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108화 (108/135)

109.

무언가 번뜩 생각난 사람처럼 이림범이 불쑥 소파에서 일어났다. 대뜸 성큼성큼 움직이는 그를 살피느라 하련솔은 소파 팔걸이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흥분한 탓에 더욱 부푼 듯 커다란 어깨와 팔 근육을 자랑하며 이림범은 창문 앞으로 다가가 섰다. 그러더니 멀찍이 놓인 건물을 향해 무어라 수신호를 보인 뒤 커튼을 쳐 버렸다. 가깝고 커다란 거실 창은 물론이고 멀리 놓인 부엌의 조그만 창까지 전부 가리고서, 소파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다급했다.

그 바람에 누런 개가 화들짝 놀라 2층으로 달아났다. 덩치 큰 남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게 무서운 모양이었다. 동글동글한 개의 뒤꽁무니를 살피는 하련솔의 품 안으로 이림범이 달려들었다.

“더덕이 말고, 나를 봐야지.”

그의 엄지에 아래턱이 눌려, 하련솔이 고개를 휙 숙였다. 그의 관심을 마구 갈구하며 이림범은 연신 입을 맞추어댔다. 쪽쪽, 쪽쪽… 새 부리로 쪼는 듯한 입맞춤에 하련솔이 웃었다. 미소로 벌어진 입술 새로 이림범은 냉큼 혀를 비집어 넣었다.

하련솔이 할 일은 많지 않았다. 당황해 ‘아’ 소리를 내는 게 전부였다. 그의 정신을 쏙 빼놓도록 진하고 깊은 키스를 퍼부으며 바쁘기란 이림범 몫이었다.

커튼을 칠 필요도 없었겠다고, 이림범은 생각했다. 그는 커다란 소파 위의 하련솔을 그보다 더 커다란 덩치로 완전히 덮어버렸다. 황제의 몸 아래에 깔린 무화가 바깥으로 보일 수 있는 부위라고는 벌어진 두 다리뿐이었다.

‘아니지. 그것도 다 나만 봐야지.’

응큼한 생각에 이림범이 방긋 웃었다. 맞붙인 입술이 가늘어지는 걸 느낀 듯, 하련솔이 그의 귀를 꼬집었다.

“왜 웃어.”

타박하듯 건넨 질문에 이림범은 더욱 크게 웃었다.

“좋아서.”

이내 그는 하련솔의 몸을 탐할 준비를 마쳤다. 마른 몸 곳곳에 입술 도장과 지문을 새겼고, 가장 여린 살의 감촉을 즐겼다. 하련솔 또한 그를 따라, 엉성하게나마 황제의 몸에 제 손자국을 남겼다. 이림범이 와락 상체를 숙이며 저를 껴안을 때면 단단한 어깨에 괜스레 잇자국을 새기기도 했다.

그렇게 두 남자의 몸이 한데 뭉개졌다. 하련솔의 품 안으로 거세게 파고들며 이림범의 마음은 그저 달떴다. 인간성을 버리고 순 짐승이 되어, 가장 긴밀한 포옹을 나누는 순간이었다.

“학…! 자, 잠시만…!”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옆으로 홱 틀며 하련솔이 신음했다. 가쁜 숨이 반, 들뜬 목소리가 반이었다. 이내 욱… 메슥메슥한 기운이 실린 날숨이 묵직하게 흘렀다. 뱉어져 나오는 토사물만 없다뿐이지 분명한 구역질 소리였다.

“…….”

“…흐, 윽….”

당황해 동작을 멈춘 이림범의 배 밑에 깔려, 하련솔은 사지를 뻗어버렸다. 침으로 흥건해진 입술을 크게 벌리고서 그는 헐떡헐떡 호흡했다. 대뜸 치민 토악질과 뻣뻣한 통증을 참아내느라 그는 체면을 차리지도 못했다. 이림범 역시 하련솔에게 대단한 변명이나 상황 수습 따위를 바라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맞붙였던 아랫배를 떼어 내고 뒤로, 뒤로 물러섰다.

답답한 듯 숨을 헐떡이는 이에게 공간을 내어주는 사이, 이림범의 성질은 풀썩 꺾였다. 욕망을 쏟아붓길 미루어 놓고 그는 오른손바닥을 하련솔의 가슴 위에 올렸다. 그리고 심장 박동을 읽어내렸다. 거친 접촉에 놀란 듯, 하련솔의 약한 심장은 흉통 위가 팔딱거리도록 야단이었다.

“하아…, 흐, 하아….”

두 눈을 질끈 감고 끙끙거리는 하련솔의 숨결에 따라 야트막한 가슴팍이 위아래로 들썩거렸다. 그 앞에서 이림범은 무척 차분했다. 창백하고 보드라운 가슴 위에 다섯 손가락을 대고, 그는 천천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손 끝마디가 스친 살결 위에 다섯 가닥의 발간 얼룩이 남았다.

“괜찮아. 형. 천천히….”

야트막한 가슴 위를 느릿느릿 두들기며, 이림범이 속삭였다.

“천천히 숨 쉬자.”

그러면서 그는 하련솔에게 들리게끔 아주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스읍, 하아… 스읍, 후우… 소리 내어 크게 호흡하길 여러 차례, 하련솔이 그를 따라 제 숨결을 정돈했다. 일그러졌던 얼굴이 서서히 펴지고, 새빨개졌던 눈가엔 투명한 눈물 자국만 옅게 남았다.

“아….”

이내 하련솔이 왼팔을 들어 제 얼굴을 푹 덮었다. 그리고 탄식하듯 말했다.

“진짜… 미안…. 내가 먼저 하자고 해놓고….”

“아냐, 괜찮아. 지금 형 엄청나게 귀여워….”

머릿속이 핑 도는 느낌에 하련솔은 맥을 못 추는데, 그의 마른 가슴을 어루만지는 이림범의 대답은 빠르기만 했다. 지나치게 큰 진실성이 실린 대꾸에 하련솔이 질렸다는 듯 낮게 웃었다. 그러다가도 입술을 꾹 짓씹었다. 억울한 듯 구겨진 입매가 가느다란 팔뚝 아래로 보였다.

“괜찮아.”

토닥, 토닥… 이림범은 그의 가슴을 연신 도닥였다. 그러다가도 마른 배 위로 손을 옮겼다.

“밥 먹자마자 운동해서 체했나 보네.”

그가 내놓은 색다른 해석에 하련솔이 이마를 찡그렸다. 그리고 흐흐 웃었다.

“이미 배부른데 더 먹으라고 해서, 그래. 그게 그렇게 싫었어?”

제 아랫배에 대고 묻는 말이 능청스러워, 하련솔이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서러운 이를 웃기는 데에 성공한 기쁨에 이림범도 그를 따라 웃었다. 그러곤 하련솔의 팔뚝 아래로 고개를 비집어 넣고, 그의 아랫입술에 묻은 신 침을 슬쩍 핥았다.

“아, 하지 마…! 흐흑….”

“우는 거야, 웃는 거야?”

“웃는 거….”

허탈한 듯 큭큭 웃으며 하련솔이 눈물을 훔쳤다.

이 연약함은 평생 그를 떠나지 않을 것을, 이림범은 알았다. 이제 와 노리개를 불태운들 아픈 이가 더럭 건강해질 리 없었다. 숨 가쁘게 퉁퉁 뛰는 그의 심장은 오로지 이림범이 신경 써야 할 몫이었다. 하련솔을 아프게 하지 않는 것 또한 그의 책임이고 본분이었다.

호흡도 기분도 진정된 듯, 하련솔이 제 얼굴을 가렸던 팔을 치웠다. 이림범은 기다렸다는 듯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붙였다. 아주 느리고 신중한, 설움을 훔쳐내려는 입맞춤이었다. 부드럽게 맞붙었던 입술이 천천히 떨어지며 점성 어린 소리를 냈다.

하련솔의 가슴 중앙에 손끝으로 선을 그리며, 이림범은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렸다. 약한 이를 체중으로 뭉개버리지 않고자, 한쪽 팔뚝으로 제 상체를 받치며 누운 채였다. 하련솔의 다리는 자연스럽게 그의 허리 양쪽으로 벌어졌다. 전보다 편안해진 태도였다. 전보다 진득해진 묘한 기류가 그들 사이를 묶어놓았다.

얌전히 서로의 눈코입을 읽어내리는 시간이 잔잔히 흘렀다. 굵은 빗방울이 창문인지 차양인지를 두들기는 박자마저 느릿느릿했다. 비가 세상을 적시는 소리는 이상하게도 불이 장작을 태우는 소리와 닮아 있었다.

“형.”

하련솔의 이마며 뺨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떼어 내며, 이림범이 물었다.

“불운이 다 사라지면… 그래서 다시 재수가 좋아지면, 이제는 뭘 하고 싶어?”

“글쎄….”

하련솔의 표정이 다소 멍해졌다. 마지막으로 재수가 좋았던 날이 언제였는지 그는 기억하지 못했다. 넘어지고, 깨지고, 박살 나고 다치지 않는 삶이 어떤 것인지 그조차도 까마득했다.

“하고 싶은 일, 가고 싶은 곳, 갖고 싶은 것…. 뭐든지 말이야. 생각해 본 적 없어?”

“음….”

하련솔로서는 드물게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었다. 이림범의 말마따나 그는 정말이지 단 한 번도, 운이 좋아지거든 무얼 할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애초에 기대를 하지 않았기에 그랬다. 그는 저에게 닥쳐온 시련이 저주에 의한 것이란 말조차 믿지 않고 살아온 남자였다. 험난한 어제를 수천 일 지나왔어도 그는 여전히 그였다. 귀신도 외계인도 저주도 믿지 않고,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진짜’로 여겼다. 여태껏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었다.

그러니 저에게 닥친 형체 없는 불운이 사라진들 당장은 소망하는 일이 없었다. 가고 싶은 곳도 없고, 갖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러는 너는?”

대답 대신, 하련솔은 받은 질문을 이림범에게 돌려주었다.

“이제 축복이니 행운이니 하는 게 없으면, 너한테도 가끔은 재수 없는 날이 있을 텐데…. 괜찮겠어?”

“난 괜찮아.”

이림범의 대답은 야속할 만치 빨랐다. 큰 확신이 실린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그런 게 평범한 거라면 난… 그래도 좋아.”

이림범의 목소리는 하련솔의 입술 끝에서, 목덜미에서, 가슴을 타고 내려가 배 아래에서 들려왔다. 음성은 점차 뭉개지며 아득하게 들리는데, 그 입술이 안겨주는 감각은 예리하고도 짙었다.

“나는 형이랑 살고 싶어. 그렇게 평범하게….”

쪽, 쪽… 입 맞추는 소리를 들으며 하련솔은 고개를 추켜올렸다. 두 눈을 내리감고서, 그는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질문을 괜스레 건넸다.

“뭐 하는 거야….”

그러자 이림범이 장난꾸러기처럼 웃었다.

“재도전.”

이제 하련솔은 하늘에 대고 기도해야 했다. 거친 빗소리가 제 숨소리를 모두 가려주기를. 그의 신경은 더는 주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온몸이 이림범의 손길에, 입술에, 혀끝에 바짝 집중했다. 덩굴식물처럼 제 허리에 감기는 손을 붙잡아 쥐고서 하련솔은 입을 크게 벌렸다.

그리고 소나기가 그를 배신했다. 거칠게 터진 숨결을 빗소리도 가려 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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