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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96화 (96/135)

97.

입을 열기로는 모두 같은데, 누구 하나 무어라 말하는 소리가 없었다. 하련솔의 얼굴에는 옅은 낙담이 어렸고 두 형제의 표정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으로 얼룩졌다.

한참의 침묵 끝에,

“형.”

이차혁이 입을 열었다. 그러나 뒤이어 나오는 말은 없었다. 비명처럼, ‘형’… 그러곤 눈시울만 시뻘겋게 물들일 따름이었다.

이림범의 표정만 보아도 이차혁은 그의 기분을 이해했다. …들었다. 형이 전부 들어 버렸다. 그에게 비밀로 하고자 애원하며 속삭인 자신의 음성마저 전부 듣고, 알아채고야 말았다.

그들 형제는 타고나길 똑똑했다. 셈이 빠른 이는 이차혁이었으나, 눈치가 빠른 이는 이림범이었다. 그는 한 가닥의 야릇한 낌새만 주어져도 사람 속을 거울 보듯 읽어내릴 줄을 알았다.

유년기부터 이차혁은 단 한 번도 제 형제를 속이는 데에 성공한 적 없었다. 개화병에 걸려 한바탕 앓아누운 뒤로는 오히려, 이림범의 두 손바닥 밑에 몸을 숨긴 채 살았다. 범이라는 젊은 황제가 만들어낸 온실은 견고한 한편 불투명했다. 황제의 허가 없이는 작은 쥐새끼 한 마리, 소문 한 가닥조차 함부로 들어설 수 없는 곳이었다. 그게 이림범이 행하는 보호의 방식이었다.

덕분에 이차혁에게 있어 제 어머니는 늘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성격은 예민하지만 기질 자체는 얼렁뚱땅 둔한 데가 있고, 미신에 쉽게 속는 바보 같은 엄마. 이차혁은 그런 하늬안을 피해자라 생각했다. 개화병에 걸린 자신을 아들로 인정해 주지 않는 그녀가 때로 야속해도, 밉진 않았다.

그러나 이림범은 달랐다. 이차혁은 그 사실을 오늘에야 똑바로 깨달았다. 이차혁과 같은 시간을 보내고 같은 이름을 알고 지내는 내내 이림범은 그들 그림자에 묻은 치졸하고 불순한 때를 속속들이 보았다. 그는 하늬안이라는 전대 무화가, 회주라는 스님이 얼마나 지독한 어른인지 뼈저리게 잘 알았다.

무릎 꿇은 자세 그대로 이차혁이 기기 시작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일어설 수 없어, 그는 두 팔로 바닥을 딛으며 제 형제에게 기어갔다. 그리고 이림범의 팔을 와락 붙잡고,

“내가…!”

소리 질렀다.

“…내가, 내가 확인할게! 내가 다 확인하고, 내가…. 형!”

그의 악력에 붙들려 앞뒤로 흔들거리면서도 이림범은 이차혁을 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너른 침실 중앙에 머물렀다. 마른 몸에 창백한 얼굴을 달고서 저를 바라보는, 하련솔에게 꽂혀 있었다.

대답 없는 형을 향해 이차혁이 사죄했다.

“내가 미안해. 내가 사과할게. 대신 사죄할게. 정말 잘못했어…. 엄마가 뭘 모르고…. 엄마가, 그런데, 그런…. 그런 게 아닐 수도 있잖아? 응…?”

그러면서 그는 고개를 푹 떨궜다. 저도 제 말이 지나치게 낙관적임을 알기에 그리했다. 세상 누구보다 하늬안을 좋은 사람으로 기억하는 그조차도, 이림범 앞에서는 무턱대고 그녀를 두둔하기 힘겨웠다.

“엄마가 그런 게 아닐 거야…. 그치? 그럴 리가 없잖아. 우리한테 그냥 선물을 주고 싶었나 보지! 그래, 응…. 한낱 노리개일 뿐이잖아. 그따위 것에 무슨 효능이라도 있었겠어? 나한테, 준 걸 형이 가졌든지 말든지. 형이 받은 걸… 은재 형에게 넘겼든지 말든지, 그따위 것….”

이차혁의 의도와 달리, 그의 말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이림범은 점차 확신했다. 그의 시선 끝에 무화 하련솔이 있었다. 마른 다리를 쭉 뻗은 채 주저앉아, 놀란 듯 저를 보는 하련솔이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그에게 살을 날리고 저주를 날리고 닭 목을 꺾었더라고 했다. 이은재라는 이름으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게 되어 가짜 무덤까지 지었다고도 했다. 그래도 불운이 그를 따라다녔더랬다. 사라지지를 않고 계속 머무르는 불운으로 인해, 그의 삶은 가난하고 박복했다. 아버지의 곁을 떠나 혼자가 되어서는, 유령인간처럼 외롭게 배회하다 종국에 개화병까지 얻은 그였다.

이제 와 보니 모두 이해됐다. 불운이 그를 떠나고자 해도 떠날 새가 있었겠는가. 그가 그 불운을 끌어안고 다녔는데. 선물이라 생각하고 보물이라 여겨, 문정궁에 온 뒤로도 보록 안에 보관할 정도였는데….

긴 침묵 끝에 무얼 결심한 듯 하련솔이 표정을 고쳤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범아.”

그가 어떤 말을 하건 이림범은 듣고 싶지 않았다. 그저 두렵고 또 무서웠다.

그 순간, 이림범이 떠올린 유일한 돌파구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린 날 이은재에게 배웠던 것 그대로, 그는 달아났다. 심장이 터지고 기분이 나아질 때까지 달리고, 또 달리고자 했다.

무턱대고 뛰쳐나간 이림범의 뒤를 이차혁이 쫓았다. 문지방을 밟고 휘청거리며 일어나, 그는 제 형제를 뒤따랐다. 그대로 이림범이 은진전으로 향할까 봐 무서웠다. 제 어머니와 그녀를 조종하는 회주의 죄를 전부 캐내어 엄벌을 놓을까 봐, 그 처벌 끝에 저 또한 매정하게 내쳐질까 봐, 그 모든 일이 이림범을 더욱 크게 상처입힐까 봐 걱정됐다. 걱정되어 속이 불안했다.

“형…!”

교태전의 너른 복도를 지나는 길에 이림범은 호위 실장과 세게 부딪쳤다. 어깨를 떠밀린 웅 실장이 쿵 소리를 내며 벽에 부딪혔다. 저를 지키는 호위 실장을 내팽개치며 황제는 정원을 지나 교태전 밖으로 사라져버렸다.

“폐, 폐하?”

이차혁이 그 뒤를 헐떡거리며 쫓았다. 기둥에 부딪히고, 나무에 어깨를 박아 가며 그는 허둥지둥했다. 그러나 쫓으면 쫓을수록 젊은 황제의 등에 매달린 황룡은 멀어지기만 했다. 가쁜 숨을 헐떡거리며 이차혁은 오만상을 찡그렸다. 돌길 한복판에서 그는 무릎의 통증에 신음했다.

어차피 그로서는 이림범을 따라잡을 방도가 없었다. 그가 아닌 어느, 신체 건강한 사내라도 그럴 것이었다. 인적 드문 길을 통해 사라지는 검은 철릭을 눈으로 좇던 끝에, 이차혁은 달리기를 멈췄다.

“하아….”

터덜터덜, 서너 발짝 관성에 의해 움직이는 이차혁의 팔뚝 옆을 바람이 스쳐 지났다. 장신에 두른 노란 두루마기의 깃이 날리도록 날쌘 바람의 이름은 하련솔이었다. 현세대 가장 극심한 개화병 환자, 팔다리는 말라빠졌고 나약하기가 겨룰 이 없는 무화, 하련솔이었다.

주먹을 꽉 움켜쥐고 하련솔은 죽기 살기로 뛰었다. 쏜살처럼 빠른 이림범의 그림자를 쫓자면 그는 멈춰서도 안 됐고 포기해서도 안 됐다. 심장이 터질 것 같고 토기가 치밀어도 뛰어야 했다. 뛰고, 또 뛰어야만 했다.

처음 보는 전각이 보이고, 낯선 이들이 눈가로 휙휙 지났다. 밝은 태양 빛이 끼친 눈앞은 연신 점멸했다. 혀끝으로 철 맛이 감돌고 옆구리는 바늘이 꽂힌 듯 아팠다. 그래도 하련솔은 멈추지 않았다.

“범… 아!”

헉헉거리며 그는 울었다. 울면서 소리를 바락 질렀다.

“…애기야…!”

그럴수록 이림범은 더욱 멀리, 빠르게 도망쳤다. 무화의 몸으로 젊은 황제를 따라잡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감히 따라올 생각조차 못 하게끔, 이대로 저를 포기하길 바라며 그는 저만이 아는 길로 파고들었다.

상궁도 하인도, 호위도 오가지 않는 가려진 산책길이 있었다. ‘이림범’이라는 이름을 받아 고야읍으로 찾아갔던 날, 불타 사라진 집터와 조그마한 무덤을 확인하고 돌아왔던 날, 그는 이 길을 처음 달렸었다. 속이 터지도록 답답하고 원인 모를 불안이 등을 때릴 때마다, 달리고 또 달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림범의 곁엔 그 자신의 숨소리만이 남았다. 세상 무엇보다 혐오스럽고 끔찍하게 더러운 소리였다.

‘왜…?’

왜 그날, 하늬안이 한 말을 순진하게 믿었을까?

‘왜….’

왜 하필 이은재를 좋아했을까.

마침내 이림범은 문정궁을 완전히 벗어났다. 긴긴 도망을 치고도 만족하지 못해 그는 계속해서 움직였다. 궐의 옆구리에 바짝 붙은, 낮은 높이의 산을 무턱대고 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도주는 힘이 다할 때에서야 겨우 그쳤다.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그는 흙길 위에 넘어졌다. 그리고 일어나지 못했다.

흙바닥과 나뭇잎, 새 우는 소리를 듣기도 잠시, 이림범은 땅에 대고 고개를 세게 처박았다. 둔탁한 소리가 울리도록 바닥에 이마를 찧은 것이었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그는 주먹으로 흙바닥을 퍽퍽 내리쳤다. 얼굴이 온통 뜨거우나 통증 때문은 아니었다. 울컥 터져 나온 울음 때문이었다.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입을 크게 벌린 채 그는 소리 없이 비명을 내질렀다. 궐 안의 누구도 황제의 울음을 눈치채선 안 되기에, 그의 눈물은 훌쩍임 없이 그저 쏟아지기만 했다. 묵묵히 쏟아낸 눈물이 많았다.

정신없이 슬픔을 떨구며 그는 그저 죽고 싶었다. 이 자리에서 제 몸이 불타 잿가루가 되길 바랐다. 원래 없던 존재처럼 사라지고만 싶었다. 그는 결국 회주가 옳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생 악귀가 틀림없었다. 범이라는 이름을 받을 자격이 없는, 그는 귀신이며 못돼먹은 악마 새끼가 맞았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이림범은 열한 살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창고 방에서 얼어 죽기를 바랐다. 제 주제를 알고 좀 더 납작해져서, 굶어 죽고 외로워 죽고 지쳐 죽었어야 했다. 감히 이은재와 어울리고 싶다고 바라선 안 됐다. 그와 말을 섞어서도, 함부로 좋아해서도, 희망찬 기대를 품어서도, 고심 끝에 무얼 주겠다고 나서지도 말아야 했다. 제 손에 주어진 것이라곤 저주와 악담뿐인데, 그 나쁜 것을 보물인 줄 알고 내밀지 않았어야 했다.

비밀기지에서의 추억은 여태껏 이림범의 동력이었다. 지칠 때마다 들여다본, 기억의 서랍 속에 이은재가 있었다. 웃으며 저를 내려다보는 그 소년은 천진난만했다. 제 품 안에 떠넘겨진 노리개가 갖은 힐난이 담긴 물건인 줄도 모르고서, 꾸밈없는 미소가 참 환했다.

‘너는 날… 행복하게 해 주려고 있는 사람 같아.’

아득하게 느껴지는 속삭임을 떠올리며, 이림범은 흙바닥을 기었다.

돌부리에 무릎이 찢어지고 손바닥이 쓸리는 느낌이 들었으나 아무래도 좋았다. 고통은 진작 익숙했다. 그는 누구도 저를 볼 수 없는 산으로 향하고자 했다. 중턱까지 오르면 그, 빌어먹을 절이, 그리고 부적 붙인 창고가 저를 기다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림범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주저앉은 자세 그대로 그는 절을 하듯 상체를 퍽 숙여야 했다. 그의 등에 누군가 덥석 업힌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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