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저기… 그럼….”
고개를 푹 숙인 채 머뭇머뭇, 윤슬찬이 말했다.
“차라리 이차혁 님의 시종이 되게 해줄 순 없어요?”
터무니없는 소리에 하련솔은 웃어버렸다. 이 와중에도 까탈스럽게 투정을 하다니 황당했다. 그래도 하련솔은 그를 한심하다 여기지는 않았다. 이림범이 알려 주기로, 개화병에 걸리기 전에 윤슬찬은 영재 출신의 피아니스트였다. 그 주위에는 어린 예술가를 치켜세우는 어른들밖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개화병에 걸려 콘서트를 망치자마자 부모는 그를 문정궁으로 보냈고, 황실을 상대로 손해 배상을 요구했다. 피아니스트로서 아들이 벌어다 줄 막대한 수익을 포기하고 그를 후궁으로 넘기니, 적절한 보상금을 달란 말과 함께였다.
오늘 하련솔 앞에 자리한, 윤슬찬은 어른도 아이도 아니었다. 문정궁에 던져지듯 들어선 그 해부터 성장이 멈춰 버린, 그는 이상한 존재였다.
“너는 혁이가 그렇게 좋아? 왜, 어떤 점이 좋은데?”
두 팔을 뒤로 뻗어 상체를 받치고서, 하련솔이 편안하게 질문했다.
“혁 님은 다른 무화들이랑 다르니까요.”
상대가 저를 순 어린애 취급하는 줄도 모르고서 윤슬찬은 시무룩하니 토로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혁 님은 특별했어요.”
그러면서도 그는 어째서 자신이 숨겨 온 이야기를 술술 꺼내는 건지 그 이유를 몰랐다. 하련솔을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사람이라 생각해서일 수도 있었고, 궁지에 몰려 더는 빠져나가거나 숨을 구멍이 없어졌기 때문일 수도 있었으며, 저에게 호기심을 내비치며 다정한 질문을 건네는 이가 너무나 오랜만이어서, 단지 그뿐일 수도 있었다.
처음 입궁했을 무렵 윤슬찬에겐 분노만이 존재했다. 삶이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그는 어느 무화와도 쉽게 어울리지 못했다. 처소에 틀어박혀 울기만 2주를 했다. 가까스로 밖을 둘러볼 마음을 먹은 날에는 그로부터 박대를 당하지 않은 무화가 없었다. 쭈뼛거리며 정자 옆 카페에 들어선 순간 모두가 그를 비웃었다. 몇몇 무화들은 지난날 윤슬찬이 소리쳤던 외국어 욕을 따라 하며 그를 조롱했다.
그 순간 윤슬찬은 제 처지를 통감했다. 이제 그는 무슨 짓을 해도 오냐오냐 이쁨받던 천재가 아니었다. 그렇게 충격받아 돌아서는 윤슬찬더러 이리 오라며, 선뜻 목소리를 낸 이가 이차혁이었다. 볕 드는 창가 자리에 앉아 그는 ‘찬아’하고 윤슬찬을 불렀다. 제 옆자리에 앉히더니 신상을 묻고, 그 길로 저를 따르는 이들에게 그를 소개해 주었다.
그날부터 윤슬찬은 이차혁을 좋아했다. 그의 사교성을 부러워했고 때때로 질투심에 미워하면서도, 다른 누구도 아닌 그가 황후가 되길 바랐다. 윤슬찬은 무화들을 콩쿠르에 참가한 악사처럼 여겼다. 그리고 그 콩쿠르에서 상을 탈 자격이 있는 이는 오직 이차혁뿐이라고 맹신했다.
“하하….”
윤슬찬이 털어놓는, 숫기 없는 이야기 끝에 하련솔이 웃었다. 그가 말하는 이차혁의 모습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조금은 부끄럽고 못내 자랑스럽게도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계곡에 들이닥쳐 대뜸 촌뜨기 아이들에게 화를 내던, 어린 날의 도련님이 있었다. 근처에 엄마와 저의 별장이 있으니 이곳 계곡까지 제집 마당이라고 바락바락 우겼더랬다. 고야읍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은 그런 도련님을 무시했다. 성별을 분간하기 힘들 만큼 예쁜 외모에 부드러운 말씨를 지닌 서울 도련님은 조롱의 대상이었다. 그런 도련님을 제 친구들 무리에 불러다 이름과 나이를 말하게 하고, 다른 아이들에게 소개해 준 게 다름 아닌 이은재였다.
‘와…, 나도 잊고 지냈는데….’
향수에 젖은 하련솔의 웃음을 조롱으로 오해하여, 윤슬찬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조촐한 짐가방을 안아 들고서 그가 말했다.
“다 놀렸으면 이제 됐죠? 전 그냥 나가 죽을게요. 폐하랑 잘 먹고 잘살든지 말든지.”
구시렁거리며 돌아서는 그를 따라 하련솔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느긋한 태도로 대나무 발 옆으로 걸어 나왔다. 열린 문을 향해 물러서던 윤슬찬의 두 발이, 상대와 시선을 마주친 순간 우뚝 멈췄다.
그리고 한 가지 생각이 윤슬찬을 지배했다.
‘속았다.’
여태껏 저에게 잔소리하고, 제 이야기를 듣고, 웃음 짓던 그는 무화 하련솔이 아니었다. 렌즈의 색이 옅고 테는 얇은 선글라스를 쓴 그 남자는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존재였다.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안경테를 스르르 밀어 올리는데, 속눈썹이 어찌나 긴지 렌즈 위에 기스를 내고도 남을 성싶었다.
그런 그는 하련솔이 아니었다. 윤슬찬은 그렇게 자신했다. 며칠 밤 속을 끓여가며 하련솔을 생각하고, 미워하고, 원망하고 저주하느라 뇌를 태웠기에 그는 잘 알았다. 말갛게 희고 아름다운 이 남자는 절대로, 뭉개진 두부 같고 그림 없는 백지 같던 그 하련솔이 아니라는 걸.
“…아….”
조촐한 짐가방을 꽉 끌어안으며 윤슬찬이 머뭇거렸다. 누구시냐고 감히 물을 용기조차 나질 않아 고개를 푹 숙이는데, 난생처음 보는 아름다운 남자는 웃는 낯으로 그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찬아.”
핏대가 불거지도록 꽉 말린 손을 쓰다듬으며, 그가 말했다.
“문정궁에 남아. 네가 한 짓에 책임을 져.”
두 눈을 꾹 감고서 윤슬찬은 고민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작금의 상황이 파악되질 않았다.
“그럴 거지, 응?”
낯선 상대가 건네온 달콤한 말을 거부할 방법 또한 떠오르질 않았다.
“네, 네….”
혼이 빠진 듯 얼떨떨한 채 그는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그것만으로도 어여쁜 사내의 함박웃음을 자아낼 수 있었다.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윤슬찬은 짐가방을 떨어뜨렸다.
어쩌면 이차혁을 향한 그의 사랑은 다른 시발점을 지녔는지도 몰랐다. 선율을 쫓아 건반 위를 두드리던 예술가답게, 그는 아름다운 것을 좋아했으므로.
***
저녁 무렵, 이차혁의 처소를 찾은 손님이 있었다. 양복 재킷을 접어다 팔 한쪽에 걸친 사내는 오가는 이들의 눈을 피해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두들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처소의 주인이 문을 열어 주었다. 맨투맨 티셔츠에 폭이 넓은 청바지 차림새로 선 이차혁은 몹시도 편안한 모습이었다. 휴식 시간을 방해해 죄송하다는 말을 시작으로, 황제의 전속 비서 박총명이 입을 열었다.
“오늘 조회에서 폐하께서… 올해가 가기 전에 황후 책봉을 마치실 거라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박 비서는 슬픈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에게 있어 무화 이차혁은 아이돌과도 진배없었다. 내내 응원해온 이에게 비통한 탈락 소식을 전하자니 마음이 찢어지는 양 아팠다.
“으음.”
반면 이차혁의 태도는 데면데면했다. 팔짱을 끼고 비스듬히 벽면에 기대어 선 채, 그는 왼쪽 발로 오른쪽 발목의 벌레 물린 자국을 긁적였다. 덤덤하니 고개만 끄덕이는 무화를 살필 새도 없이 박 비서가 말했다.
“그리고 그 후보로 언급된 이는… 하련솔 하나뿐입니다….”
“으으음.”
“죄송합니다….”
영문 모를 사과를 받으며 이차혁은 제 목덜미를 안마하듯 문질렀다. 그리고 물었다.
“근데 총명 씨는 조회에 출석할 자격이 없지 않나?”
“네? 네. 그렇습니다.”
“그럼 그 소식, 폐하께서 알려주신 거네요?”
“네? 네…. 그렇습니다….”
어리둥절하니 묻는 말에 대답하는 박 비서를 내려다보며, 이차혁은 콧김을 길게 내쉬었다. 황제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황후 책봉 소식일랑 제 입으로 통보하자니 멋쩍고 미안한지라, 박 비서를 이용해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새어나가게끔 한 모양이었다. 그 의도 또한 알 만했다. ‘나는 이렇게 솔이 형을 향해 직진하겠다’, ‘그러니 너도 네 성에 차고 분이 풀리도록 마음대로 해 봐라’….
“그래.”
이차혁이 대답했다. 박 비서가 아닌 젊은 황제, 제 친형에게 대고 하는 대꾸였다.
그 길로 이차혁은 두루마기 하나를 집어 들고 처소를 나섰다. 멋들어지게 화려한 한복도 장신구도 없이, 맨투맨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궐내를 활보하기란 무화로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거의 뛰는 듯한 속도로 성큼성큼 걷는 그의 뒤로 박 비서가 따라붙었다.
“어, 어디로 가십니까? 혁 님…! 제가 이 이야기를 해드린 건 비밀인데요…!”
“그래요, 그래요.”
쓸모를 다한 박 비서를 향해 왼손을 휘휘 내저으며 이차혁은 교태전으로 직진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교태전은 활짝 개방된 채였다. 용기둥을 타고 오르는 댕댕이덩굴까지 훤히 내다보일 정도였다. 대문 앞에서 이차혁은 샛노란 두루마기를 휘릭 걸쳤다. 그 태도가 떼인 돈을 받으러 온 사람처럼 씩씩했다. 그대로 ‘공사 중’ 팻말이 붙은 못을 지나 전각으로 들어서자, 박 비서도 더는 그를 쫓지 못했다.
휑한 길목에 홀로 남아, 박 비서는 잠시간 제자리에 머물렀다. 바지 뒷주머니에 든 은단을 꺼내 씹으면서 가슴 위를 퉁퉁 치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무화 이차혁이 마침내 하련솔과 담판을 짓나 보다 생각했다. 그의 예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이차혁은 분명히 제 감정대로 움직여 담판을 짓고자 하였으나, 하련솔의 머리채를 쥐어뜯는 방식으로는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하련솔 앞에서 약자였다. 덜 자란 도련님이자 애교 많은 동생이었다.
“솔이 혀엉.”
말끝을 길게 늘이며 침실에 들어선 그를, 시종 여럿이 동시에 돌아보았다. 몇 차례 눈인사를 나눠 온 초롱은 올 손님이 왔다는 양 편안했지만, 이외 시종들은 그러지 못했다. 특히나 옥색 삼회장저고리를 난생처음 입고, 낯설고도 두려운 출근을 시작한 시종 윤슬찬은 눈알이 튀어 나올 지경으로 놀랐다.
그러나 이차혁의 관심은 어느 시종에게도 가 닿지 않았다. 그의 목표는 오직 하련솔이었다. 선글라스를 끼고도 반짝이는 눈망울을 미처 가리지 못한, 이제야 제 얼굴을 똑바로 바라봐 주는 하련솔, 오직 그뿐이었다.
“혁아.”
하련솔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