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교태전 앞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그들 앞에 달려온 이는 이차혁이었다. 황제와 무화의 꼬질꼬질한 행색에 놀란 그가, 입을 열자마자 하련솔이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멈추어 달란 수신호였다.
“혁아. 일단 오늘은 돌아가고, 내일….”
그대로 그를 물리려다 하련솔은 멈칫했다. 툭 건드리면 울 것 같은 얼굴로 휘청거리며 선 이차혁을 혼자 두기 미안해서였다. 멋진 황제 이림범이고 일등 무화 이차혁이고 간에, 오늘 그의 눈에 비친 두 형제는 비 맞은 똥강아지들이었다. 오늘은 두 형제 모두 제 방으로 데려가 재워야겠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뜻밖에 이차혁이 먼저 돌아섰다.
“네. 형. 내일…. 내일 다시 이야기해요.”
차마 제 형제의 얼굴을 볼 수 없어, 이차혁은 그의 품에 편안히 들린 하련솔만 괜스레 내려다보았다. 하련솔의 배 위를 덮은 검은 철릭이 마치 구름 같았다. 그 위에 황색 용이 구불구불 똬리를 틀고 있었다. 이차혁은 그 똬리의 틈에 자신이 낄 자리는 없다고 확신했다.
이림범이 흘린 황후 책봉 소식이 아니라, 하련솔이 뱉은 다정한 거절과 사과가 아니라, 미친놈처럼 도망치는 황제를 더 미친 사람처럼 버선발로 쫓는 하련솔을 보았기 때문에, 그는 비로소 제 실연을 받아들였다.
군말 없이 처소로 돌아가는 이차혁의 뒷모습을, 하련솔은 이림범의 어깨에 턱을 괸 채 살폈다. 이내 그의 시선이 호위 실장에게로 향했다.
“웅 실장님?”
얼굴을 제대로 보긴 처음인지라 말꼬리를 올려 호명하자, 김웅진 실장이 자세를 바로 했다. 여태 상상해 온 것보다 더 감자 같은 그의 두상을 구경하며 하련솔이 속삭였다.
“폐하께 남은 일정이 있거든 적당한 핑계를 대서 취소해 주세요. 그리고 오늘은 교태전에서 주무실 겁니다.”
“…….”
말 없는 황제의 뒤통수를 한 번 바라본 뒤, 웅 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하련솔은 시종들을 시켜 저녁 식사를 주문했다. 황제의 몫까지 교태전 침실로 가져다 달라며 메뉴를 하나하나 읊어 놓는, 그를 빤히 바라보는 이림범의 눈빛이 마뜩잖았다. 줄줄이 길어지는 저녁 주문을 참다못해, 그는 초롱에게 직접 말했다.
“그 전에, 의사를 먼저 불러라.”
그제야 하련솔이 ‘아’ 하고는 제 발목을 내려다봤다. 말귀 빠른 시종들이 고개 끄덕이며 얼른 자리를 비웠다.
교태전 침실은 아주 깨끗이 정리된 상태였다. 지나간 소란의 흔적일랑 곶감 하나로도 남아 있질 않았다. 지친 탓에 땀으로 흠뻑 젖은 몸을 침상에 눕히자마자 하련솔은 투정했다. 기껏 내온 다과를 먹지도 못했는데 아까워서 어떡하냐는, 그의 음성은 무척 여상스러웠다.
이림범은 아무런 대꾸 없이 그의 옷을 벗기고 젖은 몸을 닦아 주었다. 더운 물수건으로 문질러 훔쳐낸 팔뚝이며 종아리, 손과 발에 쓸린 자국이 가득했다. 한두 번 넘어져서 생긴 상처가 아니었다.
침묵 끝에 이림범이 입을 열었다.
“…….”
그러나 목소리는 한마디도 내지 못했다. 그가 무어라 할 말을 찾기도 전에 시종들이 의사의 도착을 알렸다. 이마를 찡그린 채 이림범은 벌거벗은 무화에게 침의 상의를 조심조심 입혔다. 하련솔은 그대로 의사를 만나야 했다. 퉁퉁 부어오른 발목이 종아리와 일자를 그릴 지경이라, 함부로 건드리거나 움직이며 바지를 입기조차 불편해서였다. 그나마 상의의 품이 넉넉하고 하단이 무릎까지 덮여 다행이었다.
조심스럽게 들어선 의사 앞에서 황제와 무화는 무의미한 신경전을 짧게 벌였다. 하련솔은 황제의 손에 난 상처를 먼저 봐 달라 청했고, 황제는 하련솔의 발목을 당장 살피라 지시한 것이었다. 그에 의사의 눈동자가 분주히 좌우로 움직였다. 규율대로라면 상전인 황제의 건강을 먼저 살피는 게 맞았다. 그러나 겉보기에 그의 상처는 그리 심해 보이지 않았다. 고심 끝에 의사는 황제의 명령대로 무화를 우선 살폈다.
의사가 제 발목을 치료하는 동안, 하련솔은 이림범의 손을 쥐고 놓아 주지 않았다. 손가락등 가득 번진 피를 물수건으로 닦아주고, 생채기 위에 입바람을 호… 호… 불기 위해서였다. 하련솔이 다정하면 다정할수록 이림범의 표정은 험상궂게 변했다.
의사는 그 모습이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두 남자의 눈빛이 허공에서 연신 부딪히는데, 무화는 다정함을 넘어서 여유롭고 행복해 보이건만 황제는 무척 성질이 난 사람처럼 매섭기만 했다. 교태전에 들어앉은 저 무화가 사실 황제의 약점이라도 쥔 건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였다.
의사는 긴 시간 교태전에 머물렀다. 여유만만한 하련솔의 태도와 달리 그의 발목 상태는 몹시 나빴다. 시종을 시켜 의료원에서 물품을 받아 오게 해, 냉찜질하고 반깁스를 채워야 했다. 이전에도 발목 인대를 다쳤었느냐는 물음에 하련솔은 오토바이 사고가 난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그 말에 어깨를 흠칫거리는 이는 오히려 이림범이었다.
깁스로 인해 뚱뚱해진 무화의 발목을 놓아주며, 의사가 말했다.
“되도록 발목을 높게 올려 두고 주무세요. 의료원에 들르셔서 치료를 더 받으시고…. 짧은 거리를 걷더라도 반드시 시종의 부축을 받거나 목발을 쓰십시오.”
하련솔에 비해 황제의 치료는 순식간에 끝났다. 제 치료를 받는 내내 무화가 황제의 두 손을 깨끗하게 닦아놓고, 연고까지 발라준 덕이었다. 피를 많이 흘린 것치고 그의 손엔 깊은 생채기 하나 없었다. 의사가 해 줄 일은 많지 않았다.
교태전을 떠나면서 의사는 긴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서 그는 무화 하련솔을 감히 동정했다. 황제가 그를 그다지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착각해서였다.
그러나 실상 이림범의 가슴은 불구덩이였다. 그는 제 감정과 온 힘을 다해 싸우고 있었다. 다정한 말씨와 태도로 여상스러운 오후를 꾸리는 하련솔의 곁에서, 그는 도망치고 싶었다. 달아나고 싶고, 외면하고 싶고, 사라져 버리고 싶은 감정을 억누르느라 아래턱에 딱딱해진 근육이 만든 선이 생길 지경이었다.
조금도 평화롭지 못한 황제 앞에 푸짐한 저녁 한 상이 차려졌다. 하련솔이 주문한 식사는 갈비구이와 미역국이었다. 후식으로는 참외를 갈아 만든 셔벗이 나왔다.
“범아. 어서 먹자. 나 너랑 이렇게 식사하고 싶었거든.”
이림범을 맞은편 자리에 억지로 앉혀놓고 하련솔은 기쁜 듯 수저를 들었다. ‘소원’이니 함께 먹어달라고 부탁하기에, 이림범도 애써 수저를 움직였다.
식사 시간 내내 그들 사이에 오가는 목소리는 하련솔의 것뿐이었다. 그래도 그는 즐거워 보였다. 웃는 얼굴로 그는 그 옛날, 고야읍에서 보냈던 어느 가을날을 이야기했다. 계곡물에 젖은 손으로 반쯤 녹여가며 먹던 설탕 과자가 얼마나 맛있었는지에 대해, 비밀기지에 들어온 생쥐 때문에 꺅꺅 비명을 질렀던 날에 대해, 당시 이림범이 얼마나 귀엽고 착한 아이였는지에 대해 말했다.
긴긴 이야기 끝에 하련솔은 제풀에 지쳐 버렸다. 이림범의 손을 잡고 침상에 나란히 눕자마자, 그는 곯아떨어졌다. 느슨해진 하련솔의 손을 제 손 밖으로 조심스럽게 밀어내며, 이림범은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닫힌 문에 새겨진 봉황 무늬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는 홀로 도망칠 수 없었다. 어슴푸레한 저녁 기운 아래 돌아본 하련솔의 얼굴이 곤한 아이 같아서, 그의 눈가에 눈물이 만든 아주 짧은 줄이 있어서였다.
그 흔적을 보고 이림범은 울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겐 더는 울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미처 감추지 못하고 흘린 하련솔의 눈물 한 줄을 바라보면서, 이림범은 그의 곁에 천천히 누웠다. 그러곤 잠든 이의 품에 머리를 가져다 댔다.
교태전에서의 새벽은 유달리 길었다. 긴 밤을 지나는 내내 두 남자는 알 속에 든 올챙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잠을 청했다.
***
밝은 볕 아래 산책로는 무척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바삐 오가는 가을 새를 올려다보며 하련솔은 웃었다. 그때마다 다홍빛으로 물든 나무 잎사귀가 좌우로 몸을 흔들며 작은 휘파람 소리를 냈다.
휙 뒤를 돌아 하련솔은 은진전을 살폈다. 겉을 두른 정원이 어여쁘듯 전각 또한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전대 황제가 총애하던 무화에게 선물하고자 지은 건물이라더니 그 뜻 알 것도 같았다. 아마도 그는 무화 하늬안더러 너를 교태전에 들이진 못해서, 황후로 책봉하진 못하여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나 보다. 그러니 연분홍빛 용기둥이며 벽면에 그려진 꽃나무가 꼭, 작은 교태전 같은 것이었다.
오늘 이 아름다운 전각을 네 사람이 채웠다. 햇살 아래 중년이 되어버린 한 여자와 어른이 되어버린 아들이 함께였다. 젊은 황제는 전각 깊숙이는 발을 들이지 않고 멀찍이 섰다. 반대쪽에는 남 일 보듯 모자를 구경하는 늙은 스님이 하나 보였다. 제 어머니를 붙들고 설득하기 바쁜 이차혁은 슬퍼 보였다. 제 아들을 애써 외면하는 여인은 뒷모습이 여렸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 모자를 바라보는 이림범은 덤덤해 보였다. 처마 그늘에 몸을 감춘 채 뒷짐을 지고 선 노인은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치 약해 보였다.
하련솔은 영화의 한 장면을 바라보듯 그를 훑어보았다. 닳아빠진 승려복을 입은 노인의 곁에 놓인 불상이 무척 익숙했다. 고야읍의 낡은 절간을 어울리지 않게 환히 채우던, 회주가 오래도록 아끼며 숭배해 온 거대한 불상은 오늘까지도 황금빛을 잃지 않았다.
묵직한 불상의 존재감은 이곳을 완벽한 절처럼 보이게 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전각의 안쪽 벽면 한 칸을 붉은 천이 통째로 뒤덮고 있단 것뿐이었다.
단풍나무에 어깨를 기대어 붙이고서 하련솔은 생각했다.
‘날씨가 참 좋다.’
겨드랑이에 낀 목발만 아니었더라면, 어여쁜 저 산 위로 산책을 가도 좋을 뻔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