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초롱의 지휘에 따라 시종들이 후다닥 자리를 비켰다. 종종걸음으로 빠져나가는 이들을 향해 하련솔은 손님이 오셨으니 다과를 내오라 말했다. 그에 초롱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윤슬찬에게 제대로 된 사과며 인사를 시킬 겸 시종들을 모아 놓고, 오후 내내 다과를 즐긴 하련솔이었다. 손님 대접을 핑계로 또 간식을 먹겠다니 그의 혈당값이 걱정스러웠다.
‘대령숙수께서 또 신나서 한 상 차리실 텐데…. 오미자차에 땅콩 한 줌만 달라고 부탁해야겠어.’
다섯 명의 시종이 빠져나간 침실에 두 남자가 남았다. 가까이 다가와 풀썩 몸을 앉히는 이차혁이 그러듯이, 하련솔 또한 상대의 눈을 구경하기 바빴다.
“나 잘 보여요?”
이차혁이 물었고,
“응. 잘 보여.”
하련솔이 웃으며 답했다.
그러면서 그는 선글라스를 벗었다. 눈이 언제 시려올지 모르기에, 다른 한편으론 시력을 완전히 회복했음을 감추고자 쓰고 있던 선글라스였다. 암막 무렴자가 쳐진 침실, 이차혁 앞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가만히 고개 들어, 하련솔은 맨눈으로 이차혁을 직시했다.
방긋방긋 꽃처럼 웃던 이차혁의 얼굴 위로 실망스러운 기색이 번졌다.
“별로 놀라지 않네요? 내 얼굴 보면 더 좋아해 줄 줄 알았는데….”
얼굴에 대한 자부심이 한껏 실린 소리였다. 피식 실소하면서도 하련솔은 그 자긍심을 이해했다. 이차혁은 과연 한눈에 마음을 빼앗기도록 어여쁜 얼굴을 달고 있었다. 산에 살면 옥기린의 현신이란 오해를 살 것이고 바다에 살면 아기 용언신으로 모셔졌을 성싶었다. 시골 마을 계곡에서라도 그는 누구의 시선을 사로잡고 애정을 쉽게 얻어냈을 터였다. 하련솔은 이미 그런 그를 만나보았다.
“어릴 때랑 똑같은걸, 뭐. 넌 원래 예뻤잖아.”
그러자 이차혁이 어린아이처럼 헤헤 웃었다. 하련솔도 그 미소를 따라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연신 감탄 어린 칭찬을 늘어놓았다.
“정말 잘 컸다, 혁아….”
“나한테 그런 말 하는 사람은 형뿐이에요.”
서로를 마주 보며 웃기를 한참, 두 사람은 침묵했다. 이차혁은 밝은 뺨 위에 스몄던 미소를 천천히 지웠다. 그런 그가 떠올리는 생각을, 하련솔은 어째선지 알 것 같았다.
무화 하련솔이 독하디독한 개화병 증세를 전부 떨쳐 냈음은 황제와 가감 없는 정을 나누었단 의미였다. 빠르게 그 사실을 눈치챘을 이차혁 앞에서, 하련솔은 멋쩍어할지언정 미안해하진 않았다. 이차혁 또한 그에게 동정이나 사과를 바라진 않았다. 미련이 남은 눈길로 하련솔의 갈색 눈동자를 살피다가, 이가 보이도록 웃으며 고개를 뻗을 뿐이었다.
이차혁의 어여쁜 얼굴이 하련솔의 어깨에 푹 파묻혔다. 하련솔이 그런 그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지난날 열병으로 고생하던 저에게 이차혁이 해준 동작 그대로였다.
“솔이 형.”
이차혁이 속삭였고,
“응.”
하련솔이 재차 답했다.
“내가 했던 고백 기억해? 형을 갖고 싶다고… 내가 그랬었는데.”
“응…. 기억하지.”
“그때 형이 그랬잖아. 다시 생각해 보고, 다시 말해 달라고. 그러면 형도 내게 대답을 들려주겠다고….”
“그래. 그랬었지.”
한발 늦은 고백을,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전하고자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보록을 찾았다. 정확히는 그 속에 든 개구리 포포를 찾았다. 개구멍 처소에서 지낼 때보다 보록의 크기며 화려함이 변했을지언정, 그 속에 덜렁 자리한 낡은 인형은 여전했다. 이차혁은 어릴 적 제가 좋아하던 개구리 인형을 두 손으로 집어 들었다. 그러곤 아귀도 잘 맞질 않아 삐걱거리는 지퍼를 힘주어 열었다. 포포의 몸체는 연회색으로 빛바랬으나, 그 배 속에 든 물건은 여전히 빛깔이 새빨갛고 모양도 선명했다.
묵직한 노리개에 달린 옥 장식을 덥석 집어 들고 실타래를 손가락으로 빗질하며, 이차혁이 속삭였다.
“은재 형.”
그가 그렇게 부르기에,
“응.”
하련솔도 다시금 이은재가 됐다.
“유치하지만 나, 이 노리개…. 이걸 형에게 준 날… 내 마음도 같이 줬다고 생각했었어.”
어색하게 말을 더듬어가며 이차혁이 말했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조금은 한심하고, 못내 바보 같은 과거였다. 사랑받는 둘째 황자이던 그는 제 행동에 남들이 크게 감동할 거라 착각했었다. 그만큼 오만하고 순수하던 시절이었다. 이은재에게 실질적으로 ‘좋아한다’ 고백하진 못한 주제에, 그의 팔에 자주 매달리고 그의 등에 자주 업히고, 또 그에게 제 소중한 인형과 보물을 주었으니 고백한 거나 다름없다고 오판했다. 내가 이렇게 베풀었으니 은재 형도 당연히 내 마음을 알아주리라, 기꺼이 받아 주리라 철석같이 믿었더랬다.
그 시절 저의 어리숙함이 이차혁은 후회스러웠다. 좀 더 성숙하고 좀 더 어른스러웠더라면, 그 옛날의 이은재에게 제대로 고백하고 얼큰하게 차이기라도 했을 텐데. 그랬더라면 제 마음은 아팠겠으나 은재 형의 뇌리에 조금 더 또렷하게, 의미 있는 존재로 남을 수 있었을 텐데. …후회는 언제 해도 늦는 법이었다.
“나 그때부터 형을 좋아했어. …지금도 형을 좋아해.”
지난 후회에 힘입어 이차혁이 고백했다.
“고마워. 혁아.”
긴 시간을 지나 이은재가 대답을 돌려주었다. 이차혁은 그 인사 뒤에 이어질 말이 무언지 벌써 알았다.
“…그런데 미안해.”
예상한 것 그대로의 거절이었다.
그에 이차혁은 크게 웃는 동시에 한숨 쉬었다. 속이 후련하기도 했고, 미련으로 부글거리기도 했다. 슬퍼야 할 때인데 어째선지 조금 기쁜 것도 같았다. 제 날것인 감정을 똑바로 드러내 놓고, 내가 당신을 좋아한다고, 오래 좋아해 왔다고 외친 것만으로도 큰 숙제를 해치운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은재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그가 건넨 사과의 이유는 비단 거절에만 있진 않았다.
“그 노리개는 네가 준 게 아니야….”
아랫입술을 슬그머니 짓씹으며 이은재가 눈썹 끝을 내렸다. 제 선물을 평생 아끼며 보관해 주었다고, 자신만만하게 믿고 기뻐하던 이차혁이 크게 실망할까 봐 걱정됐다.
그러나 그 순간 이차혁을 감싼 것은 실망보다 큰 의문이었다.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이차혁은 어른이 된 이은재의 얼굴을, 그리고 제 손에 들린 노리개를 번갈아 바라봤다. 옥 장식을 높이 추켜들고 기다랗게 늘어지는 붉은 실을 노려보면서, 그는 중얼거렸다.
“형이 착각한 거겠죠. 이거 내가 준 거 맞잖아.”
미궁에 빠진 이성이 이리저리 갈팡질팡했다. 이차혁이 기억하기로 이 노리개는 분명히 제 것이었던 그 물건이 맞는데, 이은재는 그렇지 않다고 자신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에 이차혁은 조금 화가 났다. 지나치게 당혹스러워 더럭 치민 성화였다.
“형. 내 말이 맞아요.”
영문 모를 불안감에 젖어 이차혁이 말했다.
“이건 엄마가…, 엄마가 나한테 준 거예요. 귀하디귀한 보물이라 그랬어요. 세상에서 제일 좋은 거라 그랬다고요. 내가 아니면 또 누가 엄마한테…. 엄마가, 도대체 누구에게 뭘 더 준단 말이에요?”
속사포로 쏟아내는 질문에 하련솔은 대답하지 못했다. 멍하니 눈을 끔벅이며 이차혁을 올려다볼 따름이었다.
그의 두 눈을 가만히 마주보기도 잠시, 이차혁이 입을 크게 벌렸다. 그는 알고 싶지 않은 가정을 떠올렸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끔찍한 가정이 하나, 그의 머릿속을 점령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빠져나가질 않았다.
***
자주색 오후, 고야읍의 작은 절간은 쥐 죽은 듯 잠잠했다. 폭풍우가 몰아치고 지나간 자리에 벌레 우는소리 하나 없었다. 흙바닥은 질척하고 돌바닥은 미끄러웠다. 조촐한 전각에 하나 있는 볼거리, 연회색 석탑마저 거무죽죽한 빛깔로 흠뻑 젖어 있었다.
하늬안은 부쩍 성질이 난 상태였다. 기껏 황제를 설득해, 제 아들을 데리고 깡촌 마을에 휴양을 온 그녀였다. 말이 ‘휴양’이지 기실 목표는 따로 있었다. 그 목표를 이루기까지 닷새가 채 남지 않은 때였다. 그런데 대뜸 황후가 찾아왔다.
빗물에 전신을 흠뻑 적신 채 귀신처럼 나타난 황후는 기절한 아이를 안고 있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녀는 손님용 방 하나를 얻었고, 제 아들을 이부자리에 눕혔다. 그러곤 두문불출했다. 작은 방에 틀어박혀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아이 또한 밖으로 보여 주질 않은 것이었다. 아이와 할 이야기가 있다며 가피 스님이 말해도 듣지 않았고, 밥상을 손에 든 하늬안이 억지웃음을 지으며 찾아도 마찬가지였다.
“언니.”
창호지 발린 문 너머를 기웃거리며, 하늬안이 속살거렸다.“애는 좀 괜찮아요? 비를 많이 맞은 것 같던데…. 저도 걱정이 되어서 그래요. 약이라도 갖다 드릴까요?”
부드럽게 건넨 말끝에 매정한 대꾸가 붙었다.
“내일 동이 트자마자 내 아들을 데리고 문정궁으로 돌아갈 테니, 너는 신경 쓰지 마라. 더는 문 두드리지 말고, 아이를 깨우지도 마.”
반듯하게 전해 온 말에는 하늬안이 간섭하거나 끼어들 틈새가 보이질 않았다. 쪽마루에 밥상을 내려놓고서 하늬안은 입술을 짓씹었다. 황제의 사랑을 완전히 잃고, 하나뿐인 자식은 악귀로 판가름이 났음에도 황후는 여전히 황후였다. 직급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고상한 태도 또한 잃질 않았다. 그녀 앞에서 마음이 조급한 이는 언제나 하늬안이었다.
‘어쩌지? 이제… 어떡해야 하지?’
여유만만한 태도로 채비 중인 거사가 있었다. 모든 게 계획대로 척척 진행되어 가는데, 하필이면 황후가 이곳까지 직접 행차할 게 뭐란 말인가.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기에, 이제 와 엄마 행세를 하려 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평소엔 자식새끼한테 관심도 없더니….’
하늬안의 불만을 들어줄 이는 결국 가피 스님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