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90화 (90/135)

91.

무화 윤슬찬의 새 소식으로 궐 안이 발칵 뒤집혔다. 정확히는, 오늘부로 무화가 아니게 된 그저 윤슬찬, 궐 밖으로 쫓겨나게 생긴 무화병 환자 이야기로 난리였다. 황제가 직접 나서 그의 처벌을 명하되 무화 자격을 영구 박탈하라 일컬은 게 발단이었다.

이후 열린 회의에서는 의금부를 비롯한 여러 부서의 팀장들이 황제의 엄격한 고집을 꺾어놓으려 애먹었다. 장장 두 시간에 걸친 설득 끝에 젊은 황제는 두 손을 번쩍 들며 기권이라 외쳤다. 자네들의 주장을 내가 어찌 이기겠느냐며, 그는 윤슬찬의 처벌 기한을 영구에서 2년으로 대폭 축소했다. 목소리를 낸 팀장들을 하나하나 호명하며 그대들 모두 나에게 빚을 진 것이라고 또박또박 외치는 것은 덤이었다.

윤슬찬은 단숨에 동정의 대상이 됐다. 그를 욕하고 미워하던 무화들도 궐 밖으로 쫓겨난다는 소식에는 말을 얹지 못했다. 몇몇은 처벌이 너무 심하지 않으냐고 걱정하기도 했다. 윤슬찬은 일종의 본보기였다. 뭐든지 처음이 어렵다지 않던가. 한 번 제명 당한 무화가 생겼으니, 두 번째, 세 번째가 되지 않으려면 처신에 신경 써야 했다.

짐가방 하나를 덜렁 품에 안고 윤슬찬은 처소를 나섰다. 이대로 궁 밖으로 향하거든 그에겐 사망 선고가 내려질 터였다. 개화병을 고칠 방도를 잃어버린 채 2년을 버틸 가능성은 까마득히 낮았다.

그런 윤슬찬에게 옆 처소의 아청원이 다가왔다. 위안을 전하고자 ‘찬이 오빠’하고 절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를 윤슬찬은 애써 무시했다. 어차피 찬이라는 이름 또한 더는 쓸 수 없을 터였다.

터덜터덜 홀로 걸으며 그는 책자 하나를 떠올렸다. 홍문관에서 보내왔다며 아청원이 건넸던 그 책자에는 개화병 치료제의 개발을 위해 임상 실험에 참여할 환자를 구한다는 공고문이 실려 있었더랬다.

윤슬찬이 휙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멀찍이 위치한 홍문관 전각의 정수리가 힐끔 보였다. 이제 그에게 남은 길은 실험쥐가 되는 것밖엔 없는 듯했다. 신경이 예민하고 세상만사 모두 불신하는 그로서는 도저히 발이 떨어지질 않는 결정이었다.

그런데 대뜸, 의금부 직원 두 사람이 그의 양옆으로 다가와 붙어섰다. 당황한 윤슬찬은 짐가방을 꼭 끌어안았다. 찰갑 무늬 점퍼를 걸친 직원들은 그의 귓가에 고개를 대고, 번갈아 말했다.

“무화 하련솔 님께서 찾으십니다.”

“소란 피우지 말고 따라오십시오.”

팔뚝만 잡히지 않았을 뿐이지 압송과도 다름없는 태도였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윤슬찬은 교태전으로 끌려가, 정원을 지나자마자 뱉어지듯 등을 떠밀렸다. 전각의 정문 앞에서 그는 저를 주시하는 의금부 직원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고 다만 들어가라는 듯 전각 안을 손가락질했다.

‘하련솔이 날 부른다고? 도대체 왜…?’

안절부절못하며 윤슬찬은 마지못해 걸었다. 긴긴 복도에 접어들자 시종 하나가 타닥타닥 발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혹여 보리일까 싶어 윤슬찬은 어깨를 움찔했으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시종은 신입, 도롱이었다. 그녀는 윤슬찬의 낯을 대놓고 흘겨보며 그를 전각 깊숙이 안내했다.

짐가방을 품에 안고 윤슬찬은 걷고 또 걸었다. 마침내 이중 미닫이문이 활짝 열린 방이 보였다. 교태전의 주인이 자리하는 사적인 공간, 침실이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방의 풍경에 윤슬찬은 얼이 빠졌다. 딱 그만큼 화가 나고 괜스레 분했다. 심술을 못 이겨 떨면서 그는 침실 중앙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곤 마련된 방석을 밟고, 제자리에 몸을 앉혔다.

그의 시야를 가로막은 대나무 발이 단단했다. 그 너머에 앉은 이는 단연 무화 하련솔이었다. 촘촘한 나무 살 너머에 음영으로만 존재하며, 하련솔이 말했다.

“네가 찬이구나.”

언제 봤다고 친한 척이야? …치솟는 말대답을 꿀꺽 삼키며 윤슬찬은 고개를 푹 숙였다.

“네. 절 왜 부르신 건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입술을 짓씹으며 말했다.

“…물에 빠지신 일은 죄송하게 됐어요. 전 진짜,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니에요.”

“그래, 네 사정이라면 다 들었어.”

하련솔이 말했다.

“순식간에 살인 미수범이 되었으니 너도 많이 놀랐겠지.”

‘살인 미수’ 네 글자에 윤슬찬의 손가락이 더욱 안으로 말렸다. 의금부에 압송당하여 독방에 갇혀 지내기를 한나절, 그 시간 내내 그는 하련솔이 사경을 헤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었다. 하련솔이 잘못되는 날에는 네 목숨도 끝이라는 불안한 경고와 함께였다.

그러나 오늘 윤슬찬 앞에 자리한 하련솔은 무척 건강해 보였다. 빽빽한 발 너머의 인영이 미동조차 없이 꼿꼿했고, 목소리는 나긋하게 들릴 정도로 조용조용했다.

“폐하께서도 너를 내치시며 유쾌하진 않으실 거야. 그러니 혹시라도 폐하의 처벌을 원망하진 말고, 그 기간을 잘 보낼 방도를 찾는 게 좋겠지.”

“하…. 지금 그딴 조언이나 해 주려고 날 여기까지 부른 거예요?”

“야! 내가 암만 할 짓 없는 놈팡이라도 굳이 그러겠냐?”

“…….”

버럭 돌아온 외침에 윤슬찬이 입을 딱 다물었다. 놀란 그를 따라 하련솔도 잠시간 침묵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격식을 차려가며 조곤조곤 대화하고자 했건만, 빈정거리는 녀석의 태도에 휘말리고야 말았다.

“흠….”

눈썹을 찡그리며 하련솔이 목을 가다듬었다.

솔직히 말해 그는 자신이 타인에게 못생긴 나부랭이, 놀고먹는 백수, 세금 빨아먹는 못난 쪽쪽이로 평가받건 말건 상관없었다. 그러나 제 행실이 황제인 이림범에게 누가 되면 곤란했다. 그의 총애를 한몸에 받기로 소문이 나고, 그가 직접 꽂아 넣다시피 해 교태전을 차지한 입장에서 하련솔은 사극 드라마에 등장하는 착한 왕비 마마를 흉내 내야 했다.

재차 차분한 음성으로 하련솔이 말했다.

“어제 폐하께서 내 부탁을 하나 들어주셨어. 나는 너를 내 시종으로 들일 거야.”

“뭐라고요?”

그러나 이리 펄쩍 저리 펄쩍 뻗치는 윤슬찬의 성질머리는 상대의 태도와는 무관하게 더러웠다.

“아니, 지금 장난해? 내가 아무리…, 아무리 쫓겨나는 신세라지만, 당신! 당신 같은 무화의 종노릇 따위 누가 할 줄 알아!”

“흠…. 그게 왜 싫은데?”

“그걸 몰라서 물어?”

“어. 진짜 모르겠는데?”

하련솔의 대꾸에는 아무런 감정도 실려 있질 않았다. 너무나 무덤덤해서 오히려 윤슬찬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황당한 마음에 그가 허, 허… 코웃음을 치건 말건 하련솔은 꿈쩍조차 하지 않았다. 뻔뻔하리만치 당당한 태도로 그가 말했다.

“네가 이대로 어디를 가서, 무슨 수로 직장을 구할 거야. 공사장 알바를 뛰든 배달 오토바이를 몰든 여기서 일하는 것보다 좋을 수 있을 거 같아?”

그 질문이 윤슬찬의 입술을 꿰매놓았다. 공사장이고 배달이고 간에, 윤슬찬은 직장을 구해야겠다는 계획 자체를 떠올리지 못했다. 꽉 말린 제 두 손을 내려다보며 침묵하는 그를 향해 하련솔이 연신 말했다.

“야. 시종들이 얼마나 치열한 입사 경쟁률을 뚫고 들어왔는지 알기는 해? 그런 일자리에 내가 널, 연줄로 거저 꽂아주겠다는 거 아냐.”

“그게 무슨…, 무슨 논리야? 지금 나를 놀리려는 거지…?”

“사람 놀리자고 취직을 시켜 주는 놈이 어디 있냐?”

세상 물정 모르는 윤슬찬을 위해 하련솔은 제 제안의 이점을 상세히 설명했다. 교태전에서 일하기만 하면 월급도 나오고 야근 수당도 짭짤하고, 전각 내 남는 방을 숙소로 내줄 테니 거처도 단번에 해결된다. 직장 동료도 많은 데다 넷 중 둘은 경력자여서 윤슬찬이 할 일은 상대적으로 적을 터였다. 반년 뒤에는 당연히 정직원이 될 수 있을 것이고, 2년간 해고당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데다, 다른 무화들도 그를 구태여 공격하지 않을 터였다. 하련솔을 모시는 시종이 되면 그 입장이 격하됨은 사실이나, 동시에 하련솔의 편에 속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교태전은 황제가 가장 자주 오가는 전각이라 그의 개화병도 자연히 치유될 터였다. “그리고 네가 좋아하는 보리랑도 같이 지낼 수 있잖아.”

하나하나 이점을 꼽은 끝에 하련솔이 실소했다. 오도카니 앉아, 푹 숙인 고개를 들지 않는 윤슬찬은 고집불통이었다. 하련솔이라고 그런 그가 보기에 좋거나 예쁘지는 않았다. 그를 설득하여 제 곁에 두는 일 자체가 오지랖이란 것도 인지했다. 그래도 별수 없었다. 연고도 지연도 없는 무능력자로서 세상 밖에 내쳐지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미리 겪어 알기 때문이었다.

“찬아.”

하련솔이 말했다.

“착각하지 마. 당장 네 기분이 나쁘다고 해서 네가 이 일에 있어 피해자가 되는 건 아니야. 네 기분이 나쁜 건, 네가 잘못된 선택을 했기 때문이지.”

“…….”

그 음성을 듣는 내내 윤슬찬은 혼미했다. 하련솔의 말과 태도는 언뜻 중학교 선생님 같았고, 가져본 적 없는 큰 형 같았으며, 말괄량이 무화들의 목줄을 덥석 움켜쥘 황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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