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긴 하품과 함께 하련솔은 2층 테라스로 나섰다. 맨발바닥에 닿는 푸른 타일의 감촉이 차가웠다. 잠을 깨우는 서늘한 감각을 즐기며 하련솔은 테라스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녹음을 울타리 삼은 정원이 한눈에 들어오는 가운데, 키 큰 사내가 서 있었다. 검은 청바지에 기다란 목을 반쯤 감추는 폴라넥 스웨터 차림의 그는 대학생 신분의 모델처럼 보였다. 딱 그만큼 훤칠한 몸매에 인상적인 얼굴을 단 남자였다. 저토록 잘생기고 젊은 청년이 한 나라의 황제라니 새삼스럽게 희한했다.
제 정수리를 내려다보는 시선을 모르고서 젊은 황제는 물 호스를 쥔 채였다. 이리저리 나무뿌리와 꽃의 잎을 적시는 모습에서 여유가 풍겼다. 그와 함께 정원을 채운 작은 개 한 마리가 있어, 주말 아침 풍경에 평화를 더했다. 누룽지 색 꼬리를 휘휘 흔들며, 조그만 개는 이리 팔짝 저리 폴짝 뛰며 물줄기를 쫓기 바빴다.
그 모습을 구경하기도 잠시, 하련솔은 제 바지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를 감싼 노란 파자마 하의에는 주머니가 없었다. 허공에 대고 손을 머뭇거리기도 잠시, 하련솔은 테라스가 딸린 방 안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휴대폰을 찾아 들었다. 아직 손에 익질 않아 낯설기 짝이 없는 물건이 몹시 가벼웠다.
조그맣게 접혀 있는 액정을 펼쳐 여는 하련솔의 태도는 매우 조심스러웠다. 연락처에 저장된 번호는 딱 셋뿐이었다. 그중 하나에 전화를 걸면서 그는 재차 테라스로 걸어 나갔다. 귓가로 수신호가 두 번째 울리자마자, ‘여보세요’ 하는 친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초롱아. 나야.”
그러자 휴대폰 너머가 소란스러워졌다. 초롱이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낸 탓이었다. 간밤엔 잘 주무셨느냐, 아침 식사는 했느냐, 침구에는 적응이 되셨느냐, 몸 상태는 혹시 어떠시냐며 건넨 질문이 많았다. 고작해야 10시간 떨어졌을 뿐이건만 벌써 걱정이 탑을 쌓은 채였다.
정 많고 말 많은 시종의 음성을 귀에 담으며, 하련솔이 흐흐 웃었다.
“응. 나 잘 잤어. 밥은 아직인데… 어디서 맛있는 냄새 나. 좀 이따 먹을 건가 봐. 방도 되게 좋아. 열도 안 나고 건강해.”
그러자 초롱이 크게 한숨 쉬었다.
-물론 그러시겠죠. 폐하와 함께 계시는데 아플 새가 있겠어요?
시종이 한탄하듯 건넨 말끝에 하련솔의 웃음소리가 따라붙었다.
이곳 펜션으로 대뜸 여행을 나선 게 어젯밤의 일이었다. 저녁까지만 하더라도 하련솔은 이번 여행의 계획을 조금도 몰랐다. 여행을 가게 되리라는 사실조차도 몰랐다. 배부른 식사를 마치고 그는 교태전의 침실에 누웠더랬다. 팩을 하자며 초롱이 내온 오이 조각을 반은 먹고 반은 이마에 붙인 채, 시종들과 나란히 누워 드라마를 보는 여유를 부리기도 했다. ‘이리 오너라’ 하는 커다란 외침이 들린 게 그때였다. 화자는 물론 황제, 이림범이었다.
큰소리를 지르며 그는 교태전으로 소란스럽게 달려왔다. 제발 체통을 지키시라며 잔소리하는 비서와 시종들을 비엔나소시지처럼 뒤에 단 상태였다. 무작정 들이닥친 황제 앞에서 당황하지 않은 이는 하련솔뿐이었다. 그는 황제가 외친 ‘이리 오너라’ 뒤에 벌어질 일을 짐작할 수 있었다. 늘 그렇듯 제가 그리 가기로 전에 그가 먼저 들이닥쳐서는, 준비한 몫의 포옹이건 입맞춤이건 고백이건 멋대로 퍼부을 터였다. 그리고 어제, 이림범이 준비한 일은 납치였다.
황제에게 납치를 당하면서도 하련솔은 두 눈만 끔벅거릴 따름이었다. 늘어난 발목 인대가 영 나을 기미를 보이질 않는 탓에 깁스를 찬지라, 반항은 시도할 가치조차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무기력한 태도로 하련솔은 이림범의 팔에 들려 문정궁 외곽 주차장으로 옮겨졌다.
밀린 업무를 마치고 연말까지의 행사 기획서를 전부 확인하고, 급한 회의를 화상 채팅으로 마친 이림범은 몹시 열렬했다. 백색 세단의 조수석에 앉혀진 하련솔의 몸에 안전벨트를 채워주면서 그는 가까스로 만들어 낸 제 휴가는 길어봐야 2박 3일이라 했다. 하련솔의 등을 기댄 좌석을 뒤로 편안하게 기대어 주면서는, 그 여행을 3박으로 만들 것이라고 했다.
황제의 야심 찬 계획에 따라, 하련솔은 야심한 시각에 이곳 펜션으로 옮겨졌다. 문정궁을 벗어나며 휙휙 지나는 차창의 배경이 낯설고도 신기해 구경하기도 잠시였다. 하련솔은 저질 체력의 소유자였고, 이림범의 운전 솜씨는 무척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련솔은 잠들어 버렸다.
눈을 떴을 땐 이미 아침이었고, 이곳 펜션의 2층 침대 위였다. 입고 있던 침의는 어딜 갔는지, 병아리처럼 노란 파자마로 갈아 입혀진 상태였다. 머리맡에는 아침부터 부지런한 이림범 대신 낯선 휴대폰 하나가 ‘선물’이라 쓰인 포스트잇을 달고 있었다.
새로운 기기를 어색하게 귀에 붙이며 하련솔은 허허 웃었다. 주인 잃은 교태전에서 발 구르고 있을 초롱의 모습이 상상됐다.
“초롱아. 여기도 너 닮은 애 하나 있어. 펜션에서 키우는 개인가 본데… 초롱이 너랑 똑같아.”
문제의 강아지는 신이 난 듯 헥헥거리며 젖은 잔디에 등을 문질러댔다. 네 발을 높이 들고 좌로, 우로, 다시 좌로 움직이는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짤막한 전신이 죄 누렇고 덥수룩한 털로 덮였는데, 발과 콧잔등만 하얀색이었다. 벌떡 일어나 꽃밭으로 뛰어드는 모습을 보아하니 그 흰 털마저 곧 누렇게 변하지 싶었다.
“다른 애들은 뭐 하고 있어? 바꿔줘 봐.”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개를 구경하며 하련솔은 교태전의 시종들 모두와 인사를 나누었다. 마지막으로 목소리를 들려준 이는 윤슬찬이었는데, 뜻밖에 그의 음성에서 그리운 티가 뚝뚝 묻어났다. 언제 돌아오시냐고 묻는 말에 하련솔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빨리 오시는 거죠? 내일 와요, 모레 와요?
저를 찾는 간절한 목소리에 당황하기도 잠시, 하련솔은 실소했다.
“아마 주말까진 여기 있을 거 같은데?”
- 아….
“맡은 일 잘하고, 애들이랑 잘 지내고 있어. 괜히 보리랑 싸우지 말고.”
- 안 싸워요.
잔소리를 늘어놓은 뒤에야 윤슬찬의 음성이 본래의 부루퉁한 기색을 되찾았다.
요즘은 보리도 기세가 등등해졌다. 초롱의 야무진 성격을 옮아오기라도 한 듯, 보리는 서운한 일이 생각나면 1, 2분간 곱씹는 데에 그치지 않고 말로 표현하기에 이르렀다. 문제는 그 서운한 상대가 백이면 백 윤슬찬이라는 데에 있었다. 반년 전 일을 두고 서운하다며 사과를 요구한 보리를 두고, 윤슬찬은 ‘이미 지나간 일을 왜 이제 말하냐’고 대꾸했다. 그 바람에 두 시종이 한바탕 말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두 시종을 응접실에 불러다 약과를 먹이며 화해시키기란 하련솔의 몫이었다.
“진짜지? 그럼 지금 나한테 맹세해,”
서로 간에 앙금을 푸는 모습을 확인하긴 하였지만, 마음이 쓰이는 건 별수 없었다. 저 없는 교태전에서 두 시종이 또 무슨 다툼을 벌일지 그저 물가에 내놓은 애들 같았다.
구시렁구시렁, 윤슬찬의 한탄을 듣기도 잠시였다. 초롱이 휴대폰을 돌려받은 듯, 종알종알 새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오전부터 교태전을 오간 무화 손님들이 있었다, 몇 명이고 이름은 무어고, 또 누구는 무얼 가져왔는데… 이래저래 길어지는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하련솔은 테라스 난간에 상체를 푹 기댔다. 멍하니 내려다본 정원 바깥으로 갈대밭과 호수가 환했다.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수평선을 쳐다보기도 잠시, 하련솔의 몸이 붕 뜨다시피 하며 뒤로 번쩍 당겨졌다.
“어!”
놀라 뱉은 소리 뒤에,
“조심해.”
묵직한 음성이 따라붙었다.
고개를 들고, 하련솔은 이림범의 턱을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정원에 있던 사람인데, 그 등장이 순간이동을 한 것처럼 갑작스럽고 놀라웠다. 당황한 하련솔의 표정을 확인한 이림범의 얼굴에 옅은 낭패가 서렸다.
“미안…. 놀랐어?”
그러면서 그는 하련솔의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놀란 심장이 야단법석을 떨며 내달리고 있었다. 괜찮다는 의미를 담아 하련솔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림범은 보다 부드럽고 조심스러워진 손길로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잠잠해진 휴대폰에 대고 짧은 인사를 남긴 뒤, 하련솔은 통화를 종료했다. 그리고 멋쩍게 웃었다.
“잘 잤어, 범아?”
그러자 이림범의 딱딱한 얼굴에 따듯한 미소가 번졌다. 호를 그리며 올라가는 입술을 못 감추며 그가 속삭였다.
“응…. 형도 잘 잤어?”
“그럼. 누구 덕분에 완전히 곯아떨어졌지.”
이림범의 부축을 받으며 하련솔은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깁스를 찬 발은 물론이고 성한 발조차 바닥에 닿을 새가 없어, 사실상 번쩍 들고 옮기는 것에 가까운 부축이었다.
하련솔이 예상한 것과 같이 1층 테이블에는 이미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색색의 나물을 두른 비빔밥은 고운 양념장과 참기름으로 반질반질했고 된장국은 냄새부터가 진해서, 벌써 혀끝에 침이 감돌 지경이었다. 이림범이 당겨 빼 준 의자에 몸을 앉히며 하련솔은 연신 감탄했다.
“이거 다 네가 차린 거야?”
긴가민가하며 건넨 물음에, 이림범이 우뚝 몸을 멈췄다. 조리대에 놓인 접시를 왼손에 든 채였다.
“…….”
입을 꾹 다물고서 그가 내려놓은 마지막 반찬은 달걀말이였다. 터진 옆구리에 눌어붙은 김이 삐죽 나온 데다, 오래 구운 탓에 노란색보다 갈색이 더 많았다. 그마저도 열심히 말다가 포기한 듯, 반은 돌돌 말렸는데 남은 절반은 퍽퍽 찢고 뭉개놓아 스크램블에그 상태였다. 대강 살펴도 다른 모든 요리와는 실력 차이가 확연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