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끙, 끙… 불에 덴 짐승이 내는 듯한 소리가 이차혁의 상념을 흐트러뜨렸다. 더듬더듬 손을 움직여 이차혁은 하련솔의 뺨을 만졌다. 그러자 낯선 눈물이 그의 지문을 적셨다. 아파 우는 이의 얼굴은 추운 사람처럼 창백하고 입술이 보랏빛으로 질렸는데, 체온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비정상적인 발열이었다.
이차혁은 못내 불안했다.
‘대체 왜 이렇게 뜨거워?’
현세대 무화들은 삶의 환경이 특출나게 좋은 편이었다. 첫 무화가 제 친동생이다 보니 이림범은 그 외 무화들도 제 처나 첩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치정 싸움이 사라진 궐 안에는 무화들이 다칠 일도 없었다. 마흔 명의 무화 모두 차가운 밤중에 깊은 못에 빠지기는커녕 밥 한 끼 굶는 일조차 없이, 온전한 보호 속에 온실 속의 화초처럼 살았다.
때문에 이차혁은 죽을 위기를 거친 무화의 몸 상태가 얼마나 나빠질 수 있는지 전혀 몰랐다.
‘이러다 형이 잘못되는 건 아니겠지?’
큰 걱정에 뺨을 떨며, 이차혁은 애써 덤덤하게 말했다.
“솔이 형. 괜찮아…. 금방 괜찮아질 거야.”
“응….”
“열도 점점 내리고 있고… 아픈 것도 곧 가실 거야. 개화병이 원래 그런 거거든. 내가 잘 알잖아.”
“…응….”
“잘 낫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천연덕스러운 거짓말에 안심한 듯, 하련솔이 고개를 끄덕끄덕 움직였다. 벌어진 잇새로 씨근덕거리는 더운 숨만 연신 뿜어낼 뿐, 그는 더는 말이 없었다. 콧잔등을 찡그리며 이차혁은 그의 가슴팍에 손을 댔다. 그러자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발악하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이내 하련솔이 턱을 휙 추켜들었다. 목젖이 불거질 정도로 머리를 뒤로 젖히더니, 그는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앓다 기절한 것이었다.
하련솔의 뒷머리를 잡아 쥐어 제 품에 기대게 하며, 이차혁이 이를 악물었다. 발작하는 개화병을 가라앉힐 방법이 하나 있었다. 이차혁은 그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큰소리로 소리쳤다.
“총명 씨, 밖에 있어?”
그러나 황제의 비서는 답이 없었다. 하기야 죽는 날 저승사자도 가려 부를 황제가, 다른 누구도 아닌 하련솔을 지키는 데에 박총명을 쓸 리 없었다.
이차혁이 재차 말했다.
“웅진 씨!”
그러자 황제의 호위 실장, 김웅진이 재깍 대답했다.
“예. 여기 있습니다.”
불덩이처럼 뜨거운 하련솔을 혼자 두고 밖으로 나설 수 없어, 이차혁은 닫힌 문을 향해 목을 길게 뻗었다. 그리고 큰소리를 질렀다.
“폐하…, 폐하를 모셔 와! 솔이 형 상태가 좋지 않아!”
그러나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웅진 씨?”
“…….”
침실로 통하는 복도 중앙에 우두커니 선 채 웅 실장은 망설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련솔의 곁을 지키며, 절대로 교태전 밖으로 움직이지 말라던 황제의 명령 때문이었다. 다른 누구의 어떠한 말도 감히 황명을 앞설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어디까지나 규칙상의 문제일 뿐이었다. 그 규칙에는 발작하는 개화병이 없고, 숨겨온 성질을 버럭 내지르는 이차혁이 없었다.
“김웅진 실장! 황명을 어겼다가 잔소리 들을 것이 두려워? 이러다 하련솔이 잘못되어 죽기라도 하면, 그 책임은 당신에게 지울 거야! 폐하께서 그 불충은 용서하실까?”
이를 갈며 바락바락 내지르는 음성에 쇳소리가 섞였다. 목이 쉬도록 기를 쓴 끝에 이차혁이 헉헉거렸다. 복도 가득 풍기는 불운한 기운에 어린 시종이 탄식하는 소리만이 아, 아… 안타깝게 흘렀다.
발을 동동 구르는 초롱을 내려다보기도 잠시, 웅 실장이 대답했다.
“당장 모셔 오겠습니다.”
그제야 바쁜 발소리가 들려왔다. 웅 실장이 황제를 모시러 자리를 비우자마자, 미닫이문 앞으로 바쁜 기척이 쫓아왔다. 두 눈을 감고 한숨을 푹 내쉬며 이차혁이 말했다.
“초롱 씨. 여기 물수건 좀 가져다줘. 약…, 해열제랑, 아주 차가운 물수건 좀.”
“네, 네!”
이내 초롱이 수건이 담긴 물그릇과 시럽 해열제를 가져왔다. 두 눈이 퉁퉁 부은 채 그녀는 정신없이 하련솔을 먼저 살폈다. 물수건을 바삐 적시고, 짜내어 하련솔의 이마에 올렸다. 기절한 이의 턱을 벌려 쥐고, 그의 입 안에 해열제를 흘려 넣기도 했다. 그러나 연홍색 물약은 거의 삼켜지질 않고 입가로 흘러내리기만 했다.
“솔 님, 솔 님….”
초조한 마음에 중얼중얼 그를 부르며 초롱은 서너 개의 물수건을 만들었다. 하련솔의 팔과 다리를 감싸고, 의식이 돌아올 때까지 주물러 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대뜸, 초롱의 손에 잡혔던 하련솔의 팔이 주르륵 위로 딸려 올라갔다. 당황해 고개를 번쩍 들었다가, 초롱은 제 무화 님을 끌어안은 이차혁을 발견했다.
하련솔의 마른 어깨에 제 콧대를 짓누르는 그는 무척 슬퍼 보였다. 잘생긴 이마 위에 핏대가 불거지고, 긴 속눈썹은 눈물에 뭉쳐 축 늘어졌다.
“…….”
초롱은 얼른 고개를 숙이며 그 모습을 못 본 체했다.
이내 드르륵, 소리가 났다. 이차혁과 초롱의 고개가 동시에 침실 문으로 향했다. 성난 얼굴로 들어선 황제를 보자마자 초롱은 뒤로 나동그라졌다. 그러나 청기와 전각에서부터 궐내를 가로지르며 내달려온 황제의 눈에 어린 시종은 들어오지도 않았다. 초롱이 허둥지둥 침실 밖으로 도망치는 동안 그는 제 형제와 연인에게로 다가갔다. 그러곤 쿵 소리가 나도록 무릎을 꿇었다.
마디마디가 죄 불거지도록 흥분한 손을 뻗어, 이림범이 하련솔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황제가 자리를 비운 지 30분도 채 되지 않았건만, 하련솔은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상태였다.
“형.”
이차혁이 이림범을, 이림범은 하련솔을 동시에 불렀다. 이림범이 고개를 들자, 이차혁은 입술을 꾹 다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울음을 짓씹느라 엉망이 된 얼굴은 더는 도도한 무화가 아니었다. 언제고 이림범에게 이차혁이 순 무화였던 적은 없었다. 그 역할의 유효 기간 또한 저물어가고 있었다. 이림범의 눈에 비친 이차혁은 언제고 어린 날의 제 동생이었다.
“혁아. 걱정하지 마.”
긴 팔을 뻗어 이림범은 기절한 하련솔과 제 동생을 한 품에 끌어당겨 안았다. 토닥토닥 등을 두들겨주는 손을 느끼며 이차혁이 입을 벙긋거렸다. 가차 없이 씹어댄 아랫입술이 뒤늦게 아릿했다. 이림범이 하련솔의 한쪽 어깨에 턱을 괴고 그와 저를 끌어안기에, 이차혁도 형을 따라 기절한 이의 반대쪽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기절한 하련솔의 마른 몸이 두 형제 사이에 꼭 안겼다.
그들 형제에게 있어 하련솔은 유년기의 상징이었다. 자신들에게 아직 천진한 순정이 남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이내 이차혁이 하련솔의 팔뚝을 잡았다. 제 손바닥에 꽉 잡히도록 작아진 우상을 느끼기도 잠시,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곤 황제의 품에 하련솔을 밀어 넘겼다.
“솔이 형 좀 고쳐 줘….”
이차혁이 말했다. 부탁이라기보다 요청 같고, 요청이라기보다 투정 같은 목소리였다. 그에 이림범이 고개를 끄덕이며 하련솔을 받았다.
아픈 이를 끌어안는 이림범의 모든 움직임에서 애정이 묻어났다. 땀에 젖은 이마에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떼어낸 뒤, 그는 하련솔의 뺨에 제 입술을 가져다 붙였다. 들릴 듯 말 듯 귓속말을 하며 하련솔의 이름을 부르기도 했다.
그 모습을 그림 보듯 응시하기도 잠시, 이차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진맥진해져 힘 빠진 다리를 똑바로 곧추세우자 이림범이 제 동생을 올려다봤다. 그의 시선을 외면하며 이차혁은 침실 문을 밀어 열고 자리를 떠났다.
이내 이림범에겐 하련솔만이 남았다. 그 밖의, 하련솔을 주어로 두지 않은 모든 문제는 뒷전으로 밀어놓아도 좋았다. 무책임한 황제이자 사랑에 빠진 남자가 되어 그는 하련솔의 체온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그러나 머리 꼭대기까지 뜨거워진 무화의 몸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황제가 안아 주고, 만져 주고, 입을 맞추어도 마찬가지였다. 물수건을 차게 적셔 얼굴과 팔다리를 닦아 주어도 그 효과가 오래 가질 못했다. 땀이 마를 때마다 오한이 드는 듯 간헐적으로 덜덜 떨기는 하는데, 이마는 여전히 불덩이였다.
전전긍긍하며 애를 태운 끝에 이림범이 이를 악물었다. 그는 추위에 질린 이에게 비상시에 그러듯이, 뜨거워 죽어가는 이에게 제 맨살을 맞대기로 마음먹었다.
“미안해, 형.”
들어주는 이 없는 사과를 미리 뱉고서 이림범은 하련솔의 허리끈을 풀었다. 침의를 걷어내는 데엔 시간이 한참 걸렸다. 긴장이 되고 걱정이 되어 손이 떨린 탓이었다. 마침내 상의를 벗겨내자, 땀에 젖은 새하얀 어깨와 가슴이 훤히 드러났다.
‘…너무 작다….’
제 손이 지나치게 큰 줄도 모르고서 이림범은 탄식했다. 군살 없이 늘씬한 허리선을 따라 느릿느릿 손날을 움직이다가, 그는 하련솔의 팔을 들어 손목에 걸린 옷소매를 조심스레 빼내었다. 그러곤 제 상의를 단숨에 벗어 던졌다. 등줄기의 봉제선이 뜯어지며 투둑, 소리를 냈다.
이내 젊은 황제가 반 나신의 무화를 제 몸으로 덮었다. 체중으로 뭉개 버리지 않고자 두 팔뚝으로 바닥을 짚어 가며, 그는 하련솔의 마른 가슴에 가슴을 맞댔다. 그러자 퉁퉁 뛰는 심장 박동에 제 흉통까지 함께 울리는 듯했다.
창백한 뺨에 제 뺨을 기대어 붙이고서 이림범이 귓속말했다.
“미안…, 미안해. 나중에 혼날게.”
갸름한 턱에 엄지 끝마디를 대고 꾹 누르자 하련솔의 입이 반항 없이 열렸다. 이림범은 그의 입술 위를 제 입술로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