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만일 회주라는 노인이 이림범을 잘 알았더라면, 그 마음을 이해해 보려 한 번이라도 노력했더라면, 그는 이림범을 향해 살려달라고 애원했을 거였다. 이림범은 사람을 죽게 내버려 둘 남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천성이 선하고 순한 그는 좋고 싫음을 떠나 옳고 그름에 따라 행동했을 터였다. 제 유년기를 망쳐 놓은 어른조차 기꺼이 살려내고야 말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하련솔은 달랐다.
하련솔은 이림범을 알았다. 이름 없는 아이를 알듯이, 젊은 황제 이림범을 알았다. 그렇기에 하련솔은 생각했다. 지난날 어린아이를 죽어라 괴롭힌 회주가 아직도 멀쩡히 살아 숨 쉬는 이유는, 어쩌면 이림범이 그들을 적극적으로 무찌르고자 마음먹지 않아서가 아닌가… 하고.
그리고 확신했다. 딱 한 명, 무작정 그의 편이 되어 주는 사람이 있으면 달라질 것이라고. 딱 한 번, 힘주어 등을 떠밀어주기만 하면 될 거라고. 그건 세상 불운을 죄 껴안은 하련솔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었고, 동시에 세상에서 오직 하련솔만이 해줄 수 있는 일이었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끄윽…, 끅….”
제자리에 쪼그려 앉아 제 주먹에 턱을 괸 채, 하련솔은 죽어 가는 이를 구경했다. 아주 어린 날, 절간의 차갑고 축축한 창고에 숨어들던 시절부터 그는 쭉 이 순간을 꿈꿨다. 별명으로만 그렇게 불리는 게 아니라 진짜 영웅이 되어, 아이를 괴롭히는 어른을 무찔러 없애주고팠다. 악당이 사라진 뒤 행복해진 아이의 모습을 상상했고, 소망했었다.
“내, 내가…. 내가 뭘 해 주면 되겠어?”
고통에 허덕거리며 회주가 말했다. 고통보다 큰 희망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머리는 다치지 않았는데, 그 사실이 그를 더욱 괴롭게 했다. 어깨와 허리, 골반이 서서히 으깨지는 고통을 고스란히 느끼면서도 그는 기절하지 않았다. 얼굴로 피가 쏠리고 손발이 마비되는 와중에도 이성은 또렷하게 깨어 있었다. 그는 이 고통이 쉽게 그치지 않으리라 직감했고, 탈출을 원했다.
그래서 소리쳤다.
“노리개!”
번뜩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하늬안의 자식이 울고불고하며 외치지 않았던가, 노리개를 남에게 줘 버렸다고…. 만일 그것을 이림범에게 직접 주었더라면 ‘남’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았을 터였다.
다른 한편으로, 노승은 제 손으로 만들어낸 역작 중 다른 하나가 누구에게 흘러갔는지를 내내 궁금해 해 왔다. 그리고 그 해답을 이제야 찾았다. 아무래도 두 노리개 모두 제 눈앞에 선 이의 손을 거친 듯했다. 그만큼 인연이 깊으니 세상천지 외톨이인 이림범이 이자를 이곳까지 데려온 게 아니겠는가. 수십수백 대를 때리고 갈구어도 죽질 않은 그놈이 기어코 사내로 자라, 같은 사내를 품었나 보다. 받은 정이 없으니 주는 법도 모를, 등신 머저리 같은 자식…. 그런 자식이 남을 좋아하게 되었다면 그 애정엔 필시 큰 이유가 있을 터였다.
대번에 추리를 마치고서 회주는 절박한 목소리를 냈다.
“저, 저주… 풀고 싶지 않아? 응? 얼마나 많이 다쳤니. 또 얼마나 잃어버렸어. 부모, 이름, 돈, 명성…. 다 잃었겠지. 다 잃었을 거야.”
그에 하련솔이 앉은 자세를 고쳤다. 부처의 무게에 짓눌린 탓에, 노인은 상대의 발만을 볼 수 있었다. 땅 위에서 주춤거리는 두 발을 살피면서 그는 숨을 씩씩거렸다. 그러면서 제 추측이 옳다고 확신했다. 지금도 하련솔은 한쪽 발에 깁스를 차고 있었으므로.
“다 도, 돌려받고 싶지 않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유혹하듯 건넨 질문이었다. 그 앞에서 하련솔은 말이 없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에 도가 튼 노인은 침묵을 기회로 알았다. 흙알갱이가 붙은 입술을 혀로 축이며, 그는 부랴부랴 이어 말했다.
“내가 해 줄 수, 있다. 사람…, 사람을 좀 불러 줘. 번호를 알려 줄 테니 전화 한 통만, 한 통만 해주면…. 그럼 내가 그 노리개를 없애 주마. 그리고 그보다… 더, 훨씬 더 좋은 걸 주마. 어때.”
느닷없이 건네 온 황당한 제안 앞에서 하련솔은 침착했다. 차분한 태도로 그는 곰곰이 생각했는데, 들은 말이 매력적이어서는 아니었다. 다만 나중에 가서라도 스스로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는 들은 말을 속으로 여러 번 복기했고, 제 경험을 토대로 고민했다.
음… 침음성을 내는 하련솔을 향해 회주는 재차 손을 뻗었다. 점차 손가락의 감각이 마비되어 갔다. 부처가 자아낸 그늘 밖으로 벗어나기가 무척 힘겨웠다. 가진 힘을 모조리 쥐어 짜낸 손을 앞으로 길게 뻗으며,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조급하게 소리쳤다.
“뭘 고민하는 게야…! 그대로 평생 살 순 없을 텐데…!”
그러자 하련솔이 웃었다. 바람 새는 듯 가벼운 웃음소리를 픽 흘리며 그는 미뤄 온 결정을 마쳤다.
“아뇨, 됐어요. 난 그냥 이대로 평생 살래요.”
그리고 앉았던 몸을 곧게 일으켰다. 옆구리에 목발을 끼고 홀로 일어나자마자 할 일이 많았다. 우선 파란빛을 띤 타인의 손을 불상 아래로 밀어 넣었다. 신발 밑창으로 주변의 흙바닥을 슥슥 문질러 닦기도 했다. 노승이 살고자 손을 뻗으며 그려놓은 자국을 전부 지운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하련솔은 두 손을 모아쥐고 엎드린 부처를 향해 인사했다.
“더 같이 있어 드리고 싶지만… 안 되겠어요.”
그 인사를 저에게 하는 소리로 오해한 듯, 노인이 울음소리를 흘렸다. 그러나 그가 내는 어떤 소리도 하련솔을 흔들지 못했다. 하련솔 앞에서 노인은 대단하신 가피 스님도, 회주도 아닌 아무개 악당에 불과했다.
“범이가 날 찾아올 거라서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뒤 하련솔은 돌아섰다. 어둡고 껌껌한 불상에 짓눌려, 홀로 쓸쓸하게 죽어 가는 악당을 내버려 둔 채 그는 빠르게 걸었다. 다친 발목이 아프고 어깨가 뻐근해도 멈춰선 안 됐다. 무리에서 제가 떨어진 걸 알아차린다면, 이림범이 곧바로 돌아올 거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련솔의 마음은 덤덤하니 평화로우나, 몸은 그러지 못했다. 죄책감은 없으나 충격은 남은 탓이었다. 목발을 쥔 손이 떨리는가 싶더니 이내 두 팔이 다 후들거렸다. 깁스를 찬 발을 질질 끌며 걷다가, 그는 결국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헉….”
헛구역질을 연거푸 하며 하련솔은 가까운 벤치로 방향을 틀었다. 절뚝절뚝, 형편없는 몸짓으로 낑낑대며 애를 쓴 끝에 가까스로 벤치에 주저앉을 수 있었다.
“하아…, 하아…. 콜록!”
아픈 몸을 억지로 움직였기로서니 심장이 터질 듯 뛰고 숨이 막혔다. 빨개진 얼굴을 추켜들고 헉헉거리며 하련솔은 숨을 골랐다.
그러고 보니 근방의 풍경이 눈에 익숙했다. 동그라미를 그리듯 위치한 벤치며 그늘을 자아내는 정자, 조그만 연못과 예쁘장한 돌 장식을 하련솔은 차례차례 알아보았다. 지나간 달, 황제 폐하를 배웅하자며 초롱이 저를 끌고 나와 앉혔던 바로 그 길목의 그 자리였다. 그날 이림범은 하련솔을 못 알아보고 지나쳤었다. 그 바람에 어찌나 상심했던지, 벤치 위를 어루만지는 손에 지난날 두고 온 서운한 감정이 다 스몄다.
“하하….”
작게 웃으며 하련솔은 고개를 푹 떨궜다.
그래도 가슴이 후련했다. 꿈에서라도 하련솔은 회주라는 남자의 손을 잡지 않을 것이었다. 그 손을 외면한 일을 평생 단 한 번도, 죽는 날까지 후회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 손은 어린아이의 등허리에 피로 길을 그린 손이었고, 추위에 떠는 애기의 입에 소금과 팥알을 처넣던 손이었고, 기어코 그의 인생을 진탕에 처박으려 수작질을 부려댄, 추악한 남자의 손이었다.
“형!”
그리고 외침이 들렸다. 멀찍이서 커다랗게 들려오는 소리에 하련솔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목발을 바로 세우고, 앉았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지쳐 힘이 다 풀려 버린 몸으로 한 발짝 걷기가 무섭게, 먼 길을 돌아온 황제가 그를 알아보았다.
“형! 솔이 형….”
두 팔 가득 들고 뛰던 하늬안을 누구에게 넘겼는지, 황제는 벌써 빈손이 된 채였다. 하련솔을 향해 그는 빠른 속도로 성큼성큼 달려왔다. 그러다가도 몇 발짝을 남겨 두곤 걸음을 멈췄다.
차마 더 다가오질 못해, 면목 없이 쭈뼛거리는 그는 덩치는 산 만큼 크고 얼굴은 무섭도록 잘생긴, 애기였다.
“미안해.”
이림범이 속삭이듯 말했다. 바보처럼 순한 얼굴로 슬픈 듯 멈추어 선 그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하련솔은 고개를 추켜들어야 했다.
“괜찮아. 내가 못 따라간 건데, 뭐.”
하련솔이 재빨리 대답했고,
“…그거 말고.”
이림범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두 다… 나 때문이었잖아. 형이 다쳤던 것, 아팠던 일, 전부 다 나 때문이었잖아. 미안해…. 내가 형한테 그 노리개를 주지 않았더라면….”
이를 악물고서 이림범은 사죄했다. 밤새도록 속 끓인 끝에 어렵사리 뱉은 말이었다. 그러나 하련솔은 그의 시무룩한 모습일랑 보고 싶지 않았다. 쓸모도 없고 필요도 없는 사과 따위 원치 않았다.
“좋아해서 그런 거잖아.”
그래서 말했다.
“좋은 약이래서…, 부적이래서 나한테 준 거였잖아.”
흙이 파이도록 목발을 딛어가며 한 발, 하련솔은 앞으로 나아갔다. 그가 보인 작은 동작에 파동이라도 생긴 듯, 이림범의 너른 어깨가 크게 흠칫거렸다.
“그러니까 나한테 그건 좋은 선물이었어. 괜찮은 약이었고, 멋진 부적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