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93화 (93/135)

94.

황제의 신뢰를 한 몸에 받도록 도량이 훌륭한 회주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화로 이름을 날린 하늬안이 지저분한 창고 뒤에 숨어들었다. 너절한 거미줄을 피해 가며 어둠 속에 밀회하는 모습이 마치 도둑들 같았다. 가피 스님은 진땀에 젖은 얼굴을 닦아내느라 정신없었고, 하늬안은 제자리에서 발을 구르도록 전전긍긍했다.

“어떻게든 당장 일을 처리해야만 해요. 폐하를 속여 가며 이, 지랄을…, 아! 씨…! 내가 그동안 얼마나 고생한 줄 알기나 해요?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신 안 온다고요. 장장 2년이야. 2년 동안 첫째 황자를 빼낼 방도가 또 있겠어요? 악귀라며. 악귀 새끼 떼어내 준다며. 그 핑계가 또 통할 거 같으냐고요?”

성질을 바락 부리는 그녀를 보고도 가피 스님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손부채질하며 그 모습을 구경했다.

“아우, 씨…. 그간 황후가 어찌나 보채고 말을 얹던지… 내 거처까지 경복궁으로 옮겼어요. 폐하랑 만나지 못하게 하려고 그 짓까지 했다고요. 나도 문정궁이 훨씬 좋은데, 욕은 욕대로 처먹어가며…. 내 꼴이 이게 뭐야?”

하늬안이 충분히 애를 태우고, 불안하다 못해 손발을 떨기 시작할 무렵에야 그는 준비해 둔 말을 꺼냈다.

“걱정하지 말고 침착해.”

노인이 손주에게 조언하는 양 고압적인 태도였다.

“황자에게 직접 주입할 수 없다면, 물건에 담아 전달하면 그만 아니겠어.”

그러면서 그는 하늬안에게 두 개의 물건을 보여 주었다. 두 황자의 대체재로 급히 준비된 물건의 정체는 생김이 몹시 비슷한 노리개였다. 개중 왼쪽 손에 쥔 노리개의 나비 장식을 뚝 부러뜨리며, 가피 스님이 말했다.

“헷갈리지 말고 똑바로 전달하기만 해. 전달한 후엔 찾지도, 보지도 말고. 되도록 소유자만 들여다보고 만져야 해. 내 말 알아듣겠어?”

그러면서 그는 하늬안의 왼손에 멀쩡한 노리개를 올려 주었다.

“자. 이게 우리 황제님 거.”

곱상한 오른손에는 날개 장식이 사라진 노리개가 얹혔다.

“이건….”

“알겠으니 그만 말해요. 누가 듣겠어요.”

그러면서 하늬안이 휙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 말마따나 자박자박 발소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가피 스님이 얼른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이마를 적신 진땀을 마저 훔쳤다. 하늬안은 급히 노리개 둘을 제 주머니에 숨겼는데, 묵직해진 주머니에서 믿음이 안겨 준 착각인지 실제인지 모를 열기가 느껴졌다. 긴장한 눈짓을 나누는 두 어른을 찾아온 이는 그러나 황후가 아니었다.

“엄마….”

잠이 덜 깨어 눈가를 문지르는, 그는 둘째 황자였다.

“아….”

안도의 미소를 짓는 하늬안을 향해 아이는 직선으로 다가왔다. 웅얼웅얼, 화장실… 그러고는 언제까지 여기에 있어야 하냐고 투정하는 말소리가 작았다. 어여쁜 제 아들을 두 팔로 감싸 안으며 하늬안은 스님을 돌아보았다. 입술 앞에 검지를 세우고서 비밀을 지켜달라 손짓하는 그녀를 향해, 가피 스님은 오른손바닥을 휙 내밀어 보였다.

하늬안이 이마를 찡그리며 속삭였다.

“입금할게요.”

그래도 스님은 내민 손을 거두지 않았다. 그 뻔뻔한 태도에 하늬안이 코웃음을 치며 눈을 굴렸다. 그러면서 그녀는 왼손에 낀 옥가락지 두 개를 풀어 그의 손바닥에 얹어주었다. 묵직한 보증을 받은 뒤에야 스님은 그녀를 보내 주었다. 잠이 덜 깬 눈으로 저를 돌아보는 둘째 황자를 향해 인사하듯 손을 흔들어 주기도 했다.

하늬안의 안내에 따라 둘째 황자는 야외 화장실에 도착했다. 독립심과 수치심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는 도와 주겠다는 엄마를 문밖으로 밀어내고, 홀로 볼일을 마치고 손까지 꼼꼼히 씻었다. 제 옷가지에 젖은 손을 문지르며 나서는 아이를, 하늬안은 기다렸다는 듯 붙잡아 세웠다. 그러곤 고운 노리개를 하나 내밀어 보였다.

“아들. 이거 어때 보여? 예쁘지 않니?”

“응? 응.”

“정말 귀하디귀한 거란다.”

새빨간 타래 끝에서 나비 장식이 빙빙 돌았다. 그때마다 황금빛이 반짝거리는 것이 꼭 나비가 힘차게 날갯짓하는 듯 보였다.

“우리 아들에게 제일 잘 어울리는 보물이지. 오직 너만을 위한 거란다. 그러니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말고, 잘 숨기도록 해.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만 품고 다니는 거야. 알겠니?”

“으응….”

상황이 여의치 않아 사람이 아닌 물건에 대고 주술을 건 판국이었다. 그래도 하늬안은 불안하지 않았다. 제 아들을 완전히 신뢰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쏙 빼닮은 둘째 황자는 제 것이라면 무엇 하나 양보할 줄 모르며 자랐다. 천성이 나쁘거나 이기적이어서는 아니었다. 양보를 권유받지도, 양보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는 환경에서 살아 그러했다. 귀하디귀한 보물이라 알려주었으니, 황자는 그것을 제 것으로 여기며 반드시 품고 지낼 터였다.

“자, 이제 방으로 돌아가. 텔레비전 보고 쉬고 있으렴.”

얌전한 아들의 엉덩이를 두들기며 하늬안이 말했다. 그러자 노리개를 꼭 쥔 팔을 길게 뻗으며 아이가 투정했다.

“왜애. 우리 집에 안 가? 여기 재미없어. 집에 갈래.”

“조금 이따 갈 거야. 대신 엄마가 저녁에 치킨 시켜 줄게. 응?”

“진짜? 진짜지!”

제자리에서 팔짝 뛰며 아이가 작은 손을 뻗어 왔다. 쭉 내민 새끼손가락에 노리개의 빨간 실이 엉켜 있었다. 하늬안은 아이의 조그만 손가락에 제 새끼손가락을 걸어 주었다. 순진한 둘째 황자는 함박웃음으로 두 뺨이 동그래진 채 말했다.

“형아도 데려가도 돼?”

그에 하늬안의 미소가 뻣뻣해졌다. 구겨진 미간을 애써 펼치며, 그녀는 아쉬운 듯 거짓말했다.

“형아는 형아네 엄마랑 밥 먹는댔어. 자, 얼른 저리 가 있어.”

그러면서 등을 떠밀자 아이도 마지못해 걸음을 옮겼다. 쫄래쫄래 절의 본관으로 향하는 뒷모습이 앙증맞고 귀여웠다.

제 아들이 사라진 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도 잠시, 하늬안은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씁… 잇새로 공기 빠는 소리를 내고, 아야야… 참았던 신음을 흘리기도 연속이었다. 주머니 속이 너무 뜨거워, 허벅지 살이 다 타는 고통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허둥지둥하며 그녀는 날개 장식이 없는 노리개를 꺼내 반대쪽 주머니에 넣으려 했다. 그러나 맨살에 닿는 노리개가 불덩이처럼 뜨거워, 그대로 땅에 떨어뜨리고야 말았다.

“앗…!”

하늬안은 인상을 쓰고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화염에 손을 집어넣은 것처럼 살이 아픈데, 육안으로 보이는 화상은커녕 발긋한 흔적조차 없었다. 이를 갈며 고민하기도 잠시, 하늬안은 옷소매를 길게 뻗어 손을 덮었다. 그러곤 집게손가락으로 어렵사리 노리개를 집어 들었다.

기쁜 마음에 조바심이 들어, 좋은 것은 제 아이에게 금세 넘겼지만 나쁜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혹여라도 물건이 잘못 섞이지 않게끔, 남은 노리개만큼은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직접 보관할 생각이었다. 그래야 혹여라도 제 아이에게 해 끼칠 일 없이 안전하지 싶어서였다. 한데 이렇게 뜨거워서야 제대로 가져갈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점점 더 뜨거워지는 거 같은데….’

쯧… 혀를 차며 고민하길 한참, 하늬안은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다. 휙 고개를 돌리자 불 꺼진 절을 지키는 부처가 보였다. 회주의 자랑이자 값나가는 작품인 황금 불상은 어둠 안에서도 빛을 냈다. 그는 거대한 풍채를 자랑하며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내 또 다른 인기척이 하늬안의 관심을 앗아갔다. 헉, 헉… 밭은 숨소리가 들렸고, 저 멀리 석탑 앞에 쪼그려 앉은 인영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살피지 않아도 그 정체가 뻔했다. 모델처럼 크고 마른 몸매와 듣는 이의 귀를 사로잡는 목소리, 헉헉거리며 아파하는 기색이 영락없이 황후였다. 황후는 돌 울타리에 어깨를 기대고 주먹으로 제 가슴을 치며 개화병을 앓고 있었다. 늘 그렇듯 과호흡이 온 모양이었다. 조금 더 내버려 두면 천식 증세가 와 기절할지도 몰랐다.

“언….”

…니. 그렇게 부르며 다가서려다, 하늬안은 발을 멈췄다.

“…….”

황후가 야외에 나와 있단 것은 그녀의 아들, 첫째 황자가 혼자라는 의미였다. 재차 손가락이 타는 듯 아리기에, 길게 고민할 새도 없이 하늬안은 등을 돌렸다. 소리 죽여 재빨리 찾아간 곳은 단연 손님용 방이었다. 두 사람분의 이부자리로 꽉 채운 작은 방구석에, 아이는 깊이 잠든 모습이었다. 망가지라고 기도하고 부러지라고 흔들어도 도무지 죽질 않는 끔찍한 아이였다.

두 팔 뻗어, 하늬안은 아이의 어깨를 와락 붙잡았다. 그대로 잠든 아이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얘. 초저녁부터 자지 말고 일어나 봐.”

그러자 끙끙거리며 눈을 뜨더니, 화들짝 놀라며 상체를 일으켰다. 텅 빈 듯 하얗던 얼굴을 새카맣고 커다란 눈동자가 장식했다.

절 보며 당황한 아이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늬안은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