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어슴푸레한 새벽, 하련솔의 잠을 깨운 것은 익숙한 듯 낯선 발소리였다. 토돗, 토도돗… 바삐 들려오는 소리에 누가 마룻바닥을 손톱으로 두들기나 하고 고개를 들었더니, 복도로 통하는 문 앞에 우뚝 선 개가 보였다. 막 깨어난 하련솔을 확인하자마자 누런 개, 더덕이가 짧은 네 다리로 후다닥 그에게로 달려왔다. 그때마다 더덕이의 발소리가 톡, 토돗 울렸다.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나, 하련솔은 더덕이를 안아 주려 했다. 그러나 하련솔의 코앞까지 다가왔던 더덕이는 침실 문밖으로 뛰어나가 버렸다. 순한 더덕이가 이토록 바쁜 원흉은 낯선 침입자에게 있었다. 개의 발소리가 멀어졌다가 재차 가까워진 순간, 복도를 지나던 세 사람이 하련솔의 눈에 들어왔다.
하련솔과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그들은 우뚝 멈췄다. 당황한 듯 얼어붙은 낯선 이 앞에서도 하련솔은 멀뚱멀뚱했다. 머리칼은 부스스한 데다 두 눈이 퉁퉁 부었고, 뺨에는 홍조의 기운이 얼룩으로 남은 모습이었다. 침입자를 쫓아내기 바쁜 더덕이와 달리 하련솔은 평화로웠다. 그들 모두 익숙한 유니폼을 입고 있어서였다.
두 사람은 옥색 저고리를 걸친 시종이고, 한 사람은 자주색 저고리를 입은 사내 상궁이었다. 양손 가득 빨래 더미와 종량제 및 분리수거 봉투, 그리고 청소 도구를 든 채였다. 황제와 무화가 잠든 때를 노려 청소를 하러 온 모양이었다.
“…….”
잠든 황제마저 깨울까 봐, 사내 상궁은 소리 없이 입만 뻐끔거렸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세 사람을 구경하며 하련솔은 천천히 상황을 파악했다.
어제 오후에는 소파를 적시도록 이림범과 몸을 섞었더랬다. 소나기가 그칠 무렵에는 그의 팔에 들려 침실로 옮겨지기도 했다. 그대로 침대에서 또 한 번 뒹굴었는데, 눅진한 관계는 색정적이다가도 놀이를 하는 양 웃기기를 반복했다. 이림범은 성질도 생기도 팔팔한 반면 하련솔은 자꾸만 숨이 가쁘고 몸이 아파, 서로 간에 몸을 겹치다가도 몇 번이고 중단하고 쉬어야 했다.
공들인 잠자리에서 연거푸 맥이 끊기면 시무룩하거나 서운해할 만도 한데, 이림범은 조금도 그러질 않았다. 도리어 그때마다 하련솔의 어깨며 팔다리를 주물러 주고, 간식을 가져다 먹이며 수다를 떨었고, 더덕이를 불러 인형을 흔들며 놀아 주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술술 흘렀더랬다. 해가 저물어 밤이 될 때까지 하련솔은 침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자주 웃었고 때때로 지쳤고, 조금은 울기도 하며 보낸 시간이 진득했다. 그러다 까무룩 잠들어버렸다.
‘형, 자…?’
아쉬움을 못 감추던, 이림범의 낮은 속삭임이 뒤늦게 귓가에 감돌았다. 괜스레 간지러운 귀를 만지작거리며 하련솔은 침대 위를 훑어보았다. 이불 밖으로 막 빠져나온 그는 당연하다는 듯 나신이었다. 그의 허리에 제 오른손을 올려둔 채 잠든 이림범 또한 완전히 나체 상태였다.
“헉….”
뒤늦게 화들짝 놀라, 하련솔은 침대 밖으로 반쯤 흘러내린 이불을 부랴부랴 잡아끌었다. 그러곤 제가 아닌 황제의 몸을 덮어 가려주었다. 그러곤 ‘쉿’, 검지를 세워 제 입 앞에 가져다 댔다.
조용히 해 달라는 수신호에, 사내 상궁이 쩍 벌어졌던 입을 합 다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하련솔이 그를 따라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상궁이며 시종이며 가릴 것 없이 허리를 조아리며 종종 물러났다.
불청객이 모두 사라진 펜션에는 기분이 좋아진 개와 잠이 덜 깬 무화, 그리고 황제만이 남았다. 길게 하품하면서 하련솔은 이림범의 옆자리에 다시 누웠다. 떨어졌던 황제의 손도 재차 끌어다가 제 배 위에 올렸다.
한결 편안해진 자세로 살펴본 이림범의 얼굴은 한 폭의 명화 같았다. 누군가 공들여 완성해 낸 작품이라, 이대로 영원히 움직이지 않고 변하지도 않을 것 같았다. 하련솔은 그 앞으로 고개를 가까이 가져다 댔다. 그러자 잠든 이 특유의 깊은 숨결이 느껴졌다. 이번 여행을 위해 시간을 내느라, 적어도 사나흘 어치의 일을 바삐 해치웠을 이림범이었다. 혈기왕성한 젊은 황제도 결국은 사람인지라 체력이 바닥나서는, 시종들이 다녀가도 눈치채질 못하고 곯아떨어진 모양이었다.
색, 색… 콧김으로 빠져나온 날숨이 간지러워 하련솔은 웃었다. 이부자리에 함께 누운, 타인의 숨결이 제 것처럼 편안한 시간이 무진 반가웠다. 저에게 이런 인연이, 또 연인이 생길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잠든 이림범의 눈과 코와 입술을 손끝으로 선을 그리듯 어루만지며 하련솔은 가만히 두 눈을 내리깔았다. 지나간 질문에 해 줄 답이 이제야 생각났다. 불운이 다 사라지면 어떤 일을 하고, 어디에 가고, 뭘 가지고 싶냐고 그랬던가. 하련솔의 대답은 ‘모른다’에서 ‘없다’로 변했다. 하고픈 일도, 가고픈 곳도, 갖고픈 것도 ‘없다’. 이미 이림범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여행을 오고, 그의 마음을 얻었으니 지금으로도 충분했다.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치도록 벅찬 행복이었다.
잠든 이의 콧잔등에 조심스레 입을 맞춘 뒤, 하련솔은 천천히 침대에서 벗어났다. 침실 주변을 빙빙 도는 더덕이의 발소리 때문이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어제는 온종일 뒹굴기 바빠서, 누구도 개의 저녁을 챙겨주지 않은 듯했다.
“더덕아. 쉿…. 가자, 나가서 밥 줄게….”
소리 숙여 속삭이며, 하련솔은 살금살금 걸었다. 지친 황제를 깨우지 않으려는 그의 몸짓을 흉내 내기라도 하는 듯, 더덕이도 발톱 소리를 작게 내며 느릿느릿 움직였다.
펜션의 1층에 도착한 무화와 개는 부엌으로 직행했다. 식탁 가득 시종들이 차려두고 간 식사가 푸짐했다. 간식이 담긴 도시락을 보자마자 하련솔은 대령숙수의 존재감을 느꼈다. 정림사지 석탑 모양의 5단 도시락은 색색의 한과로 가득 차 있었고, 석등의 작은 지붕을 흉내 낸 뚜껑이 달린 텀블러는 식혜로 묵직했다. 상궁이고 호위 실장이고 죄 우리를 따라왔다던, 이림범의 말은 결국 농담이 아니었다.
텀블러를 냉큼 집어 들고, 식혜를 홀짝거리며 하련솔은 싱크대로 향했다. 상대적으로 맑은 윗물을 두세 모금 덜어낸 뒤에야 텀블러에 약간의 여유 공간이 생겼다. 식혜가 넘치지 않게끔, 하련솔은 텀블러를 살살 흔들어 작은 회오리를 만들었다. 그러자 아래에 가라앉아 있던 엿기름가루와 밥알이 잘 섞였다.
‘음! 달다.’
달콤한 식혜를 콸콸 들이켜며 하련솔이 찾은 것은 개 사료 포대였다. 묵직한 포대를 집어 들고 옅은 전등 옆으로 가, 불빛에 의존하며 성분표를 읽었다. 제 개에게 줄 사료의 재료를 확인하는 하련솔의 발목에, 더덕이가 코 도장을 찍어댔다.
굶주린 개가 제 무릎을 연신 치며 재촉하기에, 하련솔은 작은 밥그릇에 사료를 부어주었다. 더덕이는 게 눈 감추듯 사료를 먹어 치웠다. 하련솔은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러곤 밥그릇을 핥아대는 더덕이에게 사료 서너 알을 더 건네주었다. 한 알 두 알 받아먹을 때마다 ‘더덕아’ 하고 이름을 속삭여주기도 잊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더덕이의 몸이 어제보다 깨끗했다. 흙냄새가 풍기는 걸 보면 목욕까진 시키지 못한 듯하나, 물수건과 빗질로 온몸의 털을 다 닦아주긴 한 모양이었다. 짧고 굵은 목에도 새 목걸이가 채워져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하련솔은 싱크대를 다시 살폈다. 그리고 생각했다.
‘문정궁 시종들은 진짜 최고라니까.’
어찌나 눈치가 빠르고 일머리가 좋은지, 시종들은 개 사료는 물론이고 산책용 리드 줄까지 구해다 놓았다. 텅 빈 텀블러를 내려놓고서 하련솔은 리드 줄을 집어 들었다.
그때부터 더덕이는 얌전하지 않았다. 녀석은 하련솔의 근처를 빙글빙글 돌며 어서 나가자, 얼른 나가자 채근하듯 헐떡거렸다. 그 소리가 이림범의 잠을 깨울까 봐, 하련솔은 부랴부랴 소파에 놓인 새 옷가지를 챙겨 입었다.
새 속옷과 연하늘색 청바지, 상아색 니트를 걸치고서, 목줄을 채운 더덕이와 펜션 정원에 나선 뒤에야 하련솔은 여러 문제에 직면했다. 우선 부랴부랴 걸친 상의가 제 것이 아닌 이림범의 것인 듯했다. 소매가 손등을 덮도록 길고 밑단이 축 늘어져서였다. 별수 없이 니트 소매를 한껏 접어 올려야 했다.
게다가 그는 발목을 다친 환자였다. 밤새도록 황제에게 물리고 빨리고 안긴 덕에 병세가 사라져서는, 기분이 워낙 좋은 탓에 잠시간 그 사실을 잊어버렸다. 더덕이의 목줄을 꼭 쥐고서 하련솔은 깁스를 찬 발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곤 한 발… 두 발… 느릿느릿 걸었다.
“더덕아. 뛰면 안 된다. 알았지?”
오래 걷거나 세게 뛰진 못할지언정, 새 가족을 찾은 개에게 산책로를 구경시켜줄 수는 있을 성싶었다.
아무래도 더덕이는 천재 강아지가 분명했다. 제 목줄을 쥔 이가 환자임을 이해하는 양 더덕이는 수제비 같은 귀를 뒤로 젖히도록 신난 채로도 뛰지 않았다. 하련솔의 근처를 빙글빙글 맴돌며 갈대 뿌리 냄새를 맡고, 영역 표시를 하고, 연신 꼬리를 흔드는 내내 개는 차분했다. 신이 난 듯 씰룩거리는 털북숭이 엉덩이를 구경하며 하련솔은 절뚝절뚝 움직였다.
그가 휙, 뒤를 돌아볼 때마다 갈대밭 너머에서 손전등 불빛이 번쩍였다. 무화의 산책을 대놓고 뒤따르는, 황제의 호위 실장이 있었다. 그가 비춰준 불빛에 의존하며 하련솔은 속 편하게 산책로를 걸어 내려갔다. 밤새 내린 비 냄새가 기분 좋은 새벽이었다.