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107화 (107/135)

108.

바로 조금 전 그리했듯이, 하련솔은 작업장 벤치 위에 안전하게 내려졌다. 잠깐 사이 소나기가 내린 모양이었다. 높다란 장작을 덮은 차양 위에 빗방울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소나무 향기는 더욱 진해져 있었다.

하련솔은 구워질 준비를 모두 마친 해태를 바라보았다. 흙으로 빚어놓은 모형 덩어리일 뿐이건만, 그는 해태가 절 마주 본다고 생각했다. 실력 있는 조각사가 동그랗게 파 놓은 눈동자 덕분에 해태는 이지를 지닌 존재처럼 보였다. 그러니 퍼렇게 뜬 눈으로 지각쟁이 인간을 흘겨보면서, 어서 먹을 것을 내놓으란 듯 입을 크게 벌리는 것이었다.

하련솔은 두 눈을 내리감았다. 그리고 해태에게 말을 걸었다. 내 노리개를 잘 부탁한다고, 전부 씹어 삼켜 버리라고, 한 가닥도 남지 않게 태워 버려 달라고 그는 소원했다. 다시금 눈을 뜨자마자, 하련솔은 망설임 없이 노리개를 꾹꾹 접어 구겼다. 그러곤 쩍 벌어진 해태의 입에 제 보물을 집어넣었다. 해태는 그것을 순식간에 먹어 감췄다. 벌린 입 앞에 눈을 대고 들여다보아도 껌껌한 어둠만 보일 뿐, 노리개는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되었다.

“후….”

무어 큰일을 해낸 사람처럼 하련솔이 한숨 쉬었다. 이제 네 차례야… 그렇게 말하려 고개를 들었다가, 그는 당황했다. 제 앞에 있어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그의 몫으로 놓여 있던, 황금 나비 장식이 달린 노리개 또한 보이질 않았다.

“범아?”

벤치에서 몸을 벌떡 일으키며 하련솔은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자 저 멀리, 정원을 가로질러 성큼성큼 걷는 이림범의 뒷모습이 작게 보였다.

황당한 마음에 하련솔이 소리쳤다.

“야! 도망갈 거면 나도 데리고 가!”

깁스를 찬 발을 절뚝절뚝 움직이며, 그는 이림범을 쫓아 발바닥에 잔디 풀물을 묻혔다. 그러곤 얼마 못 가 ‘아야’ 하고 소리쳤다. 발목을 접질리거나 넘어져서는 아니었다. 간밤 내내 황제와 껌딱지처럼 붙어 지낸 덕분에 그의 몸 상태는 최상이었다. 다만 그렇게 소리 지르면 이림범이 절 향해 달려올 것을 알기에 그리했다.

“아야야! 나 아프다!”

하련솔이 빽 지른 외침에 이림범은 훈련 잘된 독수리처럼 곧바로 그에게로 돌아왔다. 복잡한 감정이 실린 얼굴로 그는 달려오더니, 깁스를 찬 연인을 제 어깨에 걸듯이 번쩍 들었다. 하련솔의 두 발이 허공에 즉각 떴다. 그대로 두 남자는 왔던 길을 되돌아 펜션으로 향했다.

다시 거실, 소파 위였다. 10분 전에 그랬듯이 소파 자리 한편을 차지하고 앉아, 이림범은 하련솔을 와락 껴안았다. 그렇게 하면 제 안의 큰 고민이 해결되기라도 한다는 양 확신을 지닌 포옹이었다. 이쯤 되니 하련솔은 이림범에게 있어 자신이 믿음직한 형인지 애착 인형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됐다.

고개 숙여 살펴본 이림범의 주먹에는 붉은 노리개가 잡혀 있었다. 하련솔이 그래왔듯이 이림범도 제 노리개를 애지중지 보관해 왔다. 손날 아래로 날개를 뻗듯 흘러나온 실타래에는 십 년을 훌쩍 넘는 세월 내내 닦아주고, 빗질하고, 아껴준 티가 역력했다.

“이까짓 주물 필요 없다며. 이런 게 있어야 할 황제 같으면 망하는 게 낫다면서?”

하련솔이 중얼중얼 말했다. 농담하듯 흘린 질문에 이림범은 대답하지 않았다. 현관문을 노려보며 입을 다물 따름이었다.

하련솔은 그가 자아낸 침묵이 싫지 않았다. 긴 고민을 짓씹으며 골몰하는 그에게서 사람 향기가 풍겨서 좋았다. 그런 이의 품에 안겨 함께 빗소리를 듣는 일이 좋았다. 그래서 하련솔은 채근하지 않았고 투정하지 않았다.

한참을 차분히 기다린 끝에, 이림범이 낮은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그래. 형 말이 다 맞아….”

“그럼, 그럼. 내 말이 다 맞지.”

메아리 들려주듯 대꾸하며, 하련솔이 이림범의 어깨를 도닥였다. 그러자 이림범이 거세게 포옹한다 싶더니 하련솔을 번쩍 안아 들었다. 허공에 붕 뜬 두 다리를 대롱대롱 흔들면서 하련솔은 ‘흠’ 침음했다. 저도 다 큰 사내이건만, 이리저리 안겨 다니는 데에 익숙해져서 어쩌나 싶었다.

세 번째 돌아간 자리에서야 두 마리 해태가 배를 채웠다. 각각 하나의 노리개를 집어삼킨 해태들은 그대로 가마 속에 들어앉았다. 소나무 장작을 써 불을 붙이고 나니 해태의 주인들은 더는 할 일이 없었다. 이대로 초벌만 세 시간을 굽는데, 그 뒤엔 일을 맡은 직원이 알아서 유약을 발라주고 재벌까지 해낼 것이었다. 재벌 후에도 아홉 시간은 더 식혀야 하니, 이림범과 하련솔에게 남은 일과라고는 펜션으로 돌아가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소파 자리에 돌아와 그들은 가만히 침묵했다. 오래 쥐고 다니던 물건을 잃은 손이 못내 허전했다. 후련함 반, 아쉬움 반을 곱씹던 끝에 하련솔이 물었다.

“좀 전엔 뭘 그렇게 고민한 거야?”

머리를 굴려 추측해 보아도, 이림범을 마지막까지 갈등하게 한 미련이 무언지 알 수 없어 건넨 질문이었다. 노리개에 담긴 축복일랑 필요치 않다고, 행운에 의존하느니 차라리 망하겠다는 말까지 가감 없이 뱉던 그였다. 그런 사람이 가마 앞에서 도망치듯 발길을 돌린 이유가 궁금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림범은 뜻밖의 대답을 들려주었다.

“내가 그걸… 혁이한테 돌려주면… 혹시 걔 다리가 낫진 않을까 생각했어.”

그에 하련솔의 어깨가 굳었다. 놀라 얼음이 된 이 앞에서 이림범은 진지했다. 무척 진지하게 고민했고, 깊이 갈등했다. 끝내 제 손을 떠난 노리개를 떠올리며 그는 괴로운 듯 이마를 찡그렸다. 그리고 제 의문에 스스로 대답했다.

“그럴 일은 없겠지. 나도 알아.”

이내 그는 두 눈을 세게 내리감았다. 콧잔등에 주름이 지도록 인상을 쓰며 내쉰 한숨이 무거웠다. 자조 섞인 속삭임도 기운 없이 빠져나왔다.

“나도 아는데….”

이림범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하련솔이 그의 두 귀를 붙잡아 쥐고, 그의 입을 제 입술로 틀어막았기 때문이었다.

“…….”

그러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이 착한 아이를 칭찬해 주지 않고서는, 예쁜 애인을 사랑해 주지 않고서는, 하련솔은 도저히 오늘을 넘길 수가 없었다. 다시 내리기 시작한 소나기가 창문을 두들기는 이 오후를 그저 보낼 수가 없었다.

“범아.”

기습적인 입맞춤에 당황한 듯 이림범이 두 눈을 끔벅였다. 굳게 다물린 그의 입술 위에 하련솔은 연신 입맞춤을 남겼다.

“애기야….”

그리고 그의 몸 위에 제 몸을 완전히 눕혀 버렸다. 이림범의 스웨터에 맞붙은, 노란 파자마에서 정전기가 일었다. 젊고, 착하고, 귀여운 황제의 뺨에 하련솔은 날숨을 묻혔다. 펄펄 끓는 애정을 못 이겨 뺨과 귀에 연달아 입을 맞추자, 이림범이 ‘헉’ 소리를 냈다. 하련솔이 쏟아낸 애정에 심장이 다 터지도록 놀라서는 뒤늦게 신음한 것이었다.

“…….”

그러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깜짝 놀란 나머지 온몸이 다 굳어 버려, 그는 허리부터 소파 등받이를 타고 미끄러졌다. 긴 소파에 가로로 눕다시피 한 이림범 위에 걸터앉아 하련솔도 입을 다물었다. 다만 저를 올려다보는 새카만 눈동자를 빤히 바라볼 따름이었다.

이림범의 검은 눈에 감돌던 순한 아이의 기운이 점차 사라졌다. 동생을 향한 정처 없는 걱정도, 약간의 후회와 어쩔 수 없이 맛보아야 하는 안타까움도 차례로 자취를 감췄다. 툭… 벌에 쏘이기라도 한 듯 빨갛게 달아오른 손으로 하련솔은 제 파자마 상의 밑단의 단추를 풀었다. 툭… 배꼽 위의 단추를 풀고, 툭… 약간은 우물쭈물하며 한 단 한 단, 목 밑 단추까지 전부 풀어 내렸다.

그러자 이림범의 눈 안에 불이 튀었다.

“앗!”

황제가 몸을 벌떡 일으키자 하련솔의 상체가 발라당 뒤로 넘어갔다. 소파 위에 풀썩 드러누운 채 당황하기도 잠시, 하련솔은 파자마 상의를 완전히 벗었다. 꾸물꾸물, 소매에서 팔을 빼내고 옷가지를 카펫 위에 떨어뜨리는 내내 그는 이림범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귀엽다 못해 유치하기까지 한 노란 파자마 차림으로 벌인 터무니없는 스트립쇼에, 이림범이 더운 숨소리를 흘렸다.

이내 큰 손이 하련솔의 가슴에 들러붙었다. 딱딱한 흉곽이 느껴지도록 야트막한 가슴 위에 맴돌던 손은 날씬한 옆구리를 따라 흘러내리다가, 평평한 아랫배 위에서 멈췄다. 부지불식간에 큰불이 붙은 눈으로 이림범은 하련솔의 마른 배를 노려보았다.

그대로 잠시간 무얼 고민하는 듯 침묵하더니, 그는 대뜸 하련솔의 손을 잡아다가 제 바지 허벅다리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물었다.

“괜찮겠어?”

“…….”

온순한 한편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상대가 먼저 입을 맞추고 옷까지 벗어 보였건만, 그래도 허락을 구하는 모습이 순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저를 다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도망치지 않을 자신이 있냐고 묻는 태도에서 자신감이 넘쳤다.

그 자신감이 오만이 아닌 이유를 하련솔은 알았다. 두꺼운 청바지 한 겹을 사이에 두고 느껴지는 더운 기운에 하련솔은 입술을 살짝 비틀었다.

“뭐… 어때.”

마른침을 연신 삼키며 하련솔이 입을 열었다. 이림범의 숨소리가 워낙 고요한 탓에, 제 혓바닥이 입천장에서 떨어지는 소리까지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어차피 세 시간이나 남는데….”

애써 쥐어 짜낸 대답 뒤에 이림범의 웃음소리가 따라붙었다.

“세 시간 아니야…. 열두 시간이지.”

그는 덥석 안겨 온 기회를 초벌로 끝낼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도자기 대신 하련솔의 몸을 굽고, 적시고, 재벌하고 식힐 시간까지 넙죽 덧셈하며 이림범은 제 스웨터를 훌러덩 벗어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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