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89화 (89/135)

90.

이제 심장이 조이는 통증은 황제의 몫이었다. 반짝이는 눈망울 가득 저를 담는 하련솔이 몹시 예뻤다. 본디부터 인형처럼 아름답던 얼굴에 선명한 눈빛이 더해졌을 뿐인데, 인상의 변화가 천지 차이였다. 장애가 있건 없건 그 내면은 같은 사람이건만, 개안한 하련솔이 더욱 똑똑하고 성숙해 보인다는 건 참으로 불합리한 일이었다.

그래도 이림범은 오늘의 하련솔이 어제보다 더 좋았다. 저와 두 눈을 똑바로 마주치는 하련솔이, 마침내 어른이 된 제 모습을 살펴주는 하련솔이, 잘 자랐다고 칭찬하듯 제 머리를 쓰다듬는 하련솔이 좋았다.

“그래서… 황후 할 거야, 말 거야.”

멋쩍은 기분을 감추기 위해 이림범은 성급한 재촉을 내뱉었다. 그러곤 곧바로 제 미성숙한 태도를 후회했다. 입을 꾹 다물고 작은 자책에 빠진 이림범과 달리 하련솔은 침착하고 현실적이었다.

“일반인들도 결혼 준비에 서너 달은 걸린다는데, 너는 황제잖아.”

듣기 좋은 목소리가 조용조용하니 어두운 침실을 가득 채웠다.

“범아. 지금도 처리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지 않아? 당장 오늘만 해도… 너, 원래 출장 가기로 했었잖아. 그 일은 어떻게 됐어? 네가 미룬 거야, 아니면 아예 취소된 거야?”

“아.”

이림범이 탄식했다. 일평생 제 부모에게도 잔소리를 들어본 적 없는 그였다. 스물일곱의 나이에 그는 난생처음으로, 어째서 꾸중 듣는 아이들이 ‘내가 알아서 할게, 좀’ 하고 소리를 빽 지르는지 알 것 같았다.

한숨을 푹 뱉으며 이림범이 투덜거렸다.

“그런 자질구레한 이야긴 팀장들이 하는 거로 족해. 형이 내 일정까지 신경 써 줄 필요는 없어.”

“어쭈! 이게….”

그러자 하련솔의 흰 손이 달려들더니, 이림범의 양 볼살을 덥석 움켜쥐었다. 그대로 가로로 죽 늘리자, 무섭도록 잘생긴 황제의 얼굴이 단숨에 납작 만두로 돌변했다. 제 볼을 함부로 꼬집어 당기는 행위에 이림범은 어안이 벙벙할 지경으로 놀랐건만, 하련솔은 그의 표정에는 아랑곳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연신 꾸지람을 늘어놓으며 제 말을 하기 바빴다.

“야. 황후가 뭔 동네 붕어빵 이름이야? 결혼이 어디 쉬운 일이냐고. 지금도 잠도 못 자게 바쁜 녀석이, 임기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국장부터 국혼까지 한 해에 다 해 먹으려 해?”

“…이어 노코 마해….”

“뭐가 그렇게 급해? 범아. 너 왜 이렇게 조급하게 굴어.”

몰아치는 질문 세례에 이림범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그제야 하련솔이 잡았던 볼살을 놓아주었다. 양 뺨이 새빨개진 채 이림범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형이 더 늙기 전에 빨리 결혼해야지.”

“이게!”

재차 덥석, 하련솔이 그의 볼살을 콱 꼬집었다. 전보다 강하게 쥐고 당기는 손길에 이림범은 이마를 찡그리며 웃었다. 그의 웃음을 따라 하련솔의 손이 위아래로 함께 흔들거렸다.

몹시 진지한 듯하면서도 장난기를 못 버린 황제를 마구 꼬집고 꾸중한 끝에, 하련솔은 자책했다.

“그래, 내가 뭐라고 널 신경 쓰겠어. 네 일은 네가 알아서 잘하겠지…. 사실 네가 아니라 내가 문제인데….”

그러자 저를 향한 꾸중을 흔쾌히 감내하던 황제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두 눈이 휘둥그렇게 커지고 웃음기가 싹 사라진 채 이림범이 퍼뜩 되물었다.

“형이? 형이 왜. 형이 어디가 뭐 어때서?”

가느다란 한숨과 함께 하련솔의 어깨가 아래로 슬그머니 내려갔다. 기운이 빠져 버린 듯 두 손을 이불 위에 툭 내려놓고, 하련솔이 중얼거렸다.

“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겠어.”

그에 이림범이 즉답했다.

“너무 예쁘고 정말 착하고 완전 귀엽고 진짜 깜찍한 황후라고 생각하겠지.”

“미쳤어? 적당히 해라.”

“…….”

신이 나 종알거리던 이림범의 입술이 딱 다물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못내 불만스러웠다. 하련솔에 대해 말할 때 그는 단 한 번도 과장을 보태거나 거짓말을 섞거나 장난질을 벌인 적 없었다. 그는 진심으로, 황후가 된 하련솔은 만인의 사랑을 받고 모두의 아이돌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쯤 되면 어떤 맹추라도 하련솔의 존재를 감히 잊을 수 없으리라 기대하기도 했다.

입술을 비죽 내밀고서 사랑의 세레나데를 참기도 잠시, 이림범의 입 밖으로 삼키지 못한 불만이 툭 떨어져 나왔다.

“…형이 어디가 뭐 어때서.”

하련솔이 크게 한숨 쉬었다. 혼잣말하듯,

“몰라….”

그러고는 고개를 푹 숙이는 태도가 몹시 시무룩해 보였다.

이림범은 얼른 하련솔의 정수리에 제 머리를 가져다 붙였다. 커다란 개처럼 연신 고갯짓을 하며 그는 하련솔을 다독이려 애썼다. 육신은 여리여리하기가 산수국에서 난 요정 같을지언정 마음만큼은 세상 누구보다 강하고 다부진 하련솔이었다. 그런 그가 어울리지 않게 자책을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한참 망설인 끝에 하련솔이 말했다.

“내 꼴이 웃기잖아. 기껏 교태전에 자리 잡았는데 혼자 연못에 빠져 죽을 뻔하질 않나….”

그에 이림범이 즉답했다.

“그 책임은 아무도 형에게 묻지 않을걸.”

“어?”

어리둥절하니 눈을 끔벅이는 하련솔을 달래어 가며, 이림범은 자초지종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제가 직접 하련솔을 물에서 건져 올리고 의사를 시켜 검진한 직후, 의금부 직원이 발견한 지도가 한 장 있었다. 그 지도에 찍힌 보도블록의 위치가 순 잘못되었더라 말했을 때 하련솔은 제 시종을 두둔했다.

“그거 보리가 준 건데…. 보리가 그랬을 리 없어. 걔가 얼마나 순한데. 너무 우유부단해서 걱정스러울 정도야.”

그에 이림범이 코웃음을 쳤다. 채찍으로 쥐고 휘두르라며 맡긴 시종이건만, 그런 시종을 대신해 변명까지 해주는 하련솔의 태도가 황당해서 귀여웠다.

설레설레 손사래를 치며 이림범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하련솔의 말마따나 의금부에서 조사해 보니, 시종 보리가 만든 점자판 지도는 인부들에게 주어졌던 보도블록 설치 도안과 완전히 일치했던 것이었다. 그 말에 하련솔은 인부들과 양 상궁을 재차 두둔했다.

“일당 받고 일하는 사람들이 뭘 일부러 잘못했겠어? 그리고 양 실장님이 오셨을 때 여기 화재경보기가 잘못 울렸거든. 내가 대피로 방향을 몰라서… 나 도와주느라 점검도 못 하고 바쁘셨지.”

남을 감싸느라 하련솔의 입은 멈출 새가 없었다. 결국은 내 잘못이다, 내가 점자 지도 읽는 법을 몰라서 혼자 넘어진 거다, 그렇다 치고 넘어가자며 그는 웃었다.

그러나 이림범의 생각은 달랐다. 마른세수로 웃음기를 닦아내며 그는 사고의 원흉, 무화 윤슬찬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의금부 심문실에 앉아 자백한 내용 또한 고스란히 알려주었다. 하련솔이 아닌 시종 보리를 저격하기 위해, 그녀의 일을 망치고자 보도블록을 몰래 옮겨놓았단 말이었다.

정 많은 하련솔이 범인의 책임까지 걱정하며 답답한 소리를 늘어놓을까 봐, 이림범은 미리 경고하듯 쐐기를 박았다.

“내 앞에서 그놈 행실까지 포장해 주려 하지는 마. 마음 같아선 그놈에게서 무화 자격을 박탈하고, 당장 궐 밖으로 내쫓고 싶은 걸 겨우 참고 있으니까.”

그러나 뜻밖에, 하련솔은 쉽게 수긍했다.

“그럼 그렇게 해.”

무표정하니 침착한 얼굴로, 고개까지 끄덕이며 건넨 동조였다. 그런 하련솔에게선 범인을 향한 어떠한 미움이나 원망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냉정하고 이성적이었다. 성이 난 이림범은 낯을 붉히며 이를 가는데, 하련솔은 감정의 동요 없이 곰곰이 말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 자체보다도,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잘 지내는 사람이 더 미운 법이야. 저 때문에 사람이 죽을 뻔했는데도 솜방망이 처벌을 받는다면, 그건 윤슬찬에게 더 나쁜 일이지. 다른 무화들이 그 애를 뭐라고 생각하겠어?”

이림범은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하련솔을 바라보았다. 제가 예상한 것과 완전히 다른 말을 하는데, 가만히 듣고 있자니 전부 맞는 말이었다.

“모두에게 미움받으면서 어떻게 궁에서 계속 살겠어….”

이림범이 내놓은 매정한 처벌에 동의하면서도 하련솔은 범인에 대한 연민을 잃지 않았다. 그런 점이 몹시도 그다웠다.

그 순간 이림범은 하련솔을 현자처럼 여겼다. 공손히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동그란 이마에 제 이마를 톡 가져다 맞대면서 이림범이 질문했다.

“그럼…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말한 거다? 형. 내가 그렇게 해도 나더러 너무하다고, 그놈이 불쌍하다고 속 터지는 소리 하지 않기야. 그러겠다고 약속할 수 있어?”

“응. 약속할게.”

이림범이 건넨 새끼손가락에 하련솔은 쉽게 제 손가락을 걸었다. 그리고 말했다.

“대신에… 부탁이 있는데…. 들어줄 거야?”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속삭이는 말에 척추가 다 간지러워, 이림범은 커다란 어깨를 꽉 웅크렸다. 그리고 자신만만하게 맹세했다.

“뭔데? 뭐든지 말만 해. 내가 다 들어줄게.”

그러나 젊은 황제는 곧 제 맹세를 후회해야 했다.

“그 애, 나 줘.”

뻔뻔한 청을 내놓으며 하련솔이 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