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하련솔은 정직한 사람이었다. 평생 그는 거짓말 따윈 하지 않았다. 때로 남에게 속고 제 것을 도둑맞기도 하고, 이따금 속이 쓰리더라도 바르게 살고자 힘냈다. 그리고 그 사실에 자부심을 느껴 왔다. 그런 그에게 있어 조금 전, 산 사람을 두고 뱉은 ‘이미 죽었다’는 사망 선고는 난생처음 한 거짓말이었다.
하련솔은 그 거짓말을 제 일생의 마지막 거짓말로 남기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사실을 말했다.
“저주고 나발이고 난 그런 거 안 믿어. 노리개는 노리개고, 너는 너고, 나는 나야.”
이림범을 위해, 동시에 저 자신을 위해 그는 선언했다.
“난 나대로 내 인생을 산 것뿐이야. 너는 너대로 네 인생을 살아온 거고. 네가 나에게 준 노리개는, 기분 좋은 선물. 그걸로도 의미는 충분해.”
그러면서 하련솔은 제 몸에 번진 개화병에 대해 생각했다. 처음 발병한 밤, 수많은 감각이 빗발치던 순간을 그는 날카로울 만치 또렷하게 기억했다. 귓바퀴까지 흠뻑 적신 빗물에서 풍기던 진흙 냄새, 깜깜해진 시야가 안겨주던 절망의 무게, 세상 누구도 봐주질 않는 자신이 그 누구를 볼 수조차 없게 되었다는 허무감, 그리고 여생에 대한 단념에 이르기까지. 그날의 불쾌감은 하련솔이 맛본 어느 불행보다 지독했다.
그리고 그 시각, 이림범은 황제가 되어 즉위식에 자리했다.
‘만일 내가 아니었더라면, 그날 범이가 나처럼 무너졌을까?’
그건 참 끔찍한 가정이었다. 하련솔은 그런 것은 싫었다. 내가 너의 무얼 대신했을까, 네가 나의 무얼 앗아갔을까. 규정할 수 없는 것들을 입맛대로 재단하여 판단하고 싶지 않았다. 기울인 노력 없이 보상을 바라고, 한 번도 제 것이 아니었던 재물을 아쉬워하는 일은 싫었다.
“난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살았어. 앞으로도 그럴 거야.”
그의 눈앞에서 이림범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그는 고통스러운 듯 미간을 찡그리다가도 슬픈 듯 눈썹 끝을 내리며 울상 지었고, 복잡한 감정을 곱씹느라 제 아랫입술을 짓씹다가도 턱선이 뚜렷해지도록 이를 악물었다. 변하지 않는 건 오직 검은 눈동자에 스민 애정뿐이었다. 미안함, 죄책감, 고마움보다 큰 애정이 그의 두 눈 안에서 끓고 있었다.
하련솔은 그런 눈은 처음 보았다. 유령인간 한솔로서의 시간은 물론이며 아주 어린 날의 기억을 통틀어, 그토록 강렬한 감정으로 절 보는 이는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건 너야…, 범아.”
그래서 그렇게 말해 주었다.
가을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에 덮이도록 아주 작은 속삭임이었다. 그러나 이림범의 귀를 타고 들어가 그의 가슴을 녹여 놓기엔 충분했다. 하련솔이 보인 조그만 다정에 이림범의 방패가 죄 허물어졌다. 성난 듯 이를 악물고 불쾌한 척 미간을 찡그리며 애써 가려온 감정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형.”
“응, 범아.”
“…….”
주먹을 움켜쥐고서 이림범은 두 눈을 꽉 감았다. 잘생긴 입술 끝이 아래로 쭉 내려가고 턱 중앙에 호두 무늬 뼈가 두드러졌다. 훤한 풍채에 매달린 조각 같은 얼굴이 단번에 울상이 됐다. 주먹에 세게 맞은 호빵처럼 구겨지고야 말았다.
이내 눈물이 꽉 감긴 눈꺼풀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힘이 들어가 도드라진 아래턱이 울렁울렁 떨렸다. 볼썽사납게 울면서 이림범이 말했다.
“내가 싫어지지 않았어?”
그 모습에 하련솔은 웃어버리고야 말았다. 심각하게 서러운 황제의 모습이 너무나 귀여웠다. 눈썹이 구겨지도록 웃음을 터뜨리며, 하련솔이 대답했다.
“응. 싫지 않아.”
쏟아지는 눈물에 시야가 흐린 나머지 이림범은 상대가 웃는 줄도 몰랐다. 커다란 주먹으로 제 눈가를 비비적거리며 그는 울먹였다. 그리고 연신 물었다.
“여전히 날 좋아해?”
순박하기 짝이 없는 질문에 하련솔의 숨소리가 크게 떨렸다. 문짝으로 써도 될 만큼 커다란 덩치에 황룡포를 두른 주제에, 볼썽사납게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이림범이 너무 웃겼다. 너무 웃겨서 눈물이 고일 정도였다.
“응. 너를 좋아해.”
이가 보이도록 하하 웃으며 하련솔이 말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그래도 널 사랑해.”
어리숙한 질문 뒤에 확답이 마침표처럼 따라붙었다.
“사랑해, 범아.”
하련솔이 고백했다.
이림범의 깜찍한 울음이 뚝 그쳤다. 주먹으로 눈가를 닦아 내던 자세 그대로 그는 멈춰버렸다. 손날까지 눈물에 흠뻑 젖고 턱 중앙이 발긋해진 채, 코끝으로 훌쩍… 소리를 낸 게 전부였다. 그 밖에는 아무런 반응도 보여 주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고요해진 황제를 향해 목을 쭉 뻗으며, 하련솔이 물었다.
“대답 안 해 줄 거야?”
큰 주먹이 만들어낸 큰 그림자 아래로 이림범의 입술이 보였다.
“애기야?”
그렇게 호명하자, 붉은 입술 끝이 씰룩 움직였다.
새는 듯한 웃음소리를 섞어 하련솔이 재차 말했다.
“애기야. 우리 놀러 갈까?”
“…….”
“응? 둘이서 그냥 도망쳐 버릴까? 네가 전에 그랬었잖아. 궁 밖으로 같이 도망가자고. 황제고 무화고 다 버리고 나가서 살자며.”
“…….”
“그게 싫으면, 음…. 기린관에서 영화나 볼까? 아니면 예전처럼, 개구멍에 가서 간식 먹을까?”
“…….”
‘사랑해’ 세 글자에 돌이 되어버린 이를 움직여 보려 하련솔은 수다스러워졌다. 끙 신음하고 음 침음하며 그는 젊은 황제가 좋아할 만한 제안을 연신 꺼냈다. 그래도 이림범은 말이 없었다. 오히려 고개를 더욱 숙이며 제 팔뚝에 얼굴을 푹 파묻어 버렸다.
멀쩡하던 황제를 고장 내 놓고 하련솔은 즐거웠다.
“그것도 싫으면 나랑 산책 갈까?”
“…….”
첫 만남에 그랬듯이 말끝을 올려 묻자, 이림범이 커다란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 순간 하련솔은 정답을 알아차렸다. 산책도 물놀이도, 만화책과 텔레비전도 거부하던 아이를 움직인 마법의 문장이 문득 떠오른 것이었다.
“아니면, 범아. 그냥 안아 줄까?”
그러자 이림범이 푹 숙였던 머리를 천천히 들었다. 눈물에 젖어 반질반질하고 홍조에 물들어 새빨간 얼굴로, 그는 고개를 끄덕끄덕 끄덕였다.
목발에 몸을 기대느라 하련솔은 한쪽 팔만을 들어 옆으로 뻗어 보였다. 그러자 이림범이 말없이 바닥을 노려보는가 싶더니 불쑥 몸을 움직였다. 그들 사이의 거리가 단숨에 좁혀지더니 하련솔의 시야가 새카맣게 덮여버렸다. 커다란 차로 들이받는 양 빠르고 거센 포옹이었다.
“으악…! 하하.”
황제의 어깨에 얼굴이 푹 파묻힌 채 하련솔이 웃었다.
그 옛날의 애기를 안아 주는 일은 참 쉬웠는데, 오늘날 이림범을 안기란 하련솔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힘을 내어 팔을 둘러보아도 맥없이 매달리는 모양새만 날 뿐, 상대의 허리를 단단히 받치며 안아 주는 이는 오히려 이림범이었다.
그래도 하련솔은 만족했다. 황제의 너른 품에 안기자마자 긴장으로 굳었던 어깨 근육이 느슨해지고, 발끝에 감돌던 쥐가 사르르 풀렸다. 그와 동시에 지친 몸의 힘 또한 죄 빠져 버렸다. 이림범의 가슴팍에 상체를 내맡기다시피 기대 버리며 하련솔은 두 팔을 축 늘어뜨렸다. 안아 주겠다고 말한 것이 무색하게, 세상에서 가장 성의 없는 포옹이었다.
기진맥진한 하련솔을 아주 꽉 끌어안으며, 이림범은 무화의 마른 팔과 등허리를 연신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목덜미를 부드럽게 움켜쥐고 주무르기도 했다. 집착마저 느껴지는 진득한 손길로 그는 제 손안의 존재가 환상이 아니라는 증거를 찾고 있었다.
“형.”
그렇게 부르면,
“응….”
작은 대답 소리가 그의 현실 감각을 깨워주었다.
붉어진 두 눈을 꾹 감으며 이림범은 눈물을 마저 떨구어 냈다. 솔이라는 이름으로 돌아온, 그의 첫사랑은 여전히 사랑스럽고 또 한 번 어여뻤다. 오늘날 하련솔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그에게 있었다. 제 입으로 그렇게 말하였듯이…. 이제는 그가 하련솔의 빈 곳을 채워줄 차례였다. 인연이 아니고 우연이 아니고 기적이 아니래도 좋았다.
“애기야…. 미안한데 나 좀 업어 줄 수 있어?”
“…그걸 말이라고 해.”
진이 죄 빠져 버린 하련솔을 등에 업고서 이림범은 느리게 걸었다. 흙길 위에는 이제 목발 끌린 자국이 남지 않게 됐다. 두 사람분의 발자국을 홀로 남기며 이림범은 숨을 죽였다. 그러면 음, 으음… 가사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는 아주 작은 콧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변성기가 지나고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 소리만큼은 어릴 때와 똑같았다. 스물아홉 살 하련솔이 아니라 열세 살 이은재를 업고 걷는 기분이었다.
어른들은 분명 아이들에게 많은 흔적을 남겼다. 몇몇 흔적들은 흉터가 되어 이림범의 영혼을 깎아내렸다. 반면 어떠한 흔적들은 뼈에 붙은 근육이 되어 하련솔을 평생 곧게 서게 했다. 지나간 세대의 자국일랑 거기까지였다.
오늘날의 황제 이림범도, 무화 하련솔도 그때는 그저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에겐 과거에 얽매일 의무가 없다. 제 잘못이 아닌 일로 사과할 필요도 없고, 제 자랑이 아닌 일로 남에게 따질 자격도 없다. 그 옛날 이름 없던 아이는 피가 나도록 맞은 날에도 그저 어른의 마음에 들고만 싶어 했다. 그 시절 이은재는 폭설처럼 쏟아지는 부모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도 그것들을 당연시했다. 원망도 감사함도 그들 몫은 아니었다. 아이들은 그저 아이들일 뿐이었으므로.
등허리에 새겨진 흉터를 연인을 업어 가리고서 황제는 궁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