘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얼굴이?”

정신 나간 듯 구는 친구의 팔을 잡아 쥐고 돌길을 걸으면서, 둘째 ‘삼’은 연신 불안했다.

‘설마 아니겠지.’

설마, 괜한 트집 한 번 잡았다고 해서 바쁘신 폐하께서 그 소리를 신경 쓰진 않으시겠지. 설마, 조만간에 저 눈먼 무화가 말짱하게 거리를 돌아다니는 건 아니겠지? 설마, 이 번잡한 시기에 그렇게까지 큰 총애를 더럭 입지는 못하겠지…. 불안에 떨면서 그는 터덜터덜 걸음을 움직였다. 그리고 늘 그렇듯, 설마가 사람 잡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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