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88화 (88/135)

89.

하련솔은 얼이 빠져 버렸다. 머릿속에 얼음물을 들이부은 기분이었다. 딱 그만큼, 그의 시야를 가득 채운 젊은 황제는 낯선 얼굴을 달고 있었다. 상상해 본 적 없게 성숙하고 무서울 만큼 잘생긴 얼굴로, 이림범은 익숙한 아양을 떨었다.

“나잖아, 범이. 형의 애기.”

정신이 표백된 채 하련솔은 입을 쩍 벌렸다. 그 순간 그는 젊은 황제의 얼굴을 가장 늦게 본 한국인이었다. 전 국민이 그 얼굴에 감탄하고, 팬 사이트 창설이며 화보집 전량 매진의 기염을 토하기를 한 계절 전에 마쳤건만, 하련솔은 제 지아비께서 몹시도 잘생겼음을 이제야 알았다. 멍하니 바라볼 뿐 옴짝달싹할 수 없는 외모였다.

그리고 대뜸, 이림범이 하련솔에게 서슴없이 가까이 다가왔다. 난생처음 보는 미남이 대뜸 입술을 들이밀기에, 하련솔은 깜짝 놀라 두 손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곤 손바닥에 닿는 보드라운 입술의 감촉에 제가 더 당황하여 허둥지둥 손을 거뒀다. 결국에는 엉거주춤하니 손등으로 제 하관을 가리는 게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왜, 왜 이러세요….”

서로 간에 애정을 확인하고 몸을 섞은 직후, 이부자리에 묻은 땀조차 마르지 않은 때였다. 그러나 하련솔은 이림범 앞에서 너무나 어색하고 쑥스러웠다. 그를 똑바로 마주 보지조차 못해, 0.5초 간 힐끔 살핀 뒤 얼른 눈을 내리깔길 반복했다.

하련솔의 기기묘묘한 반응을 살피길 한참, 이림범은 제가 무화의 개화병을 완벽하게 고쳐냈음을 깨달았다. 재빠르게 저를 살필 때마다 하련솔의 눈망울이 말똥말똥하니, 눈동자에 반짝이는 이채가 서리는 것이었다. 텅텅 비어 공허하던 눈에 빛이 드니 몹시도 반가워, 이림범이 활짝 웃음 지었다.

“형. 이제 잘 보이나 봐. 그래서 갑자기 낯 가리는 거지?”

두 눈이 맑게 갠 하련솔 앞에서 이림범은 더는 철부지 황제, 혹은 지난날의 애기가 아니었다. 굶은 선으로 가득 채운 선명한 얼굴은 장난기 어린 미소를 뒤덮고도 조금도 흐려지질 않았다. 도리어 밝은 낯빛과 환한 미소가 그를 더욱 아름답게 포장했다.

“아…, 아니….”

손등으로 제 입술을 가리느라 하련솔은 뭉개진 음성을 냈다.

“…잠깐 쳐다보지 좀 말아 봐. 얼굴 좀 저리, 저리 돌려….”

무턱대고 자신만만하던 ‘나찰사’의 첫인상이 단번에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그의 얼굴 안에 모든 근거가 존재했다.

예상 밖의, 조금도 귀엽지 않은 껍데기를 드러냈을지언정 이림범은 여전히 이림범이었다. 그는 사랑하는 형의 요청대로 고개를 휙 움직였다. 벌서는 아이처럼 상체를 모로 돌리고 엄한 문짝만 바라보는 식이었다.

“이렇게?”

고분고분한 태도로 이림범이 물었다. 하련솔은 응… 하는 침음성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나 이림범의 외면은 하련솔이 그 외모에 적응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도 되질 않았다.

‘옆모습은 더 잘생겼네!’

이제 하련솔은 염치없이 벌어지는 입을 가리기 위해 손을 써야 했다. 놀란 원숭이처럼 두 손으로 입을 텁 덮고서 그는 황제의 옆얼굴을 연신 살폈다.

“어릴 땐 훨씬 작고 귀여웠는데… 네가 그 애기가 맞아? 진짜 작고 귀여웠는데….”

“작다고 그만 말해. 그땐 어렸으니까 그랬던 거지.”

문짝을 노려보며 이림범이 대꾸했다. 하련솔은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하’ 한숨 쉬고, ‘허’ 감탄하길 반복했다.

그러나 평화는 길지 않았다. 사람이 아닌 삼차원 그래픽처럼 넓은 어깨, 물 한 바가지 부어다가 세숫대야로 써도 될 듯 옴폭 파인 빗장뼈 자리, 넓고 커다랗게 부푼 가슴을 지나 하련솔의 시선은 자연스레 황제의 아랫배로 향했다.

“꽥!”

기껏 개안한 두 눈을 질끈 감으며 하련솔이 오리 소리를 냈다.

“너 몸이 왜 그래!”

그에 이림범이 머쓱하니 뺨을 긁었다. 꽃잎 같은 피부에 연약한 골격을 지닌 하련솔은 정사를 모두 마쳤는지 몰라도, 성내는 근육에 거칠고도 거센 욕망을 지닌 젊은 황제는 그렇지 못했다. 그의 몸은 여전히 활기를 띠며 불만족의 열기를 품고 있었다.

“…흠, 크흠.”

멀찍이 널브러진 이불을 주워다가 제 배 밑을 가리며, 이림범이 헛기침했다. 그러곤 점잖은 척 목소리를 냈다.

“어허, 무엄하구나.”

그러자 하련솔이 황당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너, 너… 저리 가.”

그러면서 그는 얇은 시트를 끌어다가 제 몸을 마주 가렸다. 발긋하니 어여쁜 피부가 단숨에 가려지기에 이림범이 한탄했다. 눈이 보이지 않을 때는 제 뺨도 갈기고, 제 육신도 거부하지 않고 받아주더니만, 이제 와 낯을 가리고 소스라치며 놀라기도 하니 무척 서운했다.

이림범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련솔은 발끝으로 이부자리를 걷어차 댔다. 두리안 냄새를 맡은 예민한 고양이처럼, 황제의 하반신에 대고 나쁜 것 파묻는 시늉을 한 것이었다. 그에 이림범이 큰 소리로 하하 웃었다. 피차 얼굴을 시뻘겋게 익힌 채였다.

손등으로 제 뺨의 열기를 훔치며, 이림범이 소리쳤다.

“아주 발칙하구나. 감히 황제를 먹고 버리려는 거냐?”

“뭐, 뭐?”

예상치 못한 소리에 하련솔이 동작을 멈췄다. 그 침묵을 기회 삼아, 이림범은 냉큼 하련솔의 무릎 위로 기어 올라갔다.

마른 무화의 배에 넙죽 제 상체를 눕히면서 그가 말했다.

“좀 전까진 좋아 울지 않았어, 응? 솔아….”

낮게 속삭이며, 황제가 하련솔의 턱 끝을 검지로 툭 퉁겼다. 그러자 온열 버튼이라도 눌린 듯 무화의 얼굴이 더욱 빨갛게 달아올랐다. 귀 끝까지 새빨개진 채 하련솔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눈을 부릅뜨니 그러잖아도 커다란 갈색 눈망울이 더욱 커 보였다. 날 선 수치심과 수줍은 홍조가 작은 얼굴을 가득 채웠다.

“…….”

“…….”

제가 장난질을 쳐 놓고, 이림범은 하련솔이 비친 수줍음에 전염되고야 말았다. 팔뚝 위로 간질간질한 소름이 돋고 뱃속에서 열렬한 애정이 보글 끓었다.

숫기 없는 분위기를 타파해 보려, 이림범이 재차 말했다.

“…그래서, 형. 내 고백에는 대답 안 해 줄 거야?”

그러면서 하체를 앞으로 바짝 당기자, 그의 체중에 치인 하련솔이 두 번째 꽥… 오리 소리를 내며 뒤로 나동그라졌다. 이림범은 발라당 자빠진 무화의 다리 사이에 제대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하련솔의 하관을 가린 손 위에 입을 맞췄다.

쪽… 감촉만큼이나 보드라운 소리를 자아내며 이림범이 속삭였다.

“응?”

엉거주춤 어깨를 웅크리며 하련솔이 눈을 굴렸다. 세상 누구보다 익숙하던 이를 자못 생경하게 느끼면서, 그는 웅얼웅얼 되물었다.

“어, 미안한데… 아까 뭐라고 했었지?”

그러자 이림범이 웃었다. 낮은 목소리가 목구멍 안에서 끓는 듯 큭큭 소리를 울렸다. 목소리는 익숙하다 못해 꿈에 나올 정도로 친숙한데, 웃음 짓는 잘생긴 얼굴은 여전히 남이었다.

홀린 듯 저를 구경하는 하련솔을 내려다보며, 이림범이 또박또박 말했다.

“나와 결혼해 달라고 말했어.”

그러면서 그는 하련솔의 손바닥을 지나, 땀에 젖은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뒤이어 어깨로, 가슴으로 내려가는 동작이 서슴없었다. 찌는 듯 더운 열이 가신 뒤, 하련솔의 피부는 기분 좋게 따끈했다. 그의 몸 구석구석 입맞춤을 남기느라 프러포즈에 쪽쪽 소리가 뒤섞였다.

“이 나라의 황후가 되어 줘.”

꿈결 같은 상황에 비해 보이는 모든 것이 선명한 위화감에, 하련솔은 재깍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마른 배를 타고 흐르듯이 움직이는 황제를 말리느라 허둥지둥할 따름이었다. 붉은 꽃을 뒤집어쓴 양 발긋해진 피부를 어루만지며 이림범은 더욱 아래로, 거침없이 움직였다.

그를 떼어내기 위해 하련솔은 두 눈을 꽉 감고서 고개 돌려야 했다. 잘생긴 얼굴을 똑바로 보지 않으려 애쓰며 그는 황제의 너른 어깨에 펀치를 날리고, 굵은 가슴팍에 대고 발길질을 했다. 그러나 약해빠진 하련솔의, 차마 힘주지 못한 버둥거림일랑 이림범에겐 연인 간의 행위를 더욱 즐겁게 북돋는 양념에 불과했다.

결국 하련솔은 이림범에게 패배했다. 야속한 얼굴이나마 가려 놓으려 이불을 들어 덮어버리자, 하련솔의 배 밑으로 커다란 텐트가 쳐졌다. 달팽이 집에 들어가듯 이불 안에 갇힌 채, 황제는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성질이 묻은 손길로 하련솔은 이불 위에 대고 주먹을 흔들었다. 콩콩 머리를 맞고도 이림범은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야속하리만치 호탕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하련솔이 그의 머리를 이불 채로 움켜쥐었다. 그러곤 이불 위를 문지르듯 쓰다듬어 뒤로 걷었다.

곧 요의 끝자락을 스카프처럼 머리에 두른 채 이림범이 얼굴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가 지어 보이는 표정에 비치는 감정은 순 즐거움만은 아니었다.

“왜 또 울어.”

그를 밀어내던 손이 얼른 태도를 고쳤다. 이림범의 짙은 눈매에 눈물이 만든 축축한 얼룩이 진 탓이었다.

하련솔은 한숨을 푹 내쉬며 황제의 양 뺨을 덥석 쥐었다. 제 손끝을 수건 삼아 눈물을 닦아주면서, 그는 눈을 흘기며 말했다.

“이러니까 내가 알던 이림범 같네.”

“…내가 뭘?”

“우리 범이, 울보 애기.”

“…형은 몰라. 내가 얼마나 형을 걱정했는데….”

투정하듯 구시렁거리며, 이림범은 하련솔의 손에 고개를 기댔다. 비죽 입술을 내밀고 눈치를 살피다, 쪽! 하련솔의 손바닥에 대고 입 맞추기도 했다. 제 몸부림에 감동해 우는, 철부지 사랑꾼을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하련솔은 그저 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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