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95화 (95/135)

96.

사실, 노리개를 돌려주겠다는 목표는 아무래도 좋은 허울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은재는 서울 도련님의 별장이 아닌 계곡으로 향했다. 오전까지만 하더라도 범람한 물로 몸집을 부풀렸던 계곡은 언제 그랬냐는 듯 얌전해진 모습이었다. 검은 물을 바라보며 갈증을 느끼기도 잠시, 은재는 씩씩하게 운동화를 벗어 바위 위에 올려 두었다. 그리고 물길을 가로질러 비밀기지로 향했다.

순전히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의해서였다. 혹시, 아이도 저처럼 종일 제 생각을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혹시, 밤이 늦어서야 그 무서운 아주머니를 피해 나올 수 있게 될지도 몰랐다. 혹시라도 그렇다면, 아이와 저의 약속 장소는 단연 그들만의 비밀기지였다.

추적추적한 빗물을 머금은 비밀기지 내부는 무척 춥고 쌀쌀했다. 검은 동굴 안에 몸을 앉히고서, 은재는 포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기다리기 시작했다.

“…….”

누가 보았더라면 바보라고 비웃도록 긴 시간을 은재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렇게 하염없이 기다리기를 얼마나 했을까, 자박자박 발소리가 들려왔다. 헉헉거리는 어린 숨소리도 함께였다.

“애기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은재는 커튼을 걷듯 폭포수를 손날로 가로질렀다. 그러자 쏟아지는 물의 틈새로 동굴 바깥이 보였다. 오후 내내 수백 수천 번 올려다보았던 길을 따라 내려온 아이가 있었다.

“은재 형…!”

이은재가 벗어놓은 운동화 옆에서 아이는 잠시 비틀거렸다. 형을 따라 제 신발을 벗으려다가, 제가 여태껏 맨발로 뛰어왔음을 깨닫고 멈칫한 것이었다. 망설임 없이, 아이는 계곡 물살을 가로지르며 비밀기지에 도착했다.

은재는 활짝 웃으며 아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반가운 마음에 아이를 품에 안고, 몸은 좀 괜찮으냐고 묻고자 했다. 그런데 가타부타 말할 새도 없이, 아이가 이은재의 손바닥에 붉은 노리개를 덥석 올렸다.

은재가 놀란 얼굴로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뭐야?”

“마, 만… 만병약!”

땀에 젖은 얼굴로 헐떡거리며 아이가 소리쳤다. 조그만 동굴 안에 메아리가 울리도록 큰소리였다.

아이에게 있어 그 노리개는, 만병통치약. 제 인생에 처음으로 받은 선물이요, 제 고통을 끝내 줄 수 있는 멋진 보물이었다. 아이는 그 보물을 은재에게 주고자 했다. 제 고통은 이미 한 차례, 이은재가 감싸주었으니까. 제 눈물도 이은재가 닦아 주었고 제 공포도 이은재가 털어 냈으니까.

그러니 오늘 아이에게는 만병통치약이 필요하지 않았다. 다만 아이는 이은재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가 되고자 바랐다. 제가 받은 천진한 애정의 반의반만큼이라도 좋으니까, 제 무엇이든 은재 형에게 베풀고 싶었다. 그러니 귀한 약도 소중한 보물도 이은재가 다 가져야 했다. 이은재가 가져가서, 아픈 어머니의 병을 고치고 더더욱 행복해졌으면, 아버지의 보살핌과 어머니의 사랑을 오래오래 받으면서 건강하게 살았으면… 그렇게 바랐다. 이미 생 악귀인 저보다는 이은재가 중요하기에, 딱 그만큼 이은재를 사랑하기에 그리했다.

“혀, 형…. 형이 가져. 이거 되게 좋은 거야. 진짜 좋은 거야…. 뭐냐면, 뭐든지 다, 다 고쳐 주는 약인데. 몰래 간직하면, 그… 아픈 게 다 낫고, 좋은 일… 엄청 많이 생기고, 무조건 건강해지는 거야.”

어른의 속삭임은 아이의 귀로 들어가, 순박하기 짝이 없는 축복이 되어 쏟아져 나왔다.

“행복해질 거야!”

그러면서 아이는 은재의 품에 대고 노리개를 밀어 넣었다. 마지못해 그것을 받아쥐며, 은재는 큰 소리로 하하 웃었다. 시선을 내려 대충 살펴본 노리개는 아이의 동생에게 받은 것과 조금도 달라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형제의 부모님이 그들에게 각자 하나씩, 장신구를 선물한 것 같았다.

“흠….”

은재가 침음성을 냈다. 아이는 힐끔힐끔 은재의 눈치를 살피느라 바빴다. 은재 형이 제 선물을 좋아하는지, 조금이라도 만족해 웃어 주는지 확인하는 눈짓이었다. 콧김을 흥 내쉬며 은재가 말했다.

“애기야!”

그러자 아이의 어깨가 파드득 뛰었다. 놀란 눈으로 절 보는 아이의 양어깨를 붙잡으며, 은재는 큰소리로 외쳤다.

“그렇게 좋은 거면 너도 가져야지!”

어차피 돌려주려 했던 물건이 있었다. 은재는 개구리 포포의 등줄기 지퍼를 찍 열었다. 그러곤 아이의 동생에게 받았던 노리개를 꺼내어, 아이의 텅 빈 손에 얹어 주었다. 아무런 망설임도 고민도 없이 그렇게 했다.

그러자 불안에 젖은 아이의 얼굴이 단숨에 환해졌다. 비로소 기쁜 듯, 감동한 듯 아이가 웃었다. 소리 없이 보시시 번지는 웃음꽃이 보기 예뻤다. 괜스레 눈물이 날 것 같아 은재는 일부러 더욱 크게 웃음소리를 냈다. 그러면서 속삭였다.

“이거 하나쯤은 네가 가져.”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라 작은 입을 벙긋거리며, 아이는 제 손에 들린 노리개를 바라보았다. 아이의 손바닥 위에서 황금 나비가 반짝… 작은 날갯짓을 보였다.

“너도 좋은 걸 누릴 자격이 있어.”

바꾸어 가진 노리개로 포포의 배를 채우며, 은재가 말했다. 아이는 그를 향해 고맙다는 말 한마디조차 똑바로 뱉질 못했다. 마음껏 은재의 손을 잡지도, 그를 와락 끌어안거나 그에게 매달리지도 못했다. 가만히 입을 다물고 침묵하다가, 고갯짓 한 번 보였을 뿐이었다.

끄덕… 그 작은 동작이 작별 인사가 될 줄은 누구도 몰랐다. 그대로 헤어져 각자의 방식으로 어른이 되어 버릴 줄은, 아이는 비참한 등의 흉터를 황룡포로 덮은 ‘이림범’이 되고, 소년은 이은재라는 이름을 잃고 허무하기 짝이 없는 ‘한솔’이 될 줄은….

***

“아니에요.”

이차혁이 외쳤다. 성마른 음성이 너른 침실을 가득 채웠다. 미궁에 빠진 이성이 그를 더러 더 화내라고, 크게 소리를 지르라고 시켜댔다. 그러지 않고서는 영문 모를 불안감을 몰아낼 수가 없었다.

손을 들어 제 입술을 가리며 이차혁은 머뭇거렸다. 혼란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면서, 그는 하련솔이 들려준 간단한 이야기를 다르게 이해해 보려 노력했다. 제가 놓친 또 다른 일이 있었기를 기대했다. 달리 해석할 여지가 남아있기를 소망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실망과 좌절뿐이었다.

“형.”

불안을 못 이겨 침실 안을 이리저리 맴맴 돌기도 잠시, 이차혁은 하련솔 앞에 무릎 꿇고 앉았다. 쿵 소리가 나도록 주저앉으며 하련솔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형…, 형. 솔이 형. 제발. 제발 우리 형한테, 범이 형한테 아무 말도 하지 말아줘. 일단 이 이야기는 전부 비밀로 해요.”

대뜸 건넨 부탁에 하련솔은 몹시 당황했다. 저는 그들 형제와 지냈던 추억을 즐겁게 늘어놓았을 뿐인데, 전전긍긍하며 불에 덴 사람처럼 반응하는 이차혁이 이상했다.

“어…. 혁아, 그게 무슨 소리야?”

하련솔이 미적지근하니 내놓은 질문에, 이차혁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너른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그는 연신 부탁했다.

“제발…! 제발 그 노리개, 나한테 받은 거라고 말하지 말라고요. 그게 대체 뭐였는지, 왜 우리한테 나눠준 건지, 내가…, 내가 다 알아볼게요. 지금 당장 가서 물어볼게요. 새, 생각보다 별거 아닐 수도 있잖아요? 범이 형한테는…, 다 확인한 다음 알려도 늦지 않으니까….”

황망히 쏟아낸 말은 하련솔에게 더 큰 의문만 안겨줄 따름이었다. 고개를 모로 기울이고서 하련솔은 이차혁을 바라보았다. 정신이 나가고 얼이 빠진 탓에 이차혁은 그가 제 표정을 죄 읽어내리는 줄도,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고 있는 줄도 몰랐다.

“혁아.”

조용조용히 홀로 해낸 고민 끝에, 하련솔은 무척 침착하게 물었다.

“…어디를 가서 누구에게 물어본다는 거야?”

“은진전이요.”

조급한 마음에 이차혁이 즉각 답했다.

“문정궁 바로 곁에요…. 거기에 엄마가 있어요. 회주도 같이 계실 거야. 회주께 물어보면 정확하겠지….”

“‘회주’?”

의문스러운 한편 안쓰러운 동정을 담던 하련솔의 눈빛이 대번에 변했다. 부드럽던 뺨이 굳고 희미하던 미소를 지워버린 채, 하련솔이 소리쳤다.

“회주라니. 그 땡중을 말하는 거야? 그 사람이 거기에 왜…? 대체 무슨 자격으로 와 있단 거야?”

“왜긴요. 폐하가 허락해 주었으니까 그런 거죠….”

어리둥절한 듯 이차혁이 대답했다. 흐트러진 머리칼과 거친 숨결을 정돈할 새 없이 그는 하련솔의 손을, 어깨를, 허리를 끌어안았다. 막무가내로 포옹을 하고 뺨을 문지르는 것밖에, 제 불안을 토로하고 부탁을 긴히 청할 방도를 알지 못해 그리했다.

이차혁의 큰 품에 꽉 안긴 채 하련솔이 기침했다.

“켁, 혁아. 이것 좀 놓고….”

“형. 은재 형…. 제발…. 부탁이에요. 우리끼리 비밀로 해요. 제발…. 엄마가 형한테 좋은 걸 줬을 리 없는데….”

“…….”

“아무리 관대한 폐하라도 이런 일은, 그런 짓은 용서치 않을 거예요.”

그러면서 이차혁은 불안했다. 그는 그 자신을 걱정했고, 제 어머니를 걱정했으며, 제 형제인 이림범을 걱정했다. 제 어머니가 그 노리개에 어떠한 주술이라도 걸었던 게 분명한데, 그런 사실을 이림범이 알았다간 용서치 않을 것이었다. 모든 일의 주범인 전대 무화 하늬안을 용서치 않을 것이고, 그런 그녀의 자식인 이차혁을 용서치 않을 것이고, 더 나아가 이은재에게 제 몫의 저주를 넘겨버린 이림범, 스스로를 용서치 않을 것이다.

이차혁은 두려웠다. 그는 평생 이은재를 그리워하며 미련할 만큼 오래 추모해 온 이림범을 알았다. 만에 하나 이은재의 생을 무덤에 파묻게 한 이가 그 시절의 ‘아이’일까 봐, 그 사실을 안 이림범이 무너져 내릴까 봐, 이차혁은 그게 두려웠다.

“범이 형이 알면 안 돼요….”

교태전 침실의 미닫이문은 매끄럽기가 물과 같았다. 소리 없이 열리는 탓에 방 안에 앉은 이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툭.

바닥을 타고 굴러온 곶감 하나가 하련솔의 손날에 닿았다. 땅콩 가루를 한 아름 얹은, 동그랗고 예쁜 곶감이었다. 달콤한 향기가 대뜸 방 안에 번졌다.

하련솔과 이차혁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그제야 이림범이 보였다. 제 동생과 연인을 만나러 와, 시종을 대신하여 붉은 쟁반을 손에 쥔 황제는 문지방에 주저앉은 모습이었다. 장목한 두 눈이 놀란 짐승처럼 커진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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