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87화 (87/135)

88.

시럽 해열제가 지닌 딸기 향기가 가실 때까지, 이림범은 기절한 이와 혀를 섞었다. 인공감미료 특유의 맛이 사라지고 나니 어째선지 침이 더욱 달콤해졌다. 힘없이 벌어진 하련솔의 입가에 흐른 침방울까지 싹싹 핥아먹으며, 이림범은 옅은 핏대가 비치는 창백한 뺨을 살폈다. 그 말간 피부까지 맛나 보이기에 혀를 내밀고 하련솔의 뺨을, 귀를, 목덜미를 연신 핥아 주었다.

어두운 방 안 가득 울리는 소리는 색정적이나, 이림범의 마음은 다른 의미로 두근거렸다. 발정 난 짐승처럼 타인의 피부를 핥으면서 이림범은 하련솔의 거친 호흡과 더운 몸, 발작하듯 뛰는 심장이 어서 낫기를, 개화병 증세가 빨리 가라앉아 주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래도 하련솔은 깨어날 기미조차 보이질 않았다.

‘미치겠네….’

하련솔의 가슴 중앙에 제 머리를 처박고 고민하기도 잠시, 이림범은 성마른 신음을 흘렸다. 머릿속에 떠오른 해결 방안이 딱 하나 있기는 했다. 문제는 그 행위가 지닌 목적이 치료만은 아니라는 데에 있었다. 두 눈을 질끈 감고서 이림범은 이성을 다잡고자 했다. 그래도 새빨갛게 익어버린 머릿속은 가라앉질 않았다.

근심 어린 숨을 푹푹 내쉬며 그는 침상 한편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하련솔의 육신을 번쩍 들었다. 제 무릎 위에 올려다가 끌어안고, 쓰다듬고, 입 맞추기 위해서였다.

젊은 황제의 애타는 노력이 통했는지, 한참 시간을 들인 끝에 하련솔이 목소리를 냈다.

“범아….”

잠꼬대처럼 흐른 음성에 이림범은 뛸 듯이 기뻤다. 그러면서도 그는 영문 모를 슬픔을 느꼈다. 가까스로 깨어난 하련솔의 팔뚝을 연신 어루만지며, 이림범은 그를 제 품 가까이 바짝 붙였다. 그리고 사죄했다.

“미안해, 형.”

재빨리 뱉은 사과 뒤에 고백이 잇따랐다.

“…형을 안고 싶어.”

열에 젖어 멍해진 하련솔의 정신은 성급한 황제의 박자를 따라오지 못했다. 상황을 파악하기도 벅찬 듯, 그는 둔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아픈 탓에 무표정한 하련솔의 콧대에 제 코끝을 비비며, 이림범이 부탁하듯 말했다.

“형을 안게 해 줘…. 형을 낫게 하고 싶어. 형이 아픈 게 너무 싫어….”

애걸복걸하는 음성에 물기가 어렸다. 진이 빠져 늘어진 손을 움직여, 하련솔은 제 옆구리를 더듬더듬 만졌다. 서로 간에 맨피부를 맞댄 감촉이 진짜인지 확인하는 손짓이었다.

천천히 상태를 파악한 듯 눈을 깜빡인 끝에, 하련솔은 전과 같은 소리를 냈다.

“…범아….”

이림범은 연신 제 이름을 부르는 그 음성이 답답하면서도 좋았다. 마른침을 힘겹게 삼킨 뒤, 하련솔은 뚱딴지같은 소리를 했다.

“나 물에…, 물에 빠졌는데….”

그에 이림범이 날숨을 크게 뱉었다. 기운이 닳은 이의 손을 잡아 제 뺨에 가져다 붙이며, 그는 뒤늦게 하련솔을 달랬다.

“맞아. 형, 물에 빠졌었어…. 내가 형을…, 형을 물에서 건졌잖아. 기억하지?”

“응….”

“여기 교태전이야. 형이 좋아하던 새 침실이야. 그러니까 이제… 괜찮아, 형. 아픈 것도 내가 금방 고쳐 줄 테니까. 다 낫게 해줄 테니까 이제 안심해도 돼.”

“…응, 범아….”

그렇게 대꾸하는 하련솔은 무표정했으나, 이림범은 그가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눈물을 자아낼 기운도 없어 그러지 못할 뿐, 내심 울고 있다고 분명히 느꼈다. 하련솔의 감정이 마치 제 가슴으로 전이되는 듯했다. 착각이라기엔 너무나 선명하게, 못에 빠진 순간 그가 느꼈을 죽음에 대한 공포, 그리고 사무치는 외로움이 제 것처럼 느껴졌다.

맥 빠진 하련솔을 대신하여 이림범이 울었다. 하련솔의 뺨 위에 제 눈물방울을 뚝 흘리며, 그가 속삭였다.

“사랑해, 형….”

그러자 하련솔이 작게 신음했다. 힘겹게 한쪽 팔을 들어 올리더니, 그는 이림범의 너른 어깨를 허술하게 다독였다. 표정을 가늠하려는 듯 갈색 눈동자를 이리저리 흔들기도 했다. 그 동작이 야속하도록 약하고, 미울 만큼 사랑스러워 이림범은 뺨을 떨었다.

저를 똑바로 바라보게끔 하련솔의 고개 방향을 고쳐 주며,

“사랑해, 솔이 형.”

이림범이 연신 고백했다.

“형을 안고 싶어. 무화 하련솔을… 안고 싶어. 그래도 되겠어?”

그제야 하련솔이 눈물을 보였다. 창백하게 질린 뺨을 타고, 눈물은 반짝이는 선을 만들며 흘러내렸다. 이림범은 지난날 그리했듯이 그의 두 눈을 제 손바닥으로 덮었다. 개화병이 한결 가시며 빛이 비쳐서, 눈이 아려서 우는 줄로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하련솔이 그의 손을 거두게 했다. 황제의 큰 손을 움켜쥐고 아래로 내리며, 하련솔은 울면서 말했다.

“눈이 아파서… 그래서 우는 게 아니야.”

뜻밖의 고백에 이림범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앞에서 눈이 부신 이는 오히려 이림범 자신이었다. 연신 눈시울 붉히는 울보 황제의 뺨을, 하련솔이 잡았다. 그러곤 황제의 입술 위에 제 입술을 가져다 맞대었다.

근래 들어 하련솔은 입이 무거워졌다. 이림범에게 해 주지 못한 말이 많았다. 언제고 정직한 하련솔이었으나, 그답지 않게 혀 밑에 감춘 이야기가 쌓였다. 나조차도 이은재가 아닌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는데, 그런 하련솔도 좋아한다는 너에게 감사하다는 말. 나에게 새집을 주고 따듯한 옷을 주고, 애정을 주는 네가 나도 좋다는 말. 다시금 다른 누구에게 기억되고 추억되며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기대 때문에, 너만큼은 나를 알아준다는 감동 때문에, 그래서 울었다는 말….

“너는 날… 행복하게 해주려고 있는 사람 같아.”

하련솔이 속삭였다. 수없이 많은 다른 말을 밀치고 튀어나온 고백이었다.

“범아. 네 얼굴을 보고 싶어.”

그에 이림범이 불쑥 몸을 일으켰다. 그의 무릎에 앉혀져, 그에게 온전히 기대고 있던 하련솔의 몸은 절로 뒤로 넘어갔다. 푹신한 침상에 등을 파묻으며 하련솔이 작게 신음했다. 이림범은 그의 품 안으로 성급하게, 그러면서도 연신 멈칫거리며 조심스럽게 파고들었다.

이내 젊은 황제가 이불이 되어 아픈 무화를 덮었다. 일방적으로 쏟아지는 애정을 감내할 뿐 하련솔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었다. 긴 시간 내내 그는 흐린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말라빠진 몸도 나약한 팔다리도 부끄럽지 않았다. 세상의 어느 누구, 하물며 저 높은 곳에 있는 신조차도 볼 수 없도록, 커다란 이림범이 제 가난한 육신을 완전히 가려주기에 하련솔은 안도했다.

두 남자의 숨소리가 사방을 줄여 놓았다. 너른 침실이 단숨에 좁다랗게 느껴지고, 공기의 흐름이 갑갑하게 멈췄다. 황제의 어깻죽지에는 긁힌 상처가 생겼고 무화는 전신이 발긋해졌다.

벌어진 입과 코 밖으로 더운 숨을 연신 빼내면서 하련솔은 울고 또 울었다. 눈시울이 새빨개지고 눈두덩이가 붓도록 울었더니 더는 눈물이 특별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이림범의 품에서 그는 자립하지 않아도 좋았다. 애써 버틸 필요가 없었다. 제멋대로 칭얼칭얼 울음을 터뜨려도 괜찮았다. 세상 누구도 하물며 하련솔 자신조차도 순 무능해진 스스로를 비난할 수 없었다.

핏대 선 주먹으로 이부자리에 구김을 남기며, 이림범은 하련솔의 어깨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젊은 황제의 폭격 같은 총애를 받아내느라 하련솔은 정신이 조금도 없었다. 그는 제 육신이 침상에서 벗어나 멀리 밀려 올라간 줄도 몰랐고, 대나무 발에 정수리를 톡톡 부딪친 줄도 몰랐다. 이림범이 손을 올려 머리를 막아주기에 그제야 아릿한 통증을 희미하게 느꼈을 따름이었다. 전신이 구름 위에 붕 뜬 것 같기도 했고, 황제에게 거세게 붙들려 가라앉은 것 같기도 했다.

몰아치는 감각에 휩쓸려 하련솔은 멍하니 앞을 살폈다. 눈앞으로 색이 번쩍번쩍 튀었다. 빨갛게, 하얗게 점멸하는 빛깔을 구경하면서도 그는 그것이 제 정신이 자아낸 환각인지 실제인지 분간하지 못했다. 눈동자를 흥건하게 채운 눈물이 일렁거리는 파도를 바라보면서, 그는 이대로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저를 이곳에 머무르라고, 인연이 되고 연인이 되어 이 자리에 정박하라고, 온몸으로 소리치는 황제의 품에 안겨 죽는 것만큼 호상이 있을까 싶었다.

이림범이 쏟아내는 총애는 딱 그만큼 배부르고 만족스러웠다. 그가 아닌 다른 무엇도, 누구도 중요치 않았다.

개화병의 발작 때문이 아닌 행복감으로 인해 하련솔은 잠시간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제 뺨을 꾹꾹 건드리는 보드라운 감촉을 느끼며 가까스로 깨어났다. 눈을 뜬 채 기절했던 탓에, 큰 눈망울을 눈물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듣고 있어? 형….”

기절한 이를 뽀뽀로 깨우면서, 이림범이 연신 속삭였다. 거칠기 짝이 없는 몸짓에 비해 붉어진 뺨을 쓰다듬는 손길은 상냥했다. 그는 굵은 엄지를 와이퍼처럼 슥슥 움직여 하련솔의 눈가를 깔끔하게 닦았다.

“나랑 결혼해 줘.”

“뭐?”

눈앞이 단숨에 맑아지는 느낌에 하련솔은 화들짝 놀랐다. 구름 안을 헤매는 듯 흐릿하던 세상이 개운해졌다. 이림범의 까만 머리칼 위로 흐르는 땀과 윤기, 반듯한 이마의 빛깔과 짙은 눈썹, 검은 속눈썹이 울창한 숲을 자아낸 눈이 번뜩 시야를 채웠다. 웃음기 어린 눈매는 반달처럼 휘었는데 들끓는 열망을 품은 눈동자는 포식자나 진배없었다. 어른스럽다 못해 위압감이 느껴지도록 잘 자란 턱과 높은 콧대, 선이 반듯한 입술이 차례차례 하련솔의 시선을 앗아갔다.

“누, 누구….”

누구세요? 하마터면 그렇게 소리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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