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106화 (106/135)

107.

“그럼 범아, 이 개는 누구야? 덕순이랑 무슨 사이인데?”

웃음기 가득한 질문 끝에, 하련솔은 제 허리와 허벅다리를 붙든 팔이 더욱 강해지는 것을 느꼈다. 품 안의 무화를 단단히 고쳐 안으며 이림범은 느리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냥 보호소에서 데려왔는데…? 형이 귀여워할 거 같아서….”

탐탁잖은 듯 자신 없이 건넨 소리였다. 그에 하련솔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크게 웃었다. 이 이야기의 모든 요소가 마음에 들었다. 저를 위해 덕순이를 찾고자 한 이림범의 발상이 귀여웠고, 노력이 깜찍했다. 결과적으론 아무 개라도 좋으니 가족 잃은 개를 찾아온 것도 사랑스러웠다.

하련솔은 재차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한 차례 사람에게 버려진 누렁이는 여전히 사람이 좋은 모양이었다. 연신 꼬리를 흔들면서 이림범의 발 앞을 요리조리 기웃거리는데, 그 모습이 보기 좋았다. 발이 큰 백구 덕순이가 그랬듯이, 도통 어떤 종이 섞인 건지 그 출처를 알 수 없게 알쏭달쏭한 외모인 것도 만족스러웠다.

하련솔은 이림범의 목을 재차 와락 껴안았다. 그러곤 그의 뺨에 입술을 갖다 붙이다시피 하며 말했다.

“엄청 마음에 들어.”

기쁜 듯한 속삭임에 이림범이 귀를 붉혔다. 하련솔은 개의 이름을 덥석 붙였다.

“이름은 더덕이로 할래.”

“…‘더덕이’? 음…. ‘the 덕순이’라서 더덕이야?”

“그게 뭔 소리야? 그냥 ‘더덕’ 말이야. 얘가 더덕처럼 생겼잖아.”

이내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개에게로 향했다. 누런 털에 흙 알갱이를 묻힌 개가 ‘헥’ 소리 내며 혀를 내밀었다. 그 몰골이 과연 땅에서 막 뽑혀 나온 더덕 같았다. 그제야 이림범이 웃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걸음을 척척 움직였다.

그에게 안겨 정원 뒤편으로 향하면서, 하련솔은 별수 없이 기대감을 품었다. 힌트는 이미 충분히 받았다. 홀로 일방적으로 계획한 여행, 준비를 마쳤다던 말, 큰 고백의 시발점처럼 느껴지는 선물…. 이 뒤에 따라올 일은 응당 프러포즈이지 싶었다.

이내 친근하면서도 낯선 냄새가 하련솔의 코를 찔렀다. 대뜸 돌 냄새, 흙냄새가 진하게 풍겨온 것이었다. 내심 당황하며 하련솔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꽃이나 풍선, 케이크 따위는 없었다. 그의 시야를 가장 먼저 채운 것은 한가득 쌓인 소나무 장작이었다. 벽을 이루도록 높다랗게 쌓인 장작더미 뒤로 이동하자, 줄지어 선 황색 흙가마와 나무 벤치, 갖은 도구가 놓인 작업대가 보였다. 의심의 여지 없이, 도자기를 굽는 작업실이었다.

그리고 그 공간을 채운 모든 것들은 훌륭한 데이트나 프러포즈와는 무척 거리가 멀었다.

“자.”

이림범은 작업장의 테이블 앞, 기다란 벤치 자리에 하련솔을 내려놓았다. 나무 테이블 위에 다 빚어놓은 점토 뭉치가 여러 개 줄지어 놓여 있었다. 하나 같이 입을 쩍 벌린 해태 모양이었다. 멀찍이 놓인 가마에서는 더운 불의 기운이 펄펄 감돌았다. 준비가 다 되었다더니, 도자기 구울 준비를 말한 모양이었다.

그 순간 하련솔의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가 하나 있었다.

‘김칫국.’

한 사발도 아니고 서너 사발, 김칫국을 벌컥벌컥 들이켠 탓에 그는 입 안이 매웠다. 달콤한 떡을 기대한 하련솔 앞에서 이림범은 홀로 진지하고, 또 심각했다. 연인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살필 새도 없이 그는 문정궁에서 챙겨온 상자 두 개를 꺼내었다. 직사각형의 작은 상자를 양손에 쥐고, 뚜껑을 동시에 밀어 올리자 세상 무엇보다 친근한 물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월이 흘러도 새빨간 빛깔을 잃지 않는, 붉은 실 노리개였다.

“뭐야…? 범아.”

하련솔이 물었고,

“이제 우리, 이걸 없애 버릴 거야.”

이림범의 대답에는 굳은 결심이 실려 있었다.

이미 여러 차례 수소문하며 그는 두 노리개를 없앨 방법을 찾아왔다. 하련솔이 괜찮다고 말하여도, 저주 따위 믿지 않는다고 선언하여도 상관없었다. 평생에 딱 한 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는 미신을 믿어 보기로 했다. 제 인생에 행운을 안겨주고 하련솔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주물을 파괴하기 위해서라면 못 할 짓이 없었다.

그렇게 찾아낸 방법은 참 단순하고도 복잡했다. 불길과 함께 시작된 저주일랑 사람의 힘으로는 꺼뜨리기 힘든 법이니, 해태에게 먹여 없애라는 것이었다. 선산에서 구해온 흙을 섞은 산백토로 해태를 빚고, 노리개의 주인이 그들 입에 각각 주물을 넣고 구워 태워버려야 했다. 무척 비과학적이고 얼핏 바보 같은 방법이었지만, 이림범은 그에 따르고자 했다.

긴긴 설명을 마치며 그는 하련솔에게로 상자 하나를 밀어 보냈다. 제 앞으로 쑥 다가온 상자를 하련솔은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선뜻 집어 들었다. 포포의 배 속에 넣어 두고 오랫동안 품고 다닌 물건인데, 오늘부로 태워 없앨 거라니 그 촉감이 낯설게 느껴졌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련솔은 이림범을 살폈다. 잠시간 딴생각에 잠긴 듯, 그는 저 멀리 정원 너머의 길목을 바라보고 있었다.

‘끙’ 소리 내며 하련솔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제 노리개를 손에 움켜쥐고 절뚝거리며 걸었다. 그의 뒤로 이림범이 당황한 숨소리를 내며 따라왔다.

“어디 가, 형. 이거 태워야 한다니까!”

“난 몰라. 할 거면 너 혼자 해.”

“형.”

절뚝절뚝 움직이는 하련솔을 보다 못해, 이림범이 그를 번쩍 안아 들었다. 내려 달라 외치려던 하련솔의 반항은 시작하기도 전에 그쳤다. 짐가방 들듯 저를 집어 든 이림범이, 가마가 놓인 작업장이 아닌 펜션을 향해 움직이기 때문이었다.

“어디로 갈 건데.”

이림범이 말했다. 말끝을 내리며 건넨 질문은 불퉁했으나 아픈 이를 옮겨 주는 몸짓은 다정했다. 한결 마음이 누그러져 하련솔이 속삭였다.

“거실에….”

충동적으로 벌떡 일어나 움직였을 뿐 하련솔에겐 별다른 목적지가 없었다. 그는 당장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조차 몰랐다. 이림범의 옆이 아니면 갈 곳이 없었고, 가고 싶은 곳도 없었다.

하련솔의 말에 따라 이림범은 펜션의 거실로 향했다. 그가 저를 안은 채로 소파에 착석한 덕분에, 하련솔은 소파 위에 가로로 다리를 뻗어놓고 그의 품에 기댄 모양새가 됐다. 입을 꾹 다문 하련솔에게 이림범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가만히 시간을 보내며 그저 기다릴 따름이었다.

잠잠해진 두 남자의 곁으로 더덕이라는 이름을 얻은 개가 쪼르르 다가왔다. 천진난만한 개는 이리저리 집 안 냄새를 맡으며 카펫 위에 발자국을 찍었다. 그러더니 소파 테이블 밑으로 들어가,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두세 바퀴를 돌다가 둥그렇게 몸을 말며 누웠다.

심심한 개가 작은 콧김을 흥 내쉰 뒤에야 하련솔이 입을 열었다.

“노리개 말이야…. 내 것만 태우고, 네 건 남겨 둘 순 없는 거지?”

그에 이림범이 이마를 찡그렸다.

“왜 그래야 하는데?”

즉시 돌아온 질문에 하련솔은 재차 침묵했다. 손안에 쥔 노리개를 노려보기만 할 뿐 그는 제 생각의 이유를 말해 주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이림범은 몹시 눈치가 빠른 남자여서, 상대가 함구한 걱정까지도 순식간에 읽어내렸다.

“형. 내가 이까짓 부적 하나 없다고 망할 황제로 보여?”

“…….”

“그것밖에 안 되는 재목이라면, 그래. 망해야지.”

“…야.”

탐탁잖은 듯 들려오는 말이 거칠어, 하련솔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나 이림범은 당당했다.

“왜. 내 말이 틀려?”

“…….”

또다시 침묵이 닥쳐 왔다. 이림범은 그 침묵이 싫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화가 났다. 모든 비밀이 밝혀지고 저열한 수작질을 알게 된 뒤에도 절 위해주는 하련솔 때문에, 그런 하련솔이 염치없이 좋은 저 자신 때문에 그는 화를 냈다. 성화를 담은 두 팔로 하련솔의 상체를 꽉 끌어안았다.

이림범의 더운 품에 안겨 하련솔은 한참 고심했다. 손안에 쥔 빨간 노리개는 여전히 가볍고, 예쁘고, 정겨웠다. 그는 평생 이 노리개를 값나가는 보물로 여기며 살았다. 아주 힘든 시절에도 이것을 팔아 가난을 해결할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그의 작은 노리개에는 추억이 담겼고 유년기가 담겼다. 이제 와 저주를 건 주물이고 악심이 담긴 부적이라 한들 그 마음까지 희석되진 않았다. 남들이 다 나쁘다고 말하는 제 노리개도 저는 밉지 않은데, 넝쿨째 굴러 들어온 행운과도 같은 노리개를 쥔 이림범은 오죽할까. 그래서 하련솔은 망설였다.

솔직히 말해 그는 남은 평생을 이대로 현상 유지하며 살아가래도 그럴 자신이 있었다. 저를 둘러싼 불행이 달가워서는 아니었다. 딱 그만큼 이림범이 행복했음을 알게 되고 나니, 그 모든 일에 보상이 있었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나니, 전부 다 견딜 만한 일이 된 것이었다. 오늘에서야 그는 다 괜찮다고, 난 괜찮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범이 말이 맞아.’

골몰 끝에 하련솔은 지나간 밤을 떠올렸다. 깊은 못에 빠져 홀로 죽음의 문턱을 밟았던 밤, 공포감보다 더욱 선명하게 남은 얼굴이 있었다. 희미한 의식을 뚫고 낙인처럼 기억될 만큼 강렬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던 이림범이 있었다. 정원 잔디 위에 널브러져 올려다본 그의 얼굴은 마치, 곧 죽을 사람 같았었다.

그러니 하련솔은 더는 불행하면 안 됐다. 재수 없게 아파서도 안 되고, 허무하게 죽어서도 안 됐다. 그가 죽으면, 이림범이 그를 따라 죽어 버릴 테니까.

“그래.”

결국 하련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범아. 그러자…. 이젠 보내 주자. 전부 태워서 없애 버리자.”

판단을 마치기가 무섭게 하련솔의 몸이 번쩍 들렸다. 목발을 좀 달라고, 혼자 걸을 수 있다고 외친 말은 이림범의 귓등을 타고 흘러 지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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