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이차혁은 남들 눈에 보이는 제 모습을 무척 중시했다. 세상에 날 때부터 그는 예쁘다는 칭찬을 많이 듣고 자랐다. 걸음마를 뗄 무렵부턴 언제나 고상해야 했고 어여뻐야 했고 남부끄럽지 않아야 했다.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하고도 교태전의 주인이 되지 못한 무화, 하늬안의 강박이 내리사랑으로 변모한 결과였다.
개화병에 걸려 이름을 잃고, 어머니의 관심 밖으로 내쳐진 뒤에도 이차혁은 여전히 하늬안의 자식이었다. 어린 무화들과 함께 걸을 때면, 그는 무릎이 칼에 쑤시는 듯 아파도 절뚝이지 않았다. 때로 심란하고 때론 우울하여 물통에 머리를 처박고 싶어도 어여쁜 웃음을 잘도 지었다. 문정궁에서의 긴 시간 동안 그는 어린 날의 영웅을 흉내 내며 지냈다. 이따금은 ‘황제라면 어떻게 했을까’ 미루어 짐작하고,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도 했다.
그러나 보기 좋은 웃음도 여유로운 말씨도 바르고 곧은 자세도 취할 수 없는 때가 이차혁에게 왔다. 등 뒤로는 이림범이, 멀찍이 안뜰 산책로에는 하련솔이 있었다. 그들 모두 이차혁을 그저 동생, 무진 어린아이 취급했다. 그들 곁에서 이차혁은 어른이 아니어도 좋았다. 저에게 비난이나 책임을 돌리기는커녕 어머니와 먼저 대화할 기회를 주고, 차분히 기다리는 형들 곁에서 이차혁은 언제나 막내였다. 순 아이가 되어버린 채 그는 하늬안의 어깨를 붙잡았다.
“나를 좀 똑바로 봐요. 나라고요, 엄마 아들.”
오늘 이림범의 등 뒤에는 호위 실장은커녕 의금부 직원 하나 없었다. 비서는 물론이고 시종까지도 전부 떼어 놓고서 그는 황제가 아닌 이차혁의 형제로서 은진전에 왔다. 어디까지나 저를 위해 베풀어 준 관용임을 이차혁은 알았다. 그렇기에 하늬안의 양 팔뚝을 움켜쥐고, 연신 주무르고 쓰다듬으며 그녀를 설득하고자 애썼다.
그러나 이차혁이 백 마디, 천 마디 말을 뱉어도 하늬안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지 않았다. 누구인지 모르겠으니 어서 돌아가 달란 말만 반복할 따름이었다. 고장 난 앵무새처럼 빳빳하게 구는 어머니를, 이차혁은 빤히 노려보았다. 그리고 이를 갈았다. 전대 무화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날로 연약해지는 어머니를 배려하는 것도 거기까지였다. 종국에는 아들이 아닌 남으로서, 그녀 앞에 덜컥 폭탄 같은 말을 뱉어야 했다.
“그 노리개…. 당신 아들에게 줬던 보물. 난 모르셔도 그건 기억하시겠죠. 엄마, 내가…. …당신 아들이 그걸 남에게 선물했어요. 범이 형이 가졌단 말이에요!”
이차혁의 걱정대로 하늬안은 크게 충격받아 흔들거렸다. 놀란 얼굴 가득 경악이 싹텄다. 두 눈을 크게 뜨고 마른 뺨을 바르르 떨며, 그녀는 들은 말을 이해해보려 노력했다. 그러나 잘 되진 않는 듯했다.
“그게… 무슨 말이니?”
하늬안이 되물었다. 멀찍이서 노승이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마를 찡그리고 이를 악물며 이차혁은 잠시간 숨을 골랐다. 빨리 말을 해 보라며 상대를 독촉하는 이는 이제 하늬안이었다. 그녀는 이차혁의 어깨며 뺨을 손바닥으로 때리며 성마른 독촉을 늘어놓았다.
짝… 살이 맞는 소리 끝에 저벅 발소리가 따라붙었다. 제 등 뒤로 한 발짝 다가온 형제를 향해 이차혁은 손을 들어 보였다. 그러면서 그는 울고 싶었다. 반쯤 정신이 나가 손찌검을 하는 어머니 때문이 아니라, 일이 이렇게 된 와중에도 제 걱정을 하는 이림범 때문에 그는 울먹였다. 울먹이며 말했다.
“엄마….”
하늬안의 손이 이차혁의 어깨에서 미끄러졌다. 이차혁은 그녀의 손을 제 두 손으로 낚아채듯 붙잡아 쥐어 제 입가로 가져갔다. 노랑나비를 잡았다고, 그런데 움직이지 않는다고 속상해 하던 유년기의 그에게 어머니가 그리했듯이, 그는 하늬안의 손바닥 안에 숨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당신 아들이 그걸… 다른 사람에게 선물했어요. 당신이 그랬잖아요. 귀하디귀한 보물이라고.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선물했어요. 그 사람이 범이 형한테… 그걸 줬대요.”
하늬안은 이차혁을 바라보되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눈동자가 멍하니 풀어지고 머리털은 성난 짐승처럼 쭈뼛 섰다.
“이제 말해 봐요.”
이대로 그녀가 정신을 놔 버릴까 봐, 불안한 마음에 이차혁이 재촉했다.
“그게 뭐… 대단한 물건은 아니었던 거죠? 아무 의미 없는, 그저 비싼 장신구였던 거죠. 그렇죠?”
하늬안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입을 벌리긴 하였으나 충격에 그럴 뿐 목소리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돌처럼 굳어버린 그녀의 손에 이차혁은 제 눈물을 묻혔다. 어느새 제 손보다 부쩍 작아진, 어머니의 손을 잡고 그는 한숨 쉬었다.
“아니죠, 그런 거…. 아니라고 말해요. 내가 범이 형을 얼마나 좋아했는데. 엄마가 형한테 어떻게 그래요? 정말 날 위했더라면 어떻게 그런…, 나쁜 짓을 해요.”
하늬안의 침묵은 이차혁에게 말보다 더한 확답을 안겨줬다. 네 예측이 전부 옳다고, 그녀의 텅 빈 눈이 답하고 있었다. 너에겐 축복을 주고 네 형제에겐 저주를 내렸다고, 벌벌 떨리는 손이 대꾸했다.
“엄마.”
이차혁이 고개를 툭 떨구었다.
“우리가 왜 이렇게 됐죠?”
그 소리에 번쩍, 하늬안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고개를 홱 돌렸다. 그녀의 시선 끝에 황제가 있었다. 시커먼 철릭으로 커다란 몸을 휘감은 그는 어느덧 은진전에 자리했다. 가림막을 쳐놓은 벽 앞에 선 그의 주먹에 붉은 천이 한 아름 구겨졌다.
“악!”
하늬안이 비명을 질렀다. 그와 동시에 황제가 팔을 휘둘렀다. 붉은 천이 소리 없이 무너져 내리며 가림막 너머의 얼굴을 드러냈다. 오늘날의 젊은 황제를 몹시도 빼닮은, 짙은 눈썹과 기다란 목선을 지닌 여인의 초상화가 커다랬다.
전대 황후의 초상이었다.
그림 속 황후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하늬안은 발악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를 버럭 지르며 그녀는 바닥에 쓰러지다시피 했다. 맥없이 제자리에 주저앉는 순간 그녀는 빗방울 소리를 들었다.
…뜨거운 노리개 대신 흡입기를 쥐고 산책하듯 걷던 밤이 있었다. 이름 없는 아이가 머무르는 작은 방에서 나와, 하늬안은 비에 젖은 돌탑 앞으로 직진했다. 누군가 제 등 뒤로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서, 황후는 낮은 울타리에 어깨를 기댄 채 헐떡거리기 바빴더랬다.
황후 앞에 쪼그리고 앉아 하늬안은 손바닥을 펼쳤다. 익숙한 호흡기를 발견한 황후의 낯에 가쁜 안도감이 스몄다. 눈썹 끝을 아래로 늘어뜨리며 그녀는 호흡기를 집어 입에 물었다. 그러곤 스테로이드를 깊이 흡입하고, 천식이 가라앉을 때까지 식은땀을 뚝뚝 흘렸다.
하늬안은 제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황제가 선물한, 꽃무늬 손수건으로 축축해진 이마를 닦아주자 황후는 긴 한숨을 내쉬며 인사했다.
‘고맙다, 안아.’
그 무렵에도 황후는 바보처럼 예의를 중시했다. 아들은 악귀에 씌었다고 하고, 교태전으로는 황제가 발걸음을 그친 지 오래건만, 그녀에게는 그래도 벗겨지지 않는 기품이 있었다. 진이 빠진 듯,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그녀와 눈 맞추며 하늬안은 속삭였다.
‘내일 서울로 가신다는 거, 다시 보니 좋은 생각이에요. 저도 언니랑 같이 돌아가야겠어요. 슬슬 몸이 안 좋네요.’
적당히 장단을 맞추고자 뱉은 거짓말이었다. 황후와 달리 하늬안은 축복받은 무화였다. 개화병에 걸리기는 하였으나 그 증세가 무척 미미해, 두어 달쯤 황제를 만나지 않아도 거뜬할 정도였다. 그러나 황후는 그녀의 말을, 여태껏 열 번은 더 넘게 속고도 다시금 믿어주었다. 그러니 걱정 어린 눈으로 하늬안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것이었다. 그 시선을 아무렇잖게 받으며 하늬안은 빙그레 웃음 지었다.
이내 황후가 고개를 푹 떨구었다. 작은 호흡기를 생명줄처럼 움켜쥐고서 그녀는 혼잣말하듯 속삭였다.
‘안아. 우리가 왜 이렇게 됐니.’
…하늬안이 두 눈을 크게 떴다. 바닥에 나자빠진 채 땀에 젖은 그녀에 비해, 초상화 속 황후는 편안해 보였다. 나이를 먹을 수 없기에 그녀는 여전히 젊고 싱그러웠다. 보여주기 위한 거짓 미소 따윈 걸치지 않는 사람이었다. 까만 눈으로 아래를 내리깔아보며 가만히, 그저 고요하게 자리를 지킬 따름이었다.
“언니.”
대뜸, 하늬안이 외쳤다.
“언니…. 언니. 제가….”
황후 앞에서 상대적으로 수다스러운 이는 언제나 하늬안이었다. 처음 문정궁에 입궁한 시절부터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된 뒤에도, 그를 유혹하여 경복궁으로 제 거처만 옮긴 날에도 그녀는 언제나 달변가였다. 언니, 언니… 그렇게 저를 칭하며 격식 없이 구는 하늬안을 황후는 나무라지 않았다.
평생 단 한 번이었다. 단 한 번, 황후가 하늬안을 붙잡아 앉혀 두고 잔소리한 날이 있었다. 하늬안이 수많은 보록과 화려한 옷가지들을 챙겨 경복궁으로 떠나는 날의 일이었다. 그날, 황후는 하늬안에게 황제 폐하를 믿지 말라고 했다. 폐하께서 너에게 주는 사랑은 순애가 아닌 성애라 했다.
하늬안은 그 소리에 코웃음을 쳤다. 언니 언니 하며 따라주었더니 이 여자가 정말 나를 여동생이라 착각하나 보다 싶었다.
그러나 황제의 곁에 붙어 제 아들을 끌어안고 지내는 내내 황후의 잔소리는 그녀의 가슴에 남았다. 개화병에 걸린 아들의 거짓 장례식을 치르고 황제의 품에 무너져 내린 날에도 그녀는 그 말을 곱씹었다. 더 오래, 더 독하게 살아갈 줄 알았던 황후가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고, 매일 밤 저를 찾는 황제의 품 안에서 그녀는 불안했다.
마침내 오늘, 그녀는 황후의 조언을 완전히 이해했고 인정했다. 애초에 황제는 하늬안에게 권력을 줄 생각이 없었다. 당장 그녀의 기분을 달래고 오늘 하루를 행복하게 해주고자 달콤한 말들을 약속처럼 속삭였을 뿐, 무엇 하나 계약서에 새기거나 실천하지 않았다. 황후가 죽은 뒤에도 텅 빈 교태전에 하늬안을 들이진 않은 걸 보면, 은진전이라는 이름을 붙여 교태전의 모조품이나 지어준 걸 보면 뻔한 일이었다.
그 뻔한 사실을 하늬안만 몰랐다. 무지한 채 오래도록 의미 없는 약속을 믿고 살았다.
오늘, 하늬안은 난생처음 전대 황제를 원망했다. 느닷없이 쏟아진 고백과 단서, 지난날의 흔적들이 그녀의 머리 안에 마구잡이로 밀려들었다. 야망이라 믿어온 것은 죄 헛된 욕심이었다. 제 손안에 쥔 사랑을 권력이라 믿고 까분 대가는 참혹했다.
그리고 그 책임을 지울 자리에 황제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