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84화 (84/135)

84.

“사실은 나… 형이…. 하련솔이 너무 좋아서… 죽은 이은재를 생각하는 건 또 너무 슬퍼서… 그래서 잊으려고 했었어. 하련솔에게서 이은재의 흔적을 훔쳐보는 짓은 그만두자고 다짐했어. 무화 하련솔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이해하고, 좋아하자고….”

“…….”

“그래서 잊었던 거야…. 그 바람에 형을 못 알아본 거야.”

진솔한 고백 끝에 이림범은 고개를 푹 떨궜다. 그들 사이가 무척 가까운 탓에, 그가 숙인 얼굴이 하련솔의 왼쪽 가슴 위에 파묻혔다.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에 이림범은 아랫입술을 작게 떨었다. 그리고 사죄했다.

“정말 미안해. 함부로 형을 잊으려고 해서….”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

하련솔이 즉답했다.

“고마워… 범아.”

그 소리에 이림범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귓가를 간질이는 목소리가 어째선지 축축했다. 아니나 다를까, 젖은 눈가를 닦아내기 바쁜 하련솔이 보였다. 기다란 손가락 사이에 눈물이 만든 반짝이는 줄이 생겼다.

이림범은 얼른 두 손을 뻗었다. 하련솔의 얼굴이 그의 큰 손바닥으로 단숨에 덮여버렸다. 작은 냄비에 큰 뚜껑을 얹은 듯 손바닥 여백이 남았다.

“…….”

덥석 얼굴을 덮인 채 하련솔은 침묵했다. 반면에 이림범은 허둥지둥했다. 황제와 긴 시간, 단둘이 입맞춤을 열 번 넘게 나누었으니 제아무리 극심한 개화병이라도 일부 회복되어, 멀어 버린 눈에 날카로운 빛이 스미는 게 당연지사였다.

하련솔의 뒤통수를 베개에 푹 파묻어주며, 이림범이 말했다.

“눈이 따가워서 그래? 많이 아파? 이렇게 가리면 좀 괜찮지?”

다정한 질문이 줄줄이 쏟아졌다. 황제의 손금에 대고 실소하며, 하련솔이 느릿느릿 대답했다.

“…응. 그러네.”

“눈 꽉 감아. 계속 감고 있어. 내가 가려줄 테니까… 이대로 자, 형.”

“응….”

이내 하련솔의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빳빳하던 목이며 어깨가 느슨해지자, 마른 몸이 침상 위에 푹 파묻혔다.

이림범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커다란 상체를 옹송그리고 두 손을 얌전히 모으고 앉아, 그는 제 손바닥을 적시는 하련솔의 숨결만을 느꼈다. 나지막이 훌쩍거리는가 싶더니, 하련솔은 금세 잠들었다. 얕은 가슴이 서서히 위로 솟구쳤다가 아래로 꺼지길 반복했다. 황제의 손바닥에 담기는 숨 또한 깊어졌다.

잠든 이의 얼굴을 가리고서 아침이 오길 기다리는 시간, 이림범은 묵묵히 다짐했다. 지하 통로에 무빙 워크를 설치해야겠다… 하고.

***

참 재수 없는 날이었다.

오전부터 문정궁 정자 옆 카페에서 한차례 소란이 일었다. 이유는 터무니없었다. 다수의 무화들이 습관적으로 하련솔을 욕했는데, 가만히 듣고만 있던 무화 두엇이 그를 두둔하며 편을 들어준 게 화근이었다. 정작 하련솔은 그 자리에 있지조차 않건만 저들끼리 서운해하며, 그들은 큰소리로 오래도록 다퉜다.

“폐하께서 출장 가 버리셔서 기분 잡친 건 알겠는데, 나한테 분풀이하지 말라고!”

그 때문에 잔잔한 오후 시간을 방해받은 무화가 여럿이었다. 개중 성질이 예민한 이, 아청원은 시켜둔 미숫가루 음료도 버려둔 채 카페를 떠났다. 한데 제 처소에 돌아와 보니, 대문 앞의 작은 새집 안에 우편물 하나가 꽂혀 있었다. 아청원은 소리를 꽥 지르며 얼른 달려가 책자를 빼내고, 새집 내부를 살폈다.

생태 환경이 우수한 문정궁에는 다람쥐며 청설모는 물론이며 귀엽고 신기한 철새들이 자주 오갔다. 특이하게 생긴 참새가 처소 근처를 날아다니기에 잣이나 땅콩을 뿌려주길 한 계절, 아청원은 새집을 직접 지었다. 그랬더니 지난주에는 조그마한 새가 새집 안에 둥지를 짓고, 알까지 낳았다. 그에 그녀는 좋은 카메라를 하나 사, 새 사진을 찍는 취미를 즐겼다. 보통 참새가 아니라 붉은뺨멧새처럼 생겼다며 새의 종류를 추측하고, 겨울이 오기 전에 이동해야 할 텐데 알을 늦게 낳아서 어떡하나 걱정하기도 한창이었다.

“아…!”

새집 안을 들여다보며 아청원이 탄식했다. 조그만 새알 중 하나에 쩍, 긴 금이 간 것이 보였다. 어느 멍청한 작자가 새집을 우편함으로 착각하고, 물건을 쑤셔 넣어 알을 깼단 생각에 그녀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머리털이 삐죽 서는 분노를 느끼며 확인한 책자의 출처는 홍문관이었다.

성질이 잔뜩 난 아청원은 제 친구의 처소에도 같은 책자가 꽂힌 것을 확인하고, 그것까지 걷어다가 윤슬찬의 처소로 직진했다. 나쁜 짓을 저지르고도 솜방망이 처벌을 받은, 그야말로 책자의 주인이 될 사람이라 생각해서였다.

마침 싸리 빗자루를 쥔 윤슬찬이 보였다. 손모아장갑으로 굽은 손가락을 감추느라, 빗자루를 쓰는 동작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찬이 오빠!”

아청원이 외쳤다.

“홍문관에서 임상 실험에 참여할 무화를 모집한다는데, 잘 되진 않나 봐요. 내 생각엔 오빠에게 좋은 기회인 거 같아서 가져왔어요! 자!”

그러면서 그녀는 윤슬찬의 처소 대문에 걸린 것까지 더하여 세 개의 책자를 그의 품에 떠넘겼다.

“이런 데에라도 참여해야지, 아니면 그 손을 어떻게 고치겠어요? 시종도 하련솔 님한테 뺏겼다면서요.”

그에 윤슬찬의 두 눈이 커졌다. 달갑지 않은 손님이 대뜸 찾아와 짜증스럽던 얼굴이, 시종 이야기를 듣자마자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무슨 소리야? 누가 누구한테 시종을 뺏겼다고?”

각자의 사정으로 짜증이 난 두 무화는 한 자리에 선 채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길로 윤슬찬은 교태전으로 달려갔다.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자 살폈더니, 정말로 시종 보리가 보였다. 기억 속 모습보다 훨씬 더 편안한 얼굴로, 그녀는 다른 시종들과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보리 언니, 뭘 그렇게 열심히 해요. 사람이 넷인데… 우리랑 나눠서 일해요.”

“아냐…. 솔 님이 잘 대해 주시는 만큼 나도 잘해보려고…. 더 열심히 해야지, 나는…. 나는 이번엔 정말 잘하고 싶어.”

담장에 좀도둑처럼 달라붙은 채 윤슬찬은 뺨을 떨었다. 보리의 충성이 하련솔에게 향한다니, 피가 쏠리고 성화가 끓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교태전의 풍경은 이차혁을 닮았는데, 정작 이곳에 자리 잡은 이는 민둥 두부 같은 하련솔이란 사실에 미칠 것만 같았다.

하련솔을 향한 미움보다는 시종 보리에게 느끼는 배신감이 더욱 컸다. 같이 나쁜 짓을 꾸몄는데, 저는 외톨이 신세가 되었고 보리는 하련솔에게 붙었다고 생각하니 화가 났다. 보리가 제 시종이던 지난날, 남들은 윤슬찬더러 시종을 가스라이팅하는 무화라고 했다. 맞는 말이었다. 윤슬찬은 보리를 깎아내리면서 제 자존심을 채워왔다. ‘나 같은 무화 없이 시종인 네가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냐’는 타박을 쏘아댈 때는 내심, 그녀라는 시종 없이는 병자인 자신은 사람답게 살 수 없다는 불안감에 질려 있었다.

이제 와, 윤슬찬은 보리를 돌려받고 싶었다. 그러나 방법을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얼마나 성실한 시종인지 알기에 더욱 그러했다.

다른 시종들을 들여보낸 뒤, 보리는 뾰족한 펜과 지도 한 장을 들고 전각 곳곳을 걸어 다녔다. 빳빳하고 두꺼운 지도엔 당연하다는 듯 교태전이 담겼다. 그녀는 전각 내부는 물론 정원과 울타리 근처를 빙빙 돌아다니며 공사 중인 현장을 확인했다. 전각의 정문, 후문은 물론이고 정원 돌담길과 못을 건너는 다리 앞에 노랑 보도블록이 놓여 있었다. 보리는 걷다 멈추기를 반복하며, 딱딱한 지도 뒷면에 펜을 대고 점자를 새겼다. 그 모습을 한참 관찰한 끝에 윤슬찬은 그녀가 점자 지도를 만들고 있음을 알았다.

일을 마친 보리가 교태전 안으로 돌아가자마자 그는 살금살금 정원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곤 보도블록의 위치를 죄다 옮겨 놓았다. 그러면서 그는 보리가 일을 제대로 하질 못했다고, 무능하다고 평가받고 교태전에서 쫓겨나길 바랐다.

오후가 되어 일꾼들이 기계를 가져왔다. 그들 중 누구도 보도블록의 바뀐 위치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궐에 사시는 분들께서 어련히 알아서 바꿨겠거니 생각하며, 그들은 그대로 공사를 마쳤다.

저녁 무렵에는 양채림 상궁이 교태전에 들렀다. 그리고 화재경보기가 울려 작은 소란이 일었다. 부쩍 건조해진 날씨 탓에 기기가 오작동한 것이었다. 그 바람에 그녀는 무화 하련솔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문제를 일으킨 경보기를 점검하느라 시간을 한참 보냈다. 방문의 목적이었던 공사 현장 점검은 제대로 할 새도 없었다.

바삐 돌아가기 전에, 그녀는 황제가 흘렸던 사소한 투정을 기억해 냈다. 그러곤 심야에 하련솔의 침실에 비치는 빛이 없게끔, 정원 전등의 작동 시간을 조정했다. 그리고 네 명의 시종을 불러 로테이션 근무 일정을 잡아 알려달라 지시했다. 매일 적어도 한 사람은 교태전을 지켜야 한다는 말과 함께였다.

“폐하께서 출장을 떠나신 첫날이라, 벌써 궐내가 소란스럽습니다. 하련솔 님을 잘 보필하세요.”

그러나 그날 저녁에는 시종 네 사람이 모두 퇴근했다. 하련솔이 직접, 당일 야근 담당자인 도롱을 퇴근시킨 것이었다. 가볍게 수다를 떨다 오늘이 그녀의 어머니 생신이란 사실을 알게 된 탓이었다. 그는 연신 도롱의 등을 떠민 끝에 침실에 혼자 남았다.

그리고 늦은 밤, 작은 불면증이 하련솔을 찾아왔다.

‘범이가 출장 다녀오고 나면… 내 눈도 다시 멀어 있겠네.’

높다란 천장을 올려다보기도 잠시, 그는 눕혔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어슴푸레하게나마 눈앞이 보이는 때에 교태전을 산책하며, 지리를 익혀야겠단 생각이 번뜩 들었다. 마침 보리에게 선물 받은 점자 지도가 있으니 마음이 든든했다.

지도를 챙겨 들고, 하련솔은 산책을 나섰다. 야외 전등이 모두 꺼진 탓에, 교태전의 너른 정원은 뜻밖에 칠흑처럼 어두웠다. 하필 배탈이 난 경호원이 평소보다 일찍 교대하고자 자리를 비운 때라 인기척도 들려오질 않았다. 껌껌한 정원을 터벅터벅 걷는 동안 하련솔은 점자판에 온전히 의지했다. 한 차례 느릅나무에 어깨를 부딪치긴 하였으나, 아직 점자 읽기가 어색한 제 탓이라고만 여겼다.

그리고 다리를 통해 못을 건너고자 발을 뻗었다.

들어주는 이가 아무도 없는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면, 그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는 실재했다고 할 수 있을까? 어느 실존주의자가 내놓은 가정이 있었다. 그 가정은 하련솔의 마음에 유달리 깊게 남았다. 그는 그 이야기의 쓰러진 나무가 마치 저 같다고 생각했다. 넘어지고, 깨지고, 다치고 때론 울어도 아무도 찾아주는 이가 없는 날에는, 저 또한 나무가 쓰러지며 낸 소리와 같이 실재하지 않는 사람인 걸까 궁금했다.

첨벙.

차가운 물에 전신을 빠뜨린 순간, 하련솔은 오늘 제가 쓰러지며 낸 소리가 실재하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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