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해가 저물기까지 교태전을 찾는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저녁에는 넉넉한 요리와 함께 수라간의 셰프, 대령숙수까지 인사를 다녀갔다. 드시고픈 게 생기거든 무엇이든, 언제든 제게 알려달라며 미소 짓는 그녀 앞에서 하련솔도 안색이 환했다. 어느 화려한 손님들보다 셰프를 가장 반기고 좋아하는 그였다.
실력 좋은 요리사 덕분에 하련솔의 마른 배는 동산만큼 불렀다. 맛있는 요리로 배를 가득 채우고 후식으로 내온 간식까지 빠짐없이 먹어 치우자, 셰프도 감격의 눈물을 줄줄 흘렸다. 젊은 황제께서는 그녀가 만들어 낸 요리며 심혈을 기울인 후식에 젓가락 자국 한 번 남기지 않기가 십상인데, 교태전에 새로이 자리한 무화께서는 미식가인데다 먹보이기까지 했다. 배부른 하련솔도, 실력을 인정받은 셰프도 행복한 밤이었다.
침전에 든 뒤에야 하련솔에게 평화가 찾아왔다. 이리저리 오가는 이들은 많았지만 죄 초롱이 상대해 준 덕분이었다. 색과 두께, 무늬가 서로 다른 무렴자를 가져와 마음에 드는 것으로 골라 달라거나, 침실의 온도와 습도, 심지어는 산소량은 적당한지 묻는다거나 하는 방문을 기꺼이 맞이한 초롱이었다. 그러나 궐내 도서관, 규장각에서 온 하인이 새로운 전자책 리더기를 건넨 순간에는 아주 조금 성질이 나고야 말았다. 여태껏 이보다 나은 물품은 구해다 줄 수 없다며 일반 태블릿 리더기만 내밀기에 감지덕지하며 사용해 왔는데, 이제 와 시각장애인 전용기기를 들여왔다며 직접 배달해 주기까지 하니 태세 전환에 분통이 터진 것이었다.
분개한 채 제자리에서 팔딱팔딱 뛰는 초롱의 모습을, 하련솔이 구경했다.
“여태껏 혼자서는 책도 못 보게, 일부러 내버려 뒀다는 거 아니에요?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이에요? 누구나 원하는 책 정도는 혼자 읽을 수 있어야죠!”
할 수 있는데도 할 수 없게 방치했다는 사실에 화가 나, 팔팔 뛰는 그녀의 모습이 개구리 인형 포포보다 더 개구리 같았다. 낡은 인형을 조물조물 만지면서 하련솔이 피식 웃었다. 그 앞에서 초롱은 반질반질한 새 리더기에 대고 퉤퉤 침 뱉는 시늉까지 보였다.
“이제 이런 기계, 누가 필요로 할까 봐서요? 폐하께서 외근만 다녀오시면 우리 솔 님이랑, 아주 깨도 볶고 콩도 볶으실 텐데! 그죠?”
기운 넘치는 질문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하련솔이 하품했다.
“초롱아, 그만하고 퇴근해.”
봉황 자수가 놓인 베개에 뺨을 대고 그가 말했다. 그러자 초롱의 표정이 한결 침착해졌다. 방의 창문을 닫고 무렴자를 치며, 초롱이 물었다.
“환경이 바뀌어서 못 주무시면 어떡해요. 제가 곁을 지켜드릴까요?”
걱정스레 건넨 말에 하련솔은 질문으로 답했다.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
“퇴근할게요.”
때깔 고운 전자책 리더기를 하련솔의 머리맡에 고이 두고, 초롱이 방을 떠났다. 마침내 찾아온 고요 속에 혼자 남아 하련솔은 제 눈가를 검지로 쓱쓱 문질러 닦았다. 문정궁에 온 뒤로 가장 긴 하루를 보낸 끝에 팔다리가 무겁고 손발이 퉁퉁 부었다. 곰곰이 따져보면 저는 해낸 노동이 전혀 없는데도 그랬다.
으음… 목 끓는 소리를 내며 하련솔은 폭신한 침상 가운데에 대자로 누웠다. 개구멍 처소의 침상도 참 넓다고 생각했건만, 교태전의 침상은 장정 네 사람이 눕고도 남겠다 싶을 만치 커다랬다. 모든 것이 풍족하고 넉넉한 방의 한가운데에 혼자 남아 그는 눈을 감았다.
‘잠이 안 오네….’
힘든 느낌이 사지에 감도는데, 머릿속은 여러 생각으로 번잡했다. 아무래도 너무 좋고, 지나치게 빼어난 장소가 대뜸 제 것이 되어 버려 그런 듯했다. 여태껏 낡아빠진 작은 처소를 천국이라 여기며 지내 온 처지에, 이토록 화려한 전각에 적응하자니 얼떨떨하여 세포가 얼어버린 듯했다.
눈을 감고 억지로 생각을 비우자니 불 지핀 아궁이 냄새가 나는 듯했다. 멍한 정신에 그는 잠시간 개구멍 처소에 누워 있단 착각에 사로잡혔다. 기시감은 눈치채지 못하는 동안 편안하다가, 아차 하고 현실을 깨닫는 순간 날카로워졌다.
졸음이 단숨에 달아났다.
‘아….’
내심 한탄하며 하련솔이 몸을 뒤척였다. 개구리 인형을 가슴팍에 붙이고서, 콧김을 크게 내쉬기도 연속이었다. 그대로 모로 누워 잠을 청하려 해 보았으나,
‘후우….’
또 한 번, 찌뿌듯한 몸을 뒤척뒤척 뒤집어야 했다. 이불을 끌어 올려 목 위까지 덮으며 그는 반대 방향으로 돌아누웠다. 그러곤 억지로 생각을 하지 않으려 했다. 생각을 하지 말자… 라고 생각하니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생각났다.
‘…….’
그리고 덥석, 그의 어깨 위로 손이 내려앉았다.
“으… 으악!”
부지불식간에 하련솔이 허공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그러자 무어 딱딱하고 높다란 것이 그의 손가락등에 퍽 맞았다. 팔을 곧게 뻗어놓은 채 하련솔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입을 쩍 벌렸다. 주먹이 냅다 꽂힌 곳은 이림범의 콧잔등 위였다.
깜빡… 무화에게 얼굴을 처맞은 황제가 눈을 움직였다.
“악….”
깜짝 놀라 하련솔이 소리를 꽥 지르려는 순간, 커다란 손바닥이 그의 하관을 텁 덮었다. 으읍, 으으읍… 빨개진 얼굴로 하련솔이 웅얼거렸다. 폭력적인 무화를 내려다보며, 코끝이 알싸한 황제가 눈썹을 찌푸리고 웃었다.
“쉿. 남들 몰래 온 거야, 조용히 해.”
“으읍…, 으븝….”
침상 한편에 쪼그리고 앉아 콧잔등이 빨개진 채 이림범이 실소했다. 내지른 주먹에 정통으로 맞은 이는 저인데, 아파하는 이는 오히려 하련솔이었다. 얼얼한 주먹을 가슴팍에 대고서 그는 이림범의 손날에 거친 숨결을 묻혔다.
이림범의 얼굴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입을 틀어막은 손을 거두며, 그가 사죄했다.
“미안. 많이 놀랐어? 나는 형이 잠든 줄 알고….”
“너, 너… 너….”
“진정해. 일단 진정부터 하자.”
약한 형의 몸에 강직이 올까 걱정되어, 이림범이 냉큼 하련솔의 양어깨를 잡았다. 쭈그려 앉았던 다리도 자연스레 무릎 꿇은 자세로 변했다. 주물주물, 열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안마해주자 하련솔도 분한 기색을 차츰 삭였다.
마침내 꽉 막혔던 숨을 하아 내뱉으며, 그가 물었다.
“너 어떻게 들어온 거야…?”
그러자 이림범이 활짝 웃었다. 만일 하련솔이 그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더라면 한 대 더 콧대를 쥐어팼을 터였다. 딱 그만큼 야속하게, 그의 미소는 환하고 천진난만했다.
“지하 통로로 지나왔지. 내 침전이랑 형의 침실, 몰래 이어져 있거든.”
그러면서 이림범은 커다란 자개장롱을 손가락질했다. 터무니없는 농담처럼 들리는 말에 하련솔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성질난 강아지처럼 윗입술을 살짝 들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 표정에 이림범의 웃음이 더욱 커졌다. 소리를 죽이느라 큭큭 숨 끓는 소리를 내며, 그는 하련솔의 가슴팍에 손바닥을 붙였다. 통통, 통통… 놀란 심장이 아직도 바삐 뛰고 있었다.
하련솔이 농담으로 치부해 버린 이림범의 말은 사실이었다. 왕실의 정사가 개인적인 일이 못 되던 시절이 있었다. 왕과 정비가 합방하자면 날짜를 잡는 일부터 모든 것이 대소사라, 정사의 순간에도 여덟 명의 상궁들이 다각도에서 지켜보며, ‘전하, 너무 흥분하셨습니다!’, ‘옥체 보존하시옵소서!’ 잔소리를 건네는 게 규율이었다.
시대가 바뀌었다곤 하나 황제와 정비의 관계는 여전히 궐내 최고 관심사였다. 문정궁을 막 지어 올리기 시작할 무렵, 당대 황제는 워낙에 성격이 예민하고 신경질적이었다. 의심 많은 그 황제가 유일하게 믿고 곁을 내주던 이가 황후였더랬다. 동시에 가장 걱정하며 신경을 쏟는 대상 역시 황후였다. 때문에 그는 누가 언제, 어떻게 황후를 공격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평생 염려를 안고 살았다. 근거는 있되 실체는 없는 걱정을 못 이겨, 그는 문정궁 지도 위에 작은 통로 하나를 그려 넣었다. 황제의 침전에서 교태전의 침전으로 즉각 이동할 수 있도록 지하도를 만든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림범은 제 아버지보다도 당대 황제를 많이 닮았다. 의심 많고, 예민하고, 세상만사에 민감하게 날을 세운 것이 딱 그랬다. 그래선 장수하기 어렵다고, 진정하고 옥체 보존하시라는 잔소리를 듣는 것마저 쏙 빼닮았다. 그러니 한참 간 창고 취급을 받아 온 지하 통로를 깔끔하게 치워다가 다시 쓰기 시작한 것이었다.
“시간이 늦었단 건 아는데…, 너무 보고 싶어서 왔어. 자는 모습만 살짝 구경하려 했지.”
하련솔의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이림범이 말했다. 덥수룩하다 싶게 길어진 고동색 머리칼이 이제는 귀 뒤에 꽂히게 됐다. 실력 좋은 미용사를 불러다 시원하게 다듬어줘야겠다 싶으면서도, 이만큼 길어진 것이 아까웠다. 이대로는 단발이 되어 버릴 기세인데, 나름의 어여쁜 맛이 있으니 차라리 길러다가 족두리를 얹어 주고 싶기도 했다.
아끼는 강아지 미용 고민하듯 고심에 잠긴 황제를 향해, 하련솔이 코웃음을 쳤다.
“내가 우리에 든 원숭인 줄 알아?”
“원숭이 아닌데. 강아진데….”
“또 뭔 헛소리야.”
그러면서 하련솔은 제 이마를 매만지는 황제의 손을 떼어냈다.
“왜 남의 방에 함부로 들어와, 들어오길?”
“‘남의 방’? 벌써 형네 집 다 됐네.”
“그럼. 벌써 한 십 년쯤 살던 곳 같아.”
어린 시종이 그러듯이 콧소리를 흥 내며 하련솔이 대꾸했다. 그러나 우쭐거리며 말하는 그의 태도에는 아무런 진심도 담겨 있질 않았다. 이림범의 밝은 눈에 그 속내가 훤했다. 이토록 약한 사람이,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깨어있는 것만 봐도 뻔한 문제였다. 큰 방이 낯설어 잠을 설친 게 분명했다.
“흠! 이리 오너라. 어디 한 번 안아보자.”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이림범이 말했다. 이리 오라 말한 사람치고 그는 엉덩이가 가벼웠다. 상대보다도 제가 먼저 움직여, 두 팔 가득 하련솔의 상체를 끌어안고 너른 침상을 단번에 가득 채운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